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 그토록 두려워한 세상
[조중식, "한국이 그토록 두려워한 세상," 조선일보, 2019. 2. 25, A35쪽.]
한 전문가가 얼마 전 '읽어보길 권한다'는 쪽지와 함께 책 한 권을 보내왔다. '셰일 혁명과 미국 없는 세계'(원제 The Absent Superpower)라는 책이다. 2017년 1월 미국에서 출간됐고, 한국에는 지난 1월 29일 번역본이 나왔다. 2년 전 쓴 책인데 지금의 상황을 족집게처럼 전망한 것에 놀랐다. 놀란 사람이 나만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저녁 자리에 동석한 한 사람이 이 책 이야기를 꺼내더니 "한국의 앞날이 걱정이다"라고 했다. 저자는 "지금 세계는 한국이 그토록 두려워하는 과거로 돌아가고 있다"고 했다. 미국이 손을 떼는 동북아에서 한국은 뭍에서 한 번도 이겨본 적이 없는 중국과, 바다에서 한국보다 월등히 뛰어난 일본 사이에 끼게 된다는 것이다.
책의 요지는 이렇다. 미국은 지금 스스로 구축한 세계 안전보장 체제와 자유무역 질서를 적극적으로 허물고 있다. 미국이 구축한 안보 체제는 구소련 견제와 중동에서 미국에 이르는 석유 수송로 안전을 위한 것이었다. 이를 위해 동맹국들에 미국의 시장을 내주고 경제적으로 회유하는 자유무역 질서를 만들었다. 미국은 이제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2010년대 중반 석유를 함유한 셰일층을 고압의 물과 모래로 파쇄해 석유를 뽑아내는 셰일 혁명에 성공해 에너지 자립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자유무역 질서로 가장 큰 이득을 보는 건 미국의 패권에 도전하고 있는 중국이다. 더 이상 일방적인 미국 시장 접근을 허용할 이유가 없다. 미국이 유럽·중동·동북아에서 발을 빼면 각 지역에서는 상당 기간 혼란이 불가피하다. 경쟁자들끼리 서로 갈등하며 혼란에 빠지는 것은 미국에도 유리하다. 책은 지역별 갈등과 혼란의 시나리오도 제시한다.
저자는 미 국무부를 거쳐 민간 정보기업 '스트랫포' 부사장을 지낸 지정학 전략가이자 안보 전문가인 피터 자이한이다. 그가 전망한 대로 트럼프 취임 이후 미국은 유럽 동맹국들을 군사비와 무역 문제로 압박하며 나토 체제를 위협하고 있다. 중동에서는 미군을 빼기 시작했다. 미 하원 법사위는 지난 7일 석유수출국기구(OPEC)를 담합으로 처벌할 수 있는 법안을 통과시키기도 했다. OPEC 자체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중국은 물론이고 한국·일본·유럽 등 동맹에도 고율의 관세를 부과하며 자유무역 질서를 뒤흔들고 있다. 독일 앙겔라 메르켈 총리는 이런 변화를 지켜보며 지난 16일 "이제 우리는 갈라서야 하는가, 모든 나라는 각자에 최선인 것을 찾아야 하는 시기인가라는 질문이 던져졌다"고 했다.
문제는 미국이 허물고 있는 기존 국제 질서는 지난 70년간 한국의 성공을 가능케 만든 환경이라는 점이다. 우리는 미국이 보장하는 안보 체제 속에서 자유무역의 수혜를 최대한 누리면서 세계 9대 무역국, 세계 11위 경제 대국으로 성장했다. 그런데 미국 전문가들조차 오는 27~28일 베트남에서 열리는 2차 미·북 정상회담에서 미국이 북핵 동결과 미국 본토를 위협하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역량 제거를 목표로 하는 게 아닌지 의심한다. 미국의 안전만 확보하고 한국의 안보, 동북아 분쟁과 갈등에선 손을 뗄지도 모른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갖고 있는 자산마
저 내다버리고 있다. 중동에서 가장 먼, 세계 석유 공급망의 끄트머리에 있으면서도 탈원전을 내세우며 석유 자원에 더 의존할 수밖에 없는 에너지 정책을 고집한다. 일본과의 관계는 미국이 빠지면 회복 불능일 상황으로 만들어가고 있다. 다가가는 상대는 핵을 들고 위협하는 북한 정도다. 과연 이렇게 해도 되는 것일까. 새 국제 질서 속에서 생존할 수 있는 길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