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대계층을 아사로 제거하다
2005.12.27 09:47
[김범수, "김정일, 적대계층을 아사로 제거하다," 미래한국, 2005. 10. 8, 8쪽; 北韓 대량아사의 비밀--하기와라 료 '김정일의 숨겨진 전쟁'(下).]
김일성 생존 시에도 북한에 홍수와 우박 등 천재(天災)는 있었지만 그것을 이유로 국제사회에서 식량원조를 받은 경우는 없었다. 하지만 김정일에게는 재해가 오히려 하늘이 준 기회였다. 김정일은 '대량의 식량원조를 무상으로 끌어들이기 위하여 통계 숫자를 적당히 가공하여 국제기구에 공개하라'고 지시했다.
북한외무성은 1994년 9월 발생한 우박피해에 대해 '아주 심한 우박으로 중요 곡창지대인 황해남도와 황해북도에 17만 헥타르(ha)의 농지가 피해를 입어 120만 톤 곡물 손실을 입었다'라고 했다.
1995년 8월 발생한 대홍수 이후에는 '이 홍수가 100년에 한 번 있을 정도로 컸으며 전국에서 200만 톤의 벼와 옥수수 생산이 감소되고 100만 톤 정도의 곡물재고가 유실되어 손해는 150억 달러에 달하였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세계식량계획(WFP)에 따르면 실제 손해는 북한이 발표한 것의 15%에 불과했다.)
이러한 공작의 결과 1995년부터 각 국에서 본격적으로 지원식량이 도착하기 시작했다. 그 해 북한에 지원된 식량은 일본으로부터 50만 톤, 한국 15만 톤, 스위스 1만3,000톤, 미국 9,000톤 등 총 73만여 톤에 달했다.
김정일은 이러한 전과(戰果)를 매우 기뻐하여 식량도입을 담당한 강석주 등 외무성 관계관에게 북한의 최고영예인 노동영웅 칭호(2~3인), 김일성 훈장(5인) 수여를 비롯하여 김정일 이름을 새긴 시계(5인), 노동훈장(10인), 국기훈장 1급 등 300명 정도에게 훈장과 선물을 대대적으로 수여했다.
가축의 사료를 제외한 북한 전 인구에 필요한 최소한의 식량은 1년에 380만 톤이다. 지원식량이 100만 톤 들어오게 되면 대략 700만 명이 1년 간 먹을 수 있다. 그만한 지원식량이 들어와 적절하게 배급을 한다고 하면 아사자는 발생하지 않는다. 국제사회는 1995년부터 매년 많게는 154만 톤의 식량을 지원했다. 그런데 지원식량이 들어오기 시작하면서부터 오히려 북한에서는 대량아사가 발생했다. 도대체 왜 그랬을까?
300만 아사자의 수수께끼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우선 북한에서 발생한 아사자의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 살펴보자. 아사자의 숫자를 제일 빨리 세상에 전한 것은 노동당 최고간부 출신의 황장엽 씨였다. 1997년 2월 12일 북경의 한국대사관을 통해 망명을 신청한 그는 '1995년에 50만 명이 아사했고 1996년 11월까지 100만 명이 아사했다. 그 상황으로 간다면 1997년에는 200만 명의 아사자가 나올 것이다'라고 했다.
황 씨는 그러한 통계가 '근거 없는 소문이 아니며 김정일에게 직접 보고한 노동당중앙위원회 조직지도부 책임간부로부터 얻은 자료에 의한 것'이라고 밝혔다. 한국의 민간단체인 우리민족서로돕기 불교운동본부도 1997년부터 1998년까지 실시한 면밀한 자체 조사를 통해 1995년부터 3년 간 약 370만 명이 아사했다고 추산했다. 황 씨가 전한 노동당 조직지도부 간부의 말과 거의 일치된 통계다.
이 밖에도 미국의 존스홉킨스대 연구팀이 1998년 발표한 “북한난민가족의 사망자 수”라는 보고서를 통해 이 기간 북한 아사자의 숫자를 추산한 바 있다.
하지만 북한에서 다수가 아사한 사실이 명백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원인에 대해서는 그 어느 설명도 납득이 가지 않았다. 자연재해가 그 원인이라고 한다면 인접한 한국이나 중국도 기근이 발생하였어야 할 것이고 주체농업의 실패가 원인이라고 한다면 과거 몇 십 년 간 이 방법을 따랐는데 왜 1990년 후반에 와서 돌연 실패하였는지 설명이 되지 않았다.
더욱이 믿기 어려운 것은 몇 백만 명이란 대량 아사자가 단기간 발생했다는 사실과 지역적으로 북동부인 함경북도, 함경남도에 집중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좁은 북한에서 왜 이렇게 큰 지역격차가 있었단 말인가.
