晩秋의 주제곡 ‘최재형·윤석열 현상’
적폐와 농단은 우파만의 舊惡이 아니라 좌파의 新惡이기도 하다
‘우린 진보니까 괜찮다’ 한다면 그거야말로 내로남불 최재형·윤석열 감사·수사 적중하면 진보의 실패 인정해야 한다
[류근일, "晩秋의 주제곡 ‘최재형·윤석열 현상’" 조선일보, 2020. 11.14, A26쪽]
2020년 만추(晩秋)의 주제곡은 이브 몽탕의 ‘고엽’이 아니라 최재형 감사원장이 검찰에 넘긴 원전 월성 1호기 조기 폐쇄 ‘수사 참고 자료’였다. 그리고 그걸 받아보고 한수원·산업부·가스공사를 압수 수색한 윤석열 검찰총장의 서릿발이었다. 이 두 공직자의 듀엣을 들으니 1992년 이탈리아에서 있었던 ‘마니 풀리테(Mani Pulite, 깨끗한 손)’ 사태를 연상하게 된다. ‘마니 풀리테’는 밀라노 검찰청의 안토니오 디 피에트로 검사를 두고 한 말이다. 뇌물 혐의로 구금된 피의자의 제보에 따라 그는 당시 연립 여당이던 이탈리아 사회당 소속 정치인 마르코 키에사를 구속했다.
이 사건은 발생 2년 만에 1948년 성립한 이탈리아 제1 공화국을 송두리째 날려버린 엄청난 파국으로 번졌다. ‘탄젠토폴리(뇌물의 도시)’라는 이름으로도 부른 이 사건에선 4500여 명이 체포돼 1200명이 기소되었다. 국회의원 절반이 걸려들어 더러는 자살도 했다. 보수만 썩었다고 하더니 진보도 썩었다. 부패 정치인들과 공생하는 마피아가 죽이겠다고 협박했으나 피에트로 검사는 수사를 소신껏 밀어붙였다. ‘마니 풀리테’ 25주년에 그는 언론에 이렇게 술회했다. “전엔 도둑과 경찰의 전쟁을 바라봤는데, 요즘엔 도둑 떼와 도둑 떼의 전쟁을 바라보는 것 같다.”
최재형 감사원장과 윤석열 검찰총장의 역할을 ‘마니 풀리테’와 성급하게 동일시할 시점은 아니다. 수사와 재판이 끝날 때까지는 뭐라 예단할 순 없다. 다만 주목할 포인트는 있다. 지난 1년을 장식한 철판 깐 스캔들과 게이트를 계기로 한국 정치의 쟁점이 또 한 번 재설정되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 정치의 쟁점은 지난 70여 년 동안 여러 차례 바뀌었다. 자유당 시절엔 권위주의 보수 여당이냐 자유주의 보수 야당이냐가 쟁점이었다. 3·4·5공화국 때는 근대화·산업화·민주화를 둘러싼 갈등이 초점이었다. 그 연장선에서 보수·진보·우파·좌파 쟁점이 생겼다.
이 이념적 심화 과정에서 확증 편향이 하나 생겼다. “우리가 정의를 대표한다”고 한 운동꾼들의 도덕적 우월감이 그것이다. 그러나 2020년 만추의 시점에도 그들은 계속 “우리가 정의를 대표한다”고 자처할 수 있을까? 그럴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될 일이다. 이탈리아의 ‘탄젠토폴리’ 사태에서도 드러났듯이, 적폐와 농단은 우파만의 구악(舊惡)이 아니라 좌파의 신악(新惡)이기도 하다. 신악을 저질러놓고도 우린 진보니까 괜찮다고 한다면 그거야말로 내로남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