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한글날, 광화문이 차벽(車壁)과 경찰 병력으로 포위되는 진기한 풍경을 또 보고 싶다.
엿새 전 개천절에 한 번 본 거로는 성에 안 찬다. 그러려면 경찰은 오늘 새벽부터 나와 ‘재인산성’을 부지런히 쌓고 쌓아야 할 것이다. 지난번처럼 총길이 4km의 차벽을 재현하려면 경찰 버스 500여 대는 동원해야 한다. 능숙한 주차 솜씨로 버스 간격을 물샐틈없이 좁혀야 한다.
아예 집에서 광화문으로 나올 엄두가 안 나게 만들어야 한다. 이번에도 지하철 중 광화문역과 시청역, 경복궁역은 서지 않고 그냥 통과시킬 게 틀림없다. 지상으로 들어오는 길목과 이면 도로에는 검문소와 바리케이드가 설치될 것이다. 계엄령을 내린 것처럼 보여야 겁을 먹는다. 복학생 시절인 1980년대에 겪었던 불심검문이 곳곳에서 이뤄져야 할 것이다. 국경일에 태극기를 흔들거나 소지한 이들은 ‘불순분자’로 찍힐 것이다. 그날 한 금융 그룹 고문은 자신의 광화문 사무실에 들어가기까지 모욕적 검문을 다섯 차례 받았다고 한다. 그는 통화에서 나훈아처럼 “세상이 왜 이래?”라고 말했다.
한글날이지만 광화문 세종 동상 앞의 기자회견은 금지될 것이다. 마스크 쓴 1인 시위도 봉쇄된다. 어느 법령에 근거해 막느냐고 물으면, 경찰은 “한두 명이 모이면 대규모 시위가 된다”고 공식 답변할 것이다. 끝내 광화문을 못 밟아본 한 시민이 ‘광화문이 니꺼(네 거)냐’는 팻말을 들고 있던 장면을 이번에 또 볼 수 있을 것이다.
법원에서는 ’10대 미만 차량 집회'는 봐줬지만, 정부 당국은 국민 건강과 생명, 안전을 위해 그것도 안 된다고 또 막을 것이다. 광화문 주변으로 차를 몰고 나오면 체포하거나 면허정지 처분을 하겠다는 경고는 여전히 유효하다. 자동차 창문을 여는 것도 금지된다. 창문을 열어 탑승자가 ‘문 정권 타도’를 외칠 때 코로나 바이러스가 바깥으로 튀어나올까 봐 국민 건강을 염려해 그러는 것이다.
이 때문에 그저께 국감에서 정은경 질병관리청장의 지침을 들어야 했다. 한 야당 의원이 ‘차 타고 앞뒤로 감염 위험이 있느냐?’고 묻자, 정은경은 ‘차에서 내리지 않으면 위험이 크지 않다’고 짧게 답했다. 현 정권에서 속이 빤히 보이는 잔수를 써대니, 국감장에서까지 이런 유치원 수준의 방역 문답을 해야 하는 지경이 됐다.
사람들이 모이는 것은 코로나 방역을 위태롭게 한다. 광복절 집회가 ‘코로나 재유행’의 주범처럼 됐듯이, 집회 한 번으로 자칫 모든 방역 실패 책임을 덮어쓴다. 광화문에 굳이 나오겠다는 사람들도 모를 리 없다. 이들 대부분은 우리 주위에서 늘 만나는 속상한 국민일 뿐이다. 문 대통령과 현 정권이 이들을 코로나 상황에도 광화문으로 몰려나오게 하는 것이다. 추미애 장관 문제나 서해상 공무원 피격 사건에서 문 대통령은 어떤 모습을 보여줬나. 부글부글 끓는 국민의 마음을 과연 어루만져 준 적이 있었나. 제대로 사과 한번 한 적 있었나.
대선 후보 시절 문 대통령은 ‘국민들이 모여 문재인 퇴진을 요구한다면 어떻게 하겠느냐’는 질문에 ‘광화문 광장으로 나가겠다. 시민들 앞에 서서 끝장 토론이라도 하고 설득하는 노력을 기울이겠다’고 했다. 돌아보면 이런 코미디도 없다. 문 대통령에 대한 기대는 오래전에 접었지만, 적어도 본인만은 스스로를 돌아봐야 할 것이 아닌가.
말로는 광화문에서 시민들과 토론이라도 하겠다는 그가 이제는 권력에 취해 ‘광화문 집회는 반(反)사회적 범죄’라고 집요하게 공격한다. 공권력이 살아있음을 보여줘야 한다고 격앙된 어조로 말하고 있다. 법치와 정당성을 잃은 공권력은 조폭 세계의 주먹과 다를 바 없다는 걸 알지 않는가. 문 대통령 세대도 젊은 날 그걸 경험한 적 있지 않은가.
방역을 위해 헌법상 기본권인 집회·결사의 자유를 제한해야 한다면 충분한 설득과 협조를 우선 구해야 한다. 지금 대통령은 방역을 무기로 국민을 갈라치고 협박하고 있다. 정말 방역을 걱정한다면 대통령 눈에는 왜 광화문 집회만 보이는가. 코로나 바이러스는 광화문에서만 돌아다니는가.
개천절 광화문과 서울시청 광장은 원천 봉쇄됐지만, 근처 롯데백화점 식품부는 인파로 붐볐다. 내가 직접 가본 홍대 앞 거리도 청춘 남녀로 어깨가 부딪칠 정도였다. 주말 도봉산 입구는 도떼기시장처럼 등산객이 넘쳐난다. 문 대통령의 논리라면 홍대 거리 젊은이들과 도봉산 등산객들도 ‘반사회적 범죄’의 가담자다. 왜 그쪽에는 건강, 생명 안전을 위해 경찰 버스 차벽이나 철제 펜스를 설치해주지 않나.
문 대통령은 오늘을 무사히 보낸 뒤 “철저히 대비해 빈틈없이 차단했다”고 자평할 것이다. 하지만 많은 국민은 ‘재인산성’에서 문 정권의 본색(本色)을 시각적으로 보게 됐다. 비록 광화문에서 ‘문재인 타도’를 외치진 못해도 실제로는 훨씬 더 큰 효과를 거뒀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