이러한 의문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한 것은 현재 미 국제개발청(USAID)의 장관으로 북한의 식량지원사업에 종사하며 북한에 상주한 바 있는 앤드류 나치오스(Natsios) 씨가 2001년 출간한 저서 북조선의 대기근 이었다.
1995년 제6 군단은 평양으로 진격해 김정일 타도계획
나치오스 장관은 책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북한정권은 1990년대 초기에 북동부에 대한 식량배급을 감량하기로 결정하고 1994년에는 배급을 완전 중지하였다. 그로 말미암아 북동부를 잘라버린 정책은 서부의 여러 도에 기근이 확대되기 이전부터 시작되었다. 타도(他道)에 비해 북동부의 사망률이 훨씬 높고 훨씬 빨리 시작된 것은 그 때문이다.
북동부라 하면 함경남북도를 말하는데 이 지역에는 대략 전 인구의 4분의 1정도에 해당하는 500만 명 정도가 살고 있다. 이 지역에는 조선시대부터 가난하여 차별당한 지역으로 정치범의 유형지로서 이용되어 왔다. 1945년 일본침략으로부터 해방된 후에도 김일성, 김정일의 신분차별제도에 의해 인구의 20%를 점하는 적대계층이 주로 이 북동부 지역에 살도록 강제되고 있다.
나치오스는 보고서에서 “북동부 지역의 중앙정부에 대한 충성도는 언제나 최하위였다. 김정일이 이 지역은 희생시켜도 좋다고 결단한 이유는 바로 이것이었음이 틀림없다. 이 지역의 도시는 중앙정부의 생존에 최대의 위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했다.
실제 1995년 여름 조선인민군 제6군단에 의한 대규모 쿠데타 미수사건이 적발된 것도 함경북도 청진시의 라남이 무대였다. 그들은 함경북도에서 평양으로 쳐들어가서 김정일 정권을 타도할 계획이었다.
민중봉기에 의한 차우체스크의 처형을 눈으로 확인한 김정일은 공포에 떨었다. 내가 죽임을 당하기 전에 그들을 먼저 죽이자. 500만 명의 함경도민 중 다수가 이미 적대계층으로 낙인 찍혀 철저한 차별을 받아왔다. 이 사람들에 대해 선제공격을 치고 나선 것이다. 식량배급의 전면중단이라는 병량공격이었다.
함경도에 대한 선전포고
배급의 중단은 북한에서는 생명유지 장치를 제거하는 것과 같은 행위이다. 모든 식량이 정부의 배급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식 뿐만 아니라 야채 등의 부식물, 된장, 간장, 식용유, 조미료에 이르기까지 배급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주민들은 설마 '위대한 수령'의 아들인 '친애하는 지도자 동지'가 자신들을 죽이려 한다고는 전혀 의심할 수 없는 순박한 사람들이다. 미제국주의가 우리나라를 경제봉쇄하고 있기 때문에 외국에서 식량을 사올 수 없다는 당의 허위선전을 믿고 더욱 더 적개심을 높이며 허리띠를 조여 매고 '고난의 행군'을 이겨내자는 결의를 굳게 다짐하는 것이었다.
대기근을 연출해서 적대계층을 말살한다는 가설에 의해 북한당국이 식량원조를 받으면서 원조관계자를 북동부에 한발도 들여놓지 못하게 하는 점과 이 지역에는 일체의 지원을 단호하게 거부하는 이상한 사태에 대한 의문도 풀리게 된다. 또한 국제원조식량이 1995년과 1996년에 대량으로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아사자가 급증하는 이상한 현상이 왜 일어났는가에 대한 이유도 확실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북동부는 김정일에게는 계급투쟁의 현장이며 전장이었다. 노동신문은 2000년 12월 22일자에서 '혁명이란 네가 살게 되면 내가 죽는다. 네가 이기면 내가 지게 된다는 무자비한 물리적 대결전(大決戰)을 요구하게 된다'라고 쓰고 있다.
신문은 1990년 1월 25일자 1면에서 김일성이 1959년 3월 23일 행한 “함경북도 당 조직의 과제”라는 제목의 연설을 게재했다. 함경북도의 당 조직은 지방주의가 뿌리 깊고 강하여 당 중앙의 방침에 따르지 않으며 제멋대로 활동한다고 엄하게 비판한 연설이었다. “함경북도의 당 조직 활동에 있어서 제일 중요한 과제는...반역하는 분자들과는 타협 없는 투쟁을 해야만 한다”고 했다.
김정일이 1990년 1월 이 연설을 재차 게재한 의도는 함경북도를 잘라버리겠다는 선전포고였다고 볼 수 있다.
김정일의 적은 미국도 한국도, 일본도 아니었다. 가장 무서운 것이 북한내의 인민, 그 중에서도 주로 함경남북도에 살고 있는 수백만 명에 이르는 적대계층이었다. 그들에 대한 선제공격을 가한 것이 아사로 위장한 살인인 것이다. 김정일에게는 계급투쟁이었으며 전쟁이었다.
