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5월 문재인 정부의 출범 이후 한미관계의 균열은 과거 그 어느 때보다 심각한 상태로 벌어지고 있다. 집권하자마자 중국에 사드(THAAD)를 추가 배치하지 않고, 미국 미사일방어(MD)체계에 편입하지 않으며, 한미일 군사동맹은 없을 것이라는 이른바 ‘3불(不) 원칙’의 ‘자발적 족쇄’를 달더니, 최근에는 한일 군사비밀정보보호협정(GSOMIA) 파기 시도로 한미간의 갈등을 증폭시키고 있다. 미 정부는 지소미아 파기가 주한미군의 안전을 위협하는 것이라고 비판했고, 문 정부가 생각을 바꾸지 않으면 한미동맹에 중대사태가 발생할지도 모른다는 경고까지 한 바 있다.
그뿐 아니다. 한미 방위비분담협상 파행이 계속되는 와중에 한국대학생진보연합 회원 17명이 분담금 인상을 반대하며 지난 10월 18일 주한 미 대사관저를 무단으로 진입해 해리스 대사보고 이 땅을 떠나라고 외치며 기습시위를 벌였다. 모든 외교 공관의 보호는 호스트 국가 정부의 책임이다. 외교 관계에 대한 비엔나 협약이 법으로 명시한 이 책임을 다하지 못한 문 정부에게 주한 미 대사관은 이례적으로 주한 외교 공관을 보호하기 위한 노력을 강화할 것을 촉구한다는 성명을 내기도 했다.
같은 맥락에서 중국과 북한의 미사일 공격에 대비해 아시아 주둔 미군과 동맹국을 보호하기 위한 미국의 신형 중거리미사일 배치 계획에 대해서도 문 정부는 배치 거부 의사를 분명히 밝혔다.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다는 일본의 아베 정부와는 대조되는 반응이었다.
탈미친중 노골화되면 주한미군 철수나 감축 우려
왕이 중국 외교부장이 지난 12월 4일 강경화 외교부 장관을 만나 “우리(중국)는 대국이든 소국이든 모두 평등하게 대한다”며 미국을 거듭 비난한 날, 외교부 산하 국립외교원 외교안보연구소가 개최한 세미나에서 문정인 대통령통일외교안보특별보좌관은 “주한미군이 철수한 뒤 중국 핵우산에 들어가는 건 어떻겠느냐”고 중국 측 인사에게 질문해 큰 논란을 초래하기도 했다.
이와 같은 문재인 정부의 계속되어온 대북 평화공세와 ‘탈미친중’(脫美親中) 노선이 노골화되면서 자칫 주한미군 철수나 감축이 실행되지 않을까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미 정부가 다음 주한미군의 순환배치는 차질 없이 이뤄질 것이라고 해서 다행이지만, 이번 겨울에 한국에 오기로 예정된 2전투여단의 행방은 분담금 협상이 난항을 겪을 경우 트럼프 대통령이 갑자기 순환배치를 취소할 수도 있어 안심할 수 없다. 왜냐하면 미국의 국방수권법은 주한미군 하한선을 2만2000명으로 규정하고 있어 트럼프 대통령이 미 의회 승인 없이 감축할 수 있는 주한미군 규모가 6500명이기 때문이다. 해당 순환배치 예정 여단의 규모는 4000~4500명으로 지원병력을 포함해도 6000명이다. 즉, 6500명 한도 안에 들어오는 숫자이다. 예상치 못한 군사전략을 잇따라 실행하고, 돈에 집착하는 트럼프 대통령으로서는 기분 나쁘면 충분히 뒤집을 수 있는 일이다.
주한미군이 부분적으로나마 철수한다면 2020년 한미동맹 관계는 해체 위기에 설 수도 있다. 그리고 그럴 경우 그 피해는 고스란히 우리 기업과 국민에게 돌아올 것이 분명하다.
