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하던 김정은이 중국을 전격 방문함으로써 북핵 게임의 셈법이 복잡해지고 있다. 그러나 김정은이 어떤 술책을 부리든 우리 목표는 북한 비핵화와 한반도 평화를 이루는 것이다. 그러려면 김정은이 평화 공세 뒤쪽에 숨겨놓은 '덫'을 찾아 이를 극복해야 한다.
먼저 '비핵화 의지'로 포장한 덫이다. 북한의 비핵화 의지 표명은 과거에도 있었다. 2005년 6월 김정일은 방북한 우리 통일부 장관에게 "체제 안전이 보장되면 핵 가질 이유 없다. 김일성 유훈이다. 국제 사찰 받겠다"고 했다. 북한은 한반도 비핵화 공동성명(1991년), 제네바 합의(1994년), 9.19 공동성명(2005년) 같은 공식 문서에도 서명했지만 약속을 한 번도 지키지 않았다.
'비핵화' 의지가 진심이라고 해도 그 뜻은 우리의 생각과 다르다. 2016년 7월 북한은 정부 대변인 성명으로 '한반도 비핵화 5대 조건'을 제시하며 "한국에 대한 미국의 핵우산정책을 철폐하고, 비핵 지대화란 개념을 적용해 괌 등 한반도 인근에 있는 미군 핵무기를 폐기하라"고 했다. 즉, 한·미 동맹 파기를 요구한 것이다. 이런 비핵화 덫을 무력화하려면 한·미 정부가 북한의 수사(修辭)에 현혹되지 않고 끝까지 냉정해야 한다.
'우리민족끼리'도 위험한 덫이다. 김정은은 "북한의 모든 무기는 남측에 사용하지 않는다"며 우리 민족이 힘을 합해 한반도 위기의 원인인 미국에 맞서야 한다는 논리를 폈다. 그렇다면 6·25전쟁을 포함해 북한이 자행한 도발들은 무엇인가. "수많은 도발에 대해 사죄하고 앞으로 안 하겠다"고 해도 믿기 어려운데 말이다.
문제는 황당한 거짓말도 계속하면 믿는 사람이 늘어난다는 점이다. 북한이 정상회담을 4월 말로 서두르는 이유는 6·15 남북공동선언을 시작으로 광복절과 10·4 선언 기념행사를 남북 공동 개최하기 위함으로 보인다. 광복절 행사를 빌미로 8월에 있을 한·미 연합 연습 조정을 요구하고, 추석 이산가족 상봉을 금강산에서 열도록 제안해 관광 재개와 대북 제재 완화를 꾀할 것이다. 민족이 동맹을 대체할 수 있고 더 유용하다고 우리가 믿는 순간 '우리민족끼리'는 한·미 동맹과 국제 제재를 베고 한국 사회를 파탄의 길로 몰아갈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층 교묘하게 한·미(韓·美) 이간(離間)의 덫과 북·중(北·中) 관계 회복의 실마리를 동시에 깔았다. 과거에는 남·남(南·南) 갈등과 한·미 갈등을 겨냥했다면 이번에는 미·미(美·美) 갈등 불씨까지 보탰다. 현재 미국 정부 입장은 단호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문턱을 낮춰서라도 대화를 계속해야 한다는 측과 더 이상 대화는 무의미하니 군사적 해결을 서두르자는 측이 대립할 가능성이 크다. 양측 내부에서 방법론을 놓고 또 다양한 의견이 나올 것이다.
현재 북한이 서울·워싱턴과의 대화에 응하는 것은 가장 큰 체제 보장 축(軸)인 중국이 국제사회의 대북 제재에 동참해 북·중 동맹이 흔들린 탓이다. 이번에 김정은은 시진핑을 만나 그동안 거부했던 중국의 쌍중단(雙中斷·핵·미사일 개발과 연합 훈련 중단)과 쌍궤병행(雙軌竝行·비핵화와 평화협정 병행 추진)을 수용하는 대미 협상 전략을 제시하고, 시진핑은 대북 지원 재개를 약속했을 것이다. 북핵이 없으면 북한은 중국의 핵우산 아래로 들어오고, 평화협정으로 한·미 동맹이 흔들리면 한국은 중국에 다가올 테니 시진핑에겐 '꽃놀이 카드'인 셈이다. 북·중 동맹 회복을 바탕으로 한 김정은의 새로운 공격이 주목된다.
'북한 핵무기가 없는 진짜 평화'를 만들려면 확고한 원칙과 전략이 필요하지만, 가장 결정적인 것은 강력한 한·미 동맹이다. 북한은 한·미 동맹이 와해되면 핵을 앞세워 남한을 손쉽게 굴복시킬 수 있다고 믿는다. 중국도 한·미 동맹이 깨지면 중국에 유리하다고 믿고 북핵을 묵인해 왔다. 그러나 한·미 동맹이 더욱 강해지면 북한에 핵은 보검이 아닌 독배(毒杯)가 된다. 중국도 북한에 전략적 부담을 느껴 북핵 폐기에 적극 나서게 된다. 어떤 상황에서도 북한 비핵화를 여는 절대무기이자 열쇠는 한·미 동맹이다.
케네스 로고프 하버드대 교수가 쓴 '이번엔 다르다'는 책을 보면 800년 동안 66개국에 일어난 경제 위기는 같은 이유로 반복됐다. '이번엔 다르다'는 환상이 투기와 거품을 만든 것이다. 왕조(王朝) 집단 북한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정부가 북한에 대해 '이번에도 과거와 같다'는 생각으로 접근해야 국민이 염원하는 '다른 결과'를 얻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