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파독재] 언론 이간질에 동원된 ‘재갈’과 ‘공갈’
2021.09.03 11:05
언론 이간질에 동원된 ‘재갈’과 ‘공갈’
나는 기자로 일하면서 험한 세상 살아왔다 여겼다
막장의 언론 탄압 견디면서 ‘민주 국가’를 후배들에게 인계한 양 거들먹거렸다
그게 아니라는 걸 이제야 안다
[김대중, "언론 이간질에 동원된 ‘재갈’과 ‘공갈’" 조선일보, 2021. 8. 24, A34쪽.]
기자(記者)는 무엇으로 기사를 쓰는가? 교과서적(的)으로 말하면 기자는 ‘사실’을 쓰는 직업이다. 사실이 진실이 아닐 때도 있고 진실이 다 옳은 것이 아닐 때도 있다. 그래도 기자는 사실에 집착해야 한다고 한다. 그러면 기자는 ‘사실’만을 적시하는 기계인가?
일생을 기자로 일해 온 경험에 비추어 기자에게는 ‘사실’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초년에는 정의감에 충만했다. 약한 사람, 핍박받는 사람, 가난한 사람을 옹호하고 대변한다는 의무감에 사로잡혀 일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신념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자유·민주·평등·법질서 이런 개념이 끼어들면서 기자는 신념으로 일한다고 생각할 때도 있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팩트라는 결과만 보도하는 것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터득했다. 모든 ‘결과’에 ‘과정’이 있듯이 사실이 반드시 진실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기자는 오히려 결과로서의 사실보다 과정으로서의 진실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도 배웠다. 탈원전 보도에 있어 탈원전이 옳으냐 그르냐와는 별개로 누구에 의해, 왜 어떤 과정을 거쳐 강행됐느냐를 캐내야 하는 것이 기자의 책무다. 그것이 권력에 의한 것일 때 탈원전의 폐해는 배가(倍加)되기 때문이다.
기자는 육감(肉感)으로 기사 쓸 때도 많다. 육감은 논리적이지 않다. 좋은 기사, 옳은 기사는 경험 많은 기자들의 소산이다. 그것은 인맥(이른바 취재 소스)으로 이루어진다. 그 인맥은 신뢰로 지켜지는 것이다. 이처럼 하나의 기사는 정의감과 신념을 바탕으로 연륜에 따른 인맥과 경험과 육감에 의해 탄생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런 경험과 관점에서 지금 문재인 정권이 밀어붙이고 있는 언론중재법안을 들여다보면 나의 기자 인생은 전면 부정될 수밖에 없다. 고의가 있느냐, 없더라도 중과실이 있느냐에 따라 천문학적 엄청난 손해배상을 물릴 수 있는 징벌 제도는 한마디로 사실이건 아니건 기사 자체를 쓰지 말라는 것이며 언론사는 문 닫고 기자들에게는 이직(移職)하라는 통첩이나 다름없다.
이 법안대로라면 기자는 진실이건 아니건 ‘결과’만 보도해야 한다. 재판도 판결문만 보도해야 한다. 검찰의 기소 내용도 사실이 아닐 수 있기 때문이다. 탈원전도 대통령이 ‘언제 중단되느냐’고 물은 적이 없다고 부인하면 기사 쓴 기자와 언론사는 패가(敗家) 할 수 있다.
언론사라고, 기자라고 사실에 기반하지 않은 것을 아무것이나 만들어서 기사 써도 된다는 법은 없다. 최소한의 확인도 거치지 않고 타인의 명예를 훼손할 권리는 없다. 현행법 체계에서도 그것은 처벌의 대상이다. 그럼에도 옥상옥(屋上屋)의 징벌법을 만드는 것이기에 재갈법이며 공갈법이라고 불린다.
이 법의 사실상의 목적은 기자와 경영인을 이간(離間)시키는 데 있다. 자기 기사가 이 법에 걸려 경영인 또는 사주(社主)에게 회사가 거덜 날 만큼의 엄청난 손해배상이 취해질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면 어느 간 큰 기자가 기사를 쓰겠느냐는 것이다. 기자는 경영 측에 책임 떠넘기고 경영 측은 기자 못 믿고 내치는 사태가 분명 올 것이다. 조국(전 법무부장관) 사건 보도만 해도 그렇다. 재판 결과만 보도하면 됐지, 공연히 특종이니 단독이니 하면서 중뿔나게 나서다가 자칫 회사 망하고 나도 망하는 일에 왜 나서겠는가라는 생각이 들 것이다. 아니, 그렇게 했으면 애당초 조국 사건은 생기지도 않았을 것이다.
지난 유신 또는 권위주의 권력은 주로 기자들 겁주는 데 그쳤다. 정부에 불리한 기사를 쓴 기자를 ‘남산’(당시 안기부)에 연행해 지하에 감금하고 겁주고 그리고 “북괴를 이롭게 했다”는 반성문 쓰게 하고 내보냈다. 신문 경영 쪽에는 신문 용지 배분 또는 대기업 신문 광고 끊기 등으로 위협했지만 거기까지였다. 지금 문 정권과 여당은 기자의 밥줄을 끊는 것으로는 안 되겠는지 아예 언론사의 목줄을 끊으려고 나선 꼴이다. 기자를 통제하는 데 가장 효과적인 데가 바로 인사권자라는 것에 착안한 것이다. 애초 이 법안에 손해배상의 처벌을 받은 경영 측이 해당 기사를 쓴 기자에 대해 구상권을 행사할 수 있는 조항을 넣었다가 최종 단계에서 뺀 것을 보면 이 법안의 의도를 알 수 있다.
나는 기자로 일하면서 ‘험한 세상’ 살았다고 여겨왔다. 그러면서 후배 기자들에게 ‘당신들은 이만하면 좋은 세상 살고 있는 거야’라고 말해왔다. 정보부 얘기, 남산 얘기 등을 무훈담처럼 얘기하며 마치 우리 세대가 막장의 언론 탄압을 견디면서 오늘의 ‘민주 국가’를 후배들에게 인계한 양 거들먹거렸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는 것을 이제사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