김일성 생존 시에도 북한에 홍수와 우박 등 천재(天災)는 있었지만 그것을 이유로 국제사회에서 식량원조를 받은 경우는 없었다. 하지만 김정일에게는 재해가 오히려 하늘이 준 기회였다. 김정일은 '대량의 식량원조를 무상으로 끌어들이기 위하여 통계 숫자를 적당히 가공하여 국제기구에 공개하라'고 지시했다.
북한외무성은 1994년 9월 발생한 우박피해에 대해 '아주 심한 우박으로 중요 곡창지대인 황해남도와 황해북도에 17만 헥타르(ha)의 농지가 피해를 입어 120만 톤 곡물 손실을 입었다'라고 했다.
1995년 8월 발생한 대홍수 이후에는 '이 홍수가 100년에 한 번 있을 정도로 컸으며 전국에서 200만 톤의 벼와 옥수수 생산이 감소되고 100만 톤 정도의 곡물재고가 유실되어 손해는 150억 달러에 달하였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세계식량계획(WFP)에 따르면 실제 손해는 북한이 발표한 것의 15%에 불과했다.)
이러한 공작의 결과 1995년부터 각 국에서 본격적으로 지원식량이 도착하기 시작했다. 그 해 북한에 지원된 식량은 일본으로부터 50만 톤, 한국 15만 톤, 스위스 1만3,000톤, 미국 9,000톤 등 총 73만여 톤에 달했다.
김정일은 이러한 전과(戰果)를 매우 기뻐하여 식량도입을 담당한 강석주 등 외무성 관계관에게 북한의 최고영예인 노동영웅 칭호(2~3인), 김일성 훈장(5인) 수여를 비롯하여 김정일 이름을 새긴 시계(5인), 노동훈장(10인), 국기훈장 1급 등 300명 정도에게 훈장과 선물을 대대적으로 수여했다.
가축의 사료를 제외한 북한 전 인구에 필요한 최소한의 식량은 1년에 380만 톤이다. 지원식량이 100만 톤 들어오게 되면 대략 700만 명이 1년 간 먹을 수 있다. 그만한 지원식량이 들어와 적절하게 배급을 한다고 하면 아사자는 발생하지 않는다. 국제사회는 1995년부터 매년 많게는 154만 톤의 식량을 지원했다. 그런데 지원식량이 들어오기 시작하면서부터 오히려 북한에서는 대량아사가 발생했다. 도대체 왜 그랬을까?
300만 아사자의 수수께끼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우선 북한에서 발생한 아사자의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 살펴보자. 아사자의 숫자를 제일 빨리 세상에 전한 것은 노동당 최고간부 출신의 황장엽 씨였다. 1997년 2월 12일 북경의 한국대사관을 통해 망명을 신청한 그는 '1995년에 50만 명이 아사했고 1996년 11월까지 100만 명이 아사했다. 그 상황으로 간다면 1997년에는 200만 명의 아사자가 나올 것이다'라고 했다.
황 씨는 그러한 통계가 '근거 없는 소문이 아니며 김정일에게 직접 보고한 노동당중앙위원회 조직지도부 책임간부로부터 얻은 자료에 의한 것'이라고 밝혔다. 한국의 민간단체인 우리민족서로돕기 불교운동본부도 1997년부터 1998년까지 실시한 면밀한 자체 조사를 통해 1995년부터 3년 간 약 370만 명이 아사했다고 추산했다. 황 씨가 전한 노동당 조직지도부 간부의 말과 거의 일치된 통계다.
이 밖에도 미국의 존스홉킨스대 연구팀이 1998년 발표한 “북한난민가족의 사망자 수”라는 보고서를 통해 이 기간 북한 아사자의 숫자를 추산한 바 있다.
하지만 북한에서 다수가 아사한 사실이 명백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원인에 대해서는 그 어느 설명도 납득이 가지 않았다. 자연재해가 그 원인이라고 한다면 인접한 한국이나 중국도 기근이 발생하였어야 할 것이고 주체농업의 실패가 원인이라고 한다면 과거 몇 십 년 간 이 방법을 따랐는데 왜 1990년 후반에 와서 돌연 실패하였는지 설명이 되지 않았다.
더욱이 믿기 어려운 것은 몇 백만 명이란 대량 아사자가 단기간 발생했다는 사실과 지역적으로 북동부인 함경북도, 함경남도에 집중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좁은 북한에서 왜 이렇게 큰 지역격차가 있었단 말인가.
이러한 의문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한 것은 현재 미 국제개발청(USAID)의 장관으로 북한의 식량지원사업에 종사하며 북한에 상주한 바 있는 앤드류 나치오스(Natsios) 씨가 2001년 출간한 저서 북조선의 대기근 이었다.