이러한 전망에 대해 설마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30년 전 필리핀 사람들도 그랬다. 그러나 미군이 필리핀의 수빅만에서 성조기를 내리고 전면 철수하자 필리핀의 안보와 경제는 급속도로 악화되기 시작했고, 이 지역의 역학 구도 역시 미군의 공백과 중국의 부상으로 완전히 달라지게 되었다. 필리핀이 처했던 상황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점이 크기 때문에 필자가 조지워싱턴대의 엘리엇 국제관계학교에서 출간하는 전문학술지 더워싱턴쿼터리의 겨울호에 최근 기고한 글을 여기서 소개하고자 한다(The Washington Quarterly, Winter 2020, Volume 42, Issue 4 [https://twq.elliott.gwu.edu/]).
과연 한미동맹은 해체의 위기에 처해있는 것일까? 1990년대 초 필리핀에서도 미·필 동맹에 대해 똑 같은 질문이 있었다. 필리핀의 경우 미군의 주둔 역사가 우리보다도 훨씬 더 길다. 1898년 미국-스페인 전쟁을 이긴 미국은 필리핀의 영유권을 스페인으로부터 양도 받은 후, 1902년 필리핀을 미국의 식민지로 만들었다. 따라서 20세기 초부터 필리핀에 주둔한 미군은 1992년 철수할 때까지 90년이 넘게 주둔한 셈이다.
필리핀에 있는 가장 큰 미군기지로서는 클라크 공군기지와 수비크만 해군기지가 있었는데, 1991년 6월 피나투보화산 폭발로 피해를 입은 클라크 공군기지는 미리 반환되었고, 수빅만 해군기지의 경우 양국 정부는 10년간의 임대 연장을 합의했으나 필리핀 상원에서 비준을 거부함에 따라 수빅만도 1992년 12월에 반환된다. 철수의 도화선은 크게 3가지였다. 첫째, 냉전의 종식에 따른 외부의 전쟁 위협 감소 둘째, 미국의 지배에 대한 역사적 앙금에서 비롯된 필리핀인들의 반미 민족주의 확산 셋째, 비협조적이고 고맙게 여기지 않는 동맹국에 대한 워싱턴의 불만 고조가 미군 철수를 촉발시킨 것이다.
그리고 바로 지금, 필리핀에서 벌어진 미군 철수의 속편이 한반도에서 만들어지고 있다. 문재인 정부의 일방적인 대북 평화정책은 북한을 여전히 핵 위협국으로 보는 미국과 충돌하며 동맹에 대한 쌍무적 의무를 약화시키고 있다. 한미동맹이 지난 70년간 공산권에 대한 봉쇄전략이라는 틀 속에서 전개되어 왔다는 사실이 무색하게 말이다. 또한 문재인 정부의 사드에 대한 ‘3불 원칙’ 입장, 반일 GSOMIA 파기 시도, 미 신형 중거리미사일 배치 거부, 미 대사관저 보호에 대한 소홀 등은 미국이 한국 정부를 반미 민족주의로 평가하기에 충분하다.
미군 철수는 경제적·영토적 불이익 초래
이런 배경 하에 한미 방위비분담금 협상이 잘 될 리가 없다. 트럼프 행정부는 느닷없이 주한미군 순환배치와 한미 연합훈련에 드는 비용을 비롯한 ‘새로운 항목’을 제시하면서 한국에 50억 달러, 약 6배에 가까운 금액을 요구하고 있어 협상은 답보 상태로 들어갔다. 합의가 지연될수록 트럼프의 불만은 커질 것이고, 이는 곧 미군 철수를 촉발시키는 원인이 될 수도 있다.
1992년 미군을 몰아 내고 자주를 외치며 기뻐했던 필리핀 국민들의 도취 상태는 오래가지 못했다. 우선 남중국해에서 미군기지가 없어지자 중국은 바로 영해법을 선포하고 필리핀 앞 바다의 팡가니방 산호초(Mischief Reef)와 스카버러 섬(Scarborough Shoal)을 자국 영토로 편입시켰다.
미군 철수는 필리핀의 안보 환경을 즉시 악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또한 미군부대가 빠지면서 해당 지역경제에도 악영향을 미치게 되는데, 기대했던 외국인 투자 및 공단 조성은 허상으로 드러나게 된다. 자주, 민족, 주권을 내세우며 미군 철수의 악수를 둔 필리핀은 그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