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미․중 패권 충돌 때 살길 찾아야,
2016.09.28 10:40
[윤평중, “한국, 미․중 패권 충돌 때 살길 찾아야,” 조선일보, 2016. 9. 18, A18; 한신대 교수, 정치철학.]
1950년 9월 15일 맥아더 장군은 인천상륙작전으로 절정을 맞지만 곧 쇠락한다. 중공군 참전 오판(誤判)이 그 시작이었다. 중공군의 총공세로 패전 위기를 맞은 맥아더는 중국 대륙으로 확전을 꾀한다. 중국 대도시와 산업 시설들을 원폭 30여 발로 초토화하는 계획이었다. 중․소와 미국이 겨루는 제3차 세계대전을 우려한 트루먼 대통령은 그를 유엔군 사령관직에서 해임한다. 미국의 국가 대전략을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독단적으로 집행해 파국을 낳을 뻔했기 때문이다.
5차 핵실험으로 핵무기 체계를 완성한 북한 앞에 벌거벗은 우리에게 현실주의적 국가 대전략은 사활적 과제다. 자의적 소망 사고와 독단적 진영 논리를 넘어서야 대한민국이 산다. 북한은 그 반면교사다. 핵 보유는 북한이 수십 년간 북한판 국가 대전략을 결사적으로 추진한 결과다. 뉴욕타임스(NYT)는 북한이야말로 '자기 보호를 최우선에 놓는' 국가이성에 충실하다고 했다. 김정은은 미치광이가 아니다. '야만적 잔혹성과 냉정한 계산'으로 미치광이 전략을 펴는 야심가다.
중국은 핵보유국 북한을 버리지 않는다. 미국이 한국을 포기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6․25전쟁 때와 동일한 국제정치학의 팩트다. 현대 한반도의 전략적 가치는 1950년보다 훨씬 높다. 미․소 경쟁에선 유럽이 중요했지만 중국이 미국에 도전하는 21세기엔 아시아가 가장 중요하다. 아시아가 신흥 패권국 중국의 앞마당이 되는 걸 기존 패권국 미국은 용인할 수 없다. 국제정치와 세계사의 철칙(鐵則)이자 미국의 아시아 회귀 정책(Pivot to Asia)의 배경이다.
미․중 패권 경쟁에서 우리가 중립적 '균형자'가 되는 건 불가능하다. 국력 1, 2위 초강대국들의 헤게모니 다툼을 중견국 한국이 조정하는 것은 몽상에 불과하다. 따라서 한국 국가 대전략의 최대 의제는 미국과 중국의 힘겨루기에서 어느 쪽에 가중치를 두느냐로 귀결된다. 한반도는 '중국의 밀어내기와 미국의 버티기' 경쟁의 삭풍(朔風) 앞에 서 있다. 북핵 문제 해결이 무망한 근본 이유다. 사드가 국가 대전략 이슈가 된 까닭도 마찬가지다. 사드 배치를 둘러싼 한국 사회의 천박한 자중지란은 현실주의적 국가 대전략의 의미를 우리가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증명한다.
만약 미국이 계속 쇠퇴하고 중국이 강해진다면 한국의 전략적 위험은 가중되며 선택지는 축소된다. 중국의 동아시아 패권을 수용하고 중국에 국가 안보를 의존하는 것은 한반도의 핀란드화(Finlandization)이자 속국(屬國)이 되는 길이다. 한국의 진보 인사들이 이 방안을 선호하는 것은 이율배반적이다. 자유와 인권을 외치는 진보가 자유와 인권에 적대적인 중국에 기우는 형국이다. 다른 대안은 자체 핵무장을 통해 자력 생존하는 길로서 주로 보수가 관심을 갖는다. 마지막 대안은 같은 민주국가 일본과 연대해 독재국가 중국에 버티는 방법이다. 이는 중국이 동아시아 패권국이 될 때 한국 민주주의를 지킬 현실적 대안이지만 한국 사회의 반일 감정을 넘는 우리의 지혜를 요구한다.
그러나 중국이 미국을 추월해 세계 최강대국이 된다는 유행 담론은 최근 급격히 퇴조하고 있다. 되살아나는 미국 경제에 비해 중국 경제는 주춤거린다. 부정부패와 빈부 격차, 버블 경제와 사회 분열로 중국 내부는 용암처럼 들끓는 중이다. 2016년 현재, 중국 경제력은 미국에 크게 미달하며 군사력은 미국의 10분의 1에도 못 미친다. 강국이긴 해도 법치주의와 책임정부, 자유와 인권이 부재한 중국이 21세기 세계의 지도 국가가 되기는 쉽지 않다.
맥아더는 해임 직후 미국 시민들의 환호 속에 "노병은 죽지 않고 사라진다"는 연설로 전쟁 영웅으로 등극했다. 하지만 포퓰리즘의 열기는 순간뿐이었다. 미 의회 청문회는 6․25전쟁에서 강공 일변도로 제3차 세계대전을 부를 뻔한 그의 무모함을 폭로했다. 반공 십자군전쟁의 투사(鬪士) 맥아더의 웅변처럼 북핵 선제공격론이나 NPT 탈퇴, 자체 핵무장론은 한국인의 가슴에 불을 지르는 제안이지만 현실성이 없는 데다 위태롭기까지 하다. 한국은 북한 같은 불량 국가가 아닌 데다 나토(NATO) 방식의 한반도 전술핵 재배치 방안이 남아 있다. 결국 중국이 전 지구적 패권국이 되는 날은 오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미․중 패권 충돌이 동아시아에서 본격화한다면 우리로선 한․미 동맹을 강화해야만 살길이 열린다. 2000년 대중(對中) 굴욕의 역사를 21세기 한국이 반복할 순 없다. 나라가 있어야 경제도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