[윤영신, "적폐 對 폭력 독재," 조선일보, 2020. 9. 25, A35쪽.]
노무현 정부 때 조세연구원(현 조세재정연구원) 선임 연구위원이 정부 정책을 비판했다가 징계를 받았다. 부동산 정책에 “보완이 필요하다”고 했는데 직위 해제와 ‘1년간 대외활동 금지’ 처분이 내려졌다. 그 어떤 학술회의에서도 사회자·발표자·토론자로 참여해선 안 되고 ‘참관’만 허용됐다. 연구 활동도 못하게 했다. 언론 인터뷰도 금지당했다. 인도 카스트에 가장 밑에 있는 ‘불가촉천민’이 된 것이다.
▶이 연구원이 지역 화폐가 실패했다는 보고서를 냈다가 14년 만에 다시 ‘현대판 분서갱유(焚書坑儒)’에 휩싸이고 있다. 지역 화폐가 골목 상권을 살리지 못하고 도리어 화폐 발행 비용, 국고보조금 낭비 등 부작용을 낳았고, 올해도 229개 지자체가 총 9조원어치 지역 화폐를 발행하는 데 경제적 순손실이 2260억원에 달한다는 게 보고서 요지였다. 보고서를 작성한 연구위원은 “지역 화폐를 우후죽순 발행하는 것은 지역 정치인들의 정치적 목적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자 지역 화폐를 자신의 정치 재산으로 삼고 있는 이재명 경기도 지사가 지난주부터 연일 조세재정연구원을 난타했다. 처음엔 “근거 없이 정부 정책을 때리는 얼빠진 국책 연구기관”이라고 발끈하더니 다음 날엔 “철밥통이 국민들 고통을 외면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것으로도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그 다음엔 “보호해야 할 학자도, 연구도 아니며 청산해야 할 적폐일 뿐”이라고 퍼부었다. 설립된 지 30년 가까이 된 국책 연구기관도 제 마음에 들지 않으면 ‘적폐'가 된다.
▶경제 현실에 대한 분석이나 비판을 내놓았다가 정부 심기를 건드려 혼쭐이 나는 사례가 한둘이 아니다. 경총 부회장은 비정규직 정책을 비판했다가 옷을 벗고 고용부 감사와 압수수색을 당하고 휴대전화까지 뺏겼다. 고용·소득분배 통계가 정권 입맛에 안 맞게 나오자 아예 통계청장을 교체해버렸다. 국회예산정책처는 ‘한국판 뉴딜’ ‘세금 일자리’ 등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보고서를 냈다가 민주당으로부터 “예산정책처의 비중을 줄이겠다”는 협박을 받았다. 학문적 소신이나 연구 활동마저 정권과 코드가 맞지 않으면 적폐로 몰리는 세상이다.
▶국민의힘 의원들은 이 지사를 향해 “분노조절 장애” “희대의 포퓰리스트” “왕조시대 폭군의 논리 구조” “본인 식견의 얕음을 내보인 일”이라고 비판했다. “그릇이 작다”는 말도 나왔다. 한 경제학자는 “폭력적 독재의 잠재성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여 심히 우려된다”고 했다. 그러자 이 지사는 국민의힘을 “사기 정당”이라고 반격했다. ‘적폐’ 대(對) ‘폭력 독재’의 싸움은 앞으로 더 가열될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