1995년 제6 군단은 평양으로 진격해 김정일 타도계획
나치오스 장관은 책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북한정권은 1990년대 초기에 북동부에 대한 식량배급을 감량하기로 결정하고 1994년에는 배급을 완전 중지하였다. 그로 말미암아 북동부를 잘라버린 정책은 서부의 여러 도에 기근이 확대되기 이전부터 시작되었다. 타도(他道)에 비해 북동부의 사망률이 훨씬 높고 훨씬 빨리 시작된 것은 그 때문이다.
북동부라 하면 함경남북도를 말하는데 이 지역에는 대략 전 인구의 4분의 1정도에 해당하는 500만 명 정도가 살고 있다. 이 지역에는 조선시대부터 가난하여 차별당한 지역으로 정치범의 유형지로서 이용되어 왔다. 1945년 일본침략으로부터 해방된 후에도 김일성, 김정일의 신분차별제도에 의해 인구의 20%를 점하는 적대계층이 주로 이 북동부 지역에 살도록 강제되고 있다.
나치오스는 보고서에서 “북동부 지역의 중앙정부에 대한 충성도는 언제나 최하위였다. 김정일이 이 지역은 희생시켜도 좋다고 결단한 이유는 바로 이것이었음이 틀림없다. 이 지역의 도시는 중앙정부의 생존에 최대의 위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했다.
실제 1995년 여름 조선인민군 제6군단에 의한 대규모 쿠데타 미수사건이 적발된 것도 함경북도 청진시의 라남이 무대였다. 그들은 함경북도에서 평양으로 쳐들어가서 김정일 정권을 타도할 계획이었다.
민중봉기에 의한 차우체스크의 처형을 눈으로 확인한 김정일은 공포에 떨었다. 내가 죽임을 당하기 전에 그들을 먼저 죽이자. 500만 명의 함경도민 중 다수가 이미 적대계층으로 낙인 찍혀 철저한 차별을 받아왔다. 이 사람들에 대해 선제공격을 치고 나선 것이다. 식량배급의 전면중단이라는 병량공격이었다.
함경도에 대한 선전포고
배급의 중단은 북한에서는 생명유지 장치를 제거하는 것과 같은 행위이다. 모든 식량이 정부의 배급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식 뿐만 아니라 야채 등의 부식물, 된장, 간장, 식용유, 조미료에 이르기까지 배급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주민들은 설마 '위대한 수령'의 아들인 '친애하는 지도자 동지'가 자신들을 죽이려 한다고는 전혀 의심할 수 없는 순박한 사람들이다. 미제국주의가 우리나라를 경제봉쇄하고 있기 때문에 외국에서 식량을 사올 수 없다는 당의 허위선전을 믿고 더욱 더 적개심을 높이며 허리띠를 조여 매고 '고난의 행군'을 이겨내자는 결의를 굳게 다짐하는 것이었다.
대기근을 연출해서 적대계층을 말살한다는 가설에 의해 북한당국이 식량원조를 받으면서 원조관계자를 북동부에 한발도 들여놓지 못하게 하는 점과 이 지역에는 일체의 지원을 단호하게 거부하는 이상한 사태에 대한 의문도 풀리게 된다. 또한 국제원조식량이 1995년과 1996년에 대량으로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아사자가 급증하는 이상한 현상이 왜 일어났는가에 대한 이유도 확실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북동부는 김정일에게는 계급투쟁의 현장이며 전장이었다. 노동신문은 2000년 12월 22일자에서 '혁명이란 네가 살게 되면 내가 죽는다. 네가 이기면 내가 지게 된다는 무자비한 물리적 대결전(大決戰)을 요구하게 된다'라고 쓰고 있다.
신문은 1990년 1월 25일자 1면에서 김일성이 1959년 3월 23일 행한 “함경북도 당 조직의 과제”라는 제목의 연설을 게재했다. 함경북도의 당 조직은 지방주의가 뿌리 깊고 강하여 당 중앙의 방침에 따르지 않으며 제멋대로 활동한다고 엄하게 비판한 연설이었다. “함경북도의 당 조직 활동에 있어서 제일 중요한 과제는...반역하는 분자들과는 타협 없는 투쟁을 해야만 한다”고 했다.
김정일이 1990년 1월 이 연설을 재차 게재한 의도는 함경북도를 잘라버리겠다는 선전포고였다고 볼 수 있다.
김정일의 적은 미국도 한국도, 일본도 아니었다. 가장 무서운 것이 북한내의 인민, 그 중에서도 주로 함경남북도에 살고 있는 수백만 명에 이르는 적대계층이었다. 그들에 대한 선제공격을 가한 것이 아사로 위장한 살인인 것이다. 김정일에게는 계급투쟁이었으며 전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