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만큼 저평가된 직업도 없다. 일만 터지면 "늑장 대응, 부실 수사가 참사를 키웠다"는 여론 재판에 직면하고, 영화 속에선 십중팔구 깡패·부패의 화신처럼 묘사된다. 한국 경찰의 업무 성과는 OECD 선두권이다. 인재층도 다른 직업군에 비해 두껍다. 그런데 동네 애들까지 "×새"라고 해댄다.
'검찰 권력' 문제는 시대적 이슈다. 공룡 검찰을 깨부수겠다며 모든 권력 기구가 궐기했다. 하지만 지나가는 사람에게 물어보라. "검찰 권력을 직접 체감한 적이 있는가?" 국민 99%는 생활에서 검찰이 아니라 경찰 권력을 체감하면서 산다. 차를 끌고 나갈 때마다 본능적으로 경찰 눈치를 본다. 경찰이 보는 방범 카메라는 거리에서 개인의 생활을 기록하고 저장한다. 국민의 정보를 수집할 권한도 경찰에 있다. 의심스러우면 동행을 요구하고 혐의가 있으면 격리할 수도 있다. 예전엔 식당 주방도, 전당포 금고도 경찰이 들어가 단속했다. 경찰은 국가가 공인한 속박 기구다. 대신 국민은 안정과 안심, 질서와 위생 혜택을 누린다. 경찰은 근대 최고의 발명품이란 호평도 있다. 언론과 영화의 비판과 풍자는 경찰이 가진 막강한 권력에 비례한다. 한국만의 현상이 아니다.
경찰은 1954년 형사소송법 제정으로 단독 수사권을 잃었다. 모든 수사에 대해 검찰 지휘를 받게 됐다. 검찰을 사회악처럼 몰아가는 요즘, 사람들은 이승만 당시 대통령이 검찰을 통해 공권력을 장악하고 독재를 강화하려고 악법(惡法)을 만들었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반대다. 당시 형사소송법은 한국 법조계가 존경하는 김병로 선생 주도로 제정됐다. 한인섭 서울대 교수는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에도 불구하고 통과된 드문 법률'이라며 김병로 선생의 자평을 논문에 소개했다. '인권 옹호의 근본 이념에 고뇌한 자국이 (형사소송법에) 가득 찼다.'
당시 한국 경찰은 인권 의식, 사법적 전문성, 정치적 중립성을 의심받았다. 이런 상황에서 치안·위생·경제 등 행정 경찰 분야에서 거대 권력을 누리는 경찰이 사법 경찰 분야에서 단독 수사권까지 가져갈 경우 견제 장치가 사라져 '경찰 파쇼' 현상이 나타날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65년이 지난 지금 한국 경찰은 세 가지 우려를 얼마나 없앴을까. 전문성은 세계적이니 걱정 없다. 지금까지 드러난 폭력 수사 사례는 2000년 약촌 오거리 사건이 마지막이니 인권 의식도 일단 믿어주자.
이제 정치적 중립만 남았다. 문재인 정권 초반 경찰은 이것을 증명할 역사적 기회를 두 번 얻었다. 첫째, '드루킹 사건'으로 알려진 문재인 대선 후보 진영의 '선거 여론 조작' 의혹 사건이다. 경찰은 드루킹의 휴대전화에서 여권(與圈) 실세 이름을 발견한 이후 망부석처럼 굳어져 움직이지 못했다. 둘째, 비슷한 시기 경찰이 진행한 야당 김기현 울산시장에 대한 수사다. 파다 안 나오자 수사팀을 전원 경질해 다시 팠다. 그래도 안 나오자 야당 후보의 공천 확정 당일 압수 수색에 들어가 선거판을 흔들었다. 두 달 더 파도 시원치 않자 선거 직전 사건을 기소 의견으로 검찰에 던졌다. 경찰은 역사적 고비에서 정치적 중립을 스스로 망가뜨렸다. 권력에 붙는 것이 60년 소원을 이루는 데 더 유리하다고 판단했을까. 그렇다면 경찰은 문 정권의 민주주의 수준을 60년 전보다 못하다고 본 것이다.
죽은 권력을 때린 황운하 청장은 고향 땅으로 금의환향해 지금 여당 국회의원을 꿈꾸고 있다. 비슷한 시기 죽은 권력을 때려대던 윤석열 총장은 지금 '직(職)을 걸고' 산 권력과 싸우고 있다. 이것이 두 인물의 내공이자 검·경 두 조직의 단수(段數) 차이다. 1954년 김병로 선생이 고민 끝에 수사 지휘 권을 검찰에 준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과거 칼럼에서도 주장했듯 나는 경찰의 수사권 독립에 찬성한다. 공룡 검찰도 개혁해야 한다. 하지만 경찰은 경찰, 검찰은 검찰이다. 경찰은 자신의 무능이 검찰 때문인 양 떠들지 말고 정치적 중립성을 증명하라. 미성숙한 경찰 권력에 대한 검찰의 통제는 근대 형사 사법의 원리이자 견제와 균형을 추구하는 헌법의 정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