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서해안에서 벌어진 어업 지도원 총격 살해 사건은 우리를 충격에 빠뜨렸다.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 뭔가 새로운 걸 배워야 한다. 그래야 피해자와 그 가족들에게 조금이나마 덜 미안할 수 있다. 현 정부는 북한과 대화를 원하고 협력을 바라지만 명심해야 할 교훈이 있다. 북한에 대해 환상을 가져선 안 된다는 것이다. 그 체제의 본색과 의도는 바뀌지 않는다.
2004년 나온 베스트셀러 ‘그는 당신에게 반하지 않았다’는 그래서 읽어볼 만하다. 그 책은 사실 연인들을 위한 조언이지만 이 정부에도 들려주고 싶은 내용이다. 당신이 어떤 사람에게 빠져 정열적으로 전화하고 문자 보내고 만나자고 간청해도 상대가 무관심한 경우가 있다. 그럴 때 현실을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정신 차려, 그 사람은 너한테 관심이 없어. 시간 낭비하지 마.” 현 정부 인사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다. 그들이 북한과 사랑에 빠져있다는 건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때로는 고통스러운 진실을 마주해야 할 때가 있는 법이다.
‘사랑에 빠져있다’는 말의 의미를 좀 더 분명히 짚고 넘어가보자. 일부에선 주사파 출신 정부 일부 인사가 이념적으로 북한에 빠져있다고 생각한다. 사회주의자이거나 친사회주의 성향을 지녔다는 얘기다. 그러나 이런 부류는 극소수라고 본다. 주사파들도 알 건 안다. 이들이 북한과 사랑에 빠진 건 대부분 이념적이라기보다는 정서적인 뿌리에서 나온다.
누군가 사랑에 빠졌다면 질문을 던질 수 있다. 미모 때문이야? 아니면 돈이 많아서? 성격이 좋아서? 학벌? 아니다. 전문가들 설명은 조금 다르다. 누군가와 사랑에 빠진 사람은 그 사랑을 통해 자기 자신도 기분이 좋아진다. 북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장담컨대 북한과 사랑에 빠진 이들은 북한 지도자나 체제를 경외하는 게 아니다. 주사파들도 바보는 아니다. 그들이 북한에 대해 느끼는 애정은 이를 통해 자신들이 해묵은 북한 문제를 해결하고 통일에 기여한다는 자긍심을 심어준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스스로를 분단 시대 영웅처럼 상상한다는 얘기다. 그런 공상이 지난 20년간 끊임없이 북한과 대화를 시도해온 원동력이었다.
2000년 김대중 대통령이 남북 정상회담을 위해 평양으로 가고 술잔을 기울이며 김정일 위원장을 초청했지만 그는 오지 않았다. 그래도 그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최근에는 문재인 대통령이 새로운 지도자 김정은과 함께 소나무를 심었다. 한국 구세대들은 냉소적으로 이 장면을 바라봤고 신세대들은 관심도 없었지만, 내 좌파 지인들은 애정을 갖고 지켜봤다. 어떤 이는 이렇게까지 말했다. “김정은 위원장 멋지지 않아(cute)?”
그렇게 볼 수도 있겠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건 이 ‘멋쟁이(Mr. Cute)’는 우리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통일은커녕 화해도 원하지 않는다. 김일성은 박정희와 통일을 원하지 않았고, 김정일은 김대중과 통일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김정은도 마찬가지다. 대통령이 누군가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이유는 명백하다. 김씨 일가와 북한 집권층은 자유를 부정하고 발전을 막으면서 1960년대 군사기지처럼 북한을 다스리고 싶어 한다. 그 수단으로 남한으로부터 위협을 계속 활용한다. 긴장이 풀어지면 주민들이 봉기할 수 있다고 본다. 그래서 북한의 진정한 변화는 정권 교체 말고는 기대하기 어렵다.
설사 북한이 정말 화해를 하려 한다 해도 근본적으로 북한은 남한을 믿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할 리가 없다. 북한이 남한이 그들에게 보내는 미소가 거짓이라고 간주하는 건 한국 정치가 보여준 악랄함 때문이다. 북한은 아마도 문재인 대통령도 퇴임 후 2~3년 내에 감옥에 간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그래왔기 때문이다. 분노한 민심을 단두대 삼아 대단치 않은 구실로 전직 대통령들을 감옥에 보낸 게 한국 정치사다. 그럴진대 김정은과 북한 지배 세력이 통일 이후 자기들이 안전하다고 믿을 수 있겠는가. 무슨 면책 특권을 주겠다고 약속한다 해도 그들을 설득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북한과 사랑에 빠진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다. 북한을 개선하려 노력하는 힘을 조국에 쏟으면 어떨까. 그런 노력은 그들뿐 아니라 다른 국민에게도 좋은 반응을 받을 수 있다. 자기 나라 역사와 과거 가치관, 이전 대통령을 비난하는 데 열을 내지 말고 (북한이 아니라) 자기 나라와 다시 사랑에 빠져보는 게 어떨까. 그럴 때 비로소 지난달 비극적인 사고를 당한 어업지도 공무원의 죽음이 의미를 갖게 될 수 있다. 자기 나라 문화와 삶을 더 좋게 만들어 아무도 그 나라를 떠나고 싶지 않게 만드는 게 남은 우리가 정말 해야 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