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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이석기'는 배우일 뿐, 감독은 '역사 교과서'다,” 조선일보, 2013. 9. 17, A30.]


우리가 '이석기 사태'로 '종북(從北)'에 시선을 모으고 있는 동안, 그보다 더 심각한 '반(反)대한민국'이 우리 발밑을 파고들고 있는 것을 그냥 지나치고 있다. 대한민국 건국 자체를 부정적 시각으로 다뤄온 좌편향 역사 교과서에 대항해 건국의 정당성을 지적한 새 교과서가 집중포화를 맞고 '살해 위협'에 처하는 사태가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근자에 교학사가 그동안 고교 한국사 교과서의 왜곡된 부분을 바로잡은 새 교과서를 발행하자 전 좌파 학자와 관계자들이 벌떼처럼 들고일어나 새 책의 몇 가지 오류를 침소봉대하며 교학사를 협박했고, 참고서 등 다른 책의 불매 협박에 겁먹은 교학사는 한때 발행을 접으려고까지 했다(검정 절차상 저자와 합의 없이는 발행을 포기할 수 없게 돼 있다). 오류를 고칠 수 있는 장치가 제공됐는데도 좌파는 요지부동이었다. 이것은 책의 오류를 문제 삼는 것이 아니라 발행 자체를 막겠다는 의도임을 부끄럼 없이 드러내는 것이다.

어찌 보면 이석기식(式)의 종북은 하나의 포말이며 돌출된 사건으로 볼 수 있지만 대한민국의 건국 세력을 '친일'로 매도하고 따라서 건국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자(者)들의 역사 왜곡은 우리의 현재와 미래를 좀먹는 만성적 장기적 질병과 다름없다. 그럼에도 대한민국에 사는 국민은 '종기'에는 후다닥 놀라면서 만성적 고질병의 병균에는 별 저항감을 보이지 않는다. 이것이 오늘날 이 나라의 문제다.

모든 나라, 모든 민족은 자기 나라의 건국에 자부심을 갖고 건국 과정을 미화하는 것이 정도(正道)이다. 비록 건국 과정에 어떤 논란거리가 있었더라도 그것을 덮고 상처를 아물리며 후손에게 나라 세움의 뿌듯함을 물려주는 것이 민족의 자긍심일 것이다. 그런데 왜 유독 이 나라의 반체제적 좌파는 '미군은 점령군, 소련군은 해방군' '이승만과 박정희는 친일파' '김일성은 독립투사'라는 식으로 대한민국 건국에 먹칠을 해대는 것일까? 저들의 주장대로 대한민국 건국과 건설에 어떤 문제가 있었다고 하자. 그래서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가? 건국을 다시 하자는 것인가 아니면 대한민국을 통째로 누구에게 갖다 바치기라도 하겠다는 것인가? 그것도 아니면 대한민국을 없애거나 역사에서 지워버리기라도 하자는 것인가?

반(反)대한민국은 대한민국 체제를 반대하는 것으로, 얼핏 북한 체제와는 무관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종북보다 한 차원 높은 고등 수법이다. 대한민국을 잘 고쳐서 업그레이드하자는 것이 아니고 너희는 애당초 태어나기를 잘못 태어난 존재이므로 망해야 한다는 것이 바로 반(反)대한민국 세력의 근본 시각이다. 다른 말로 하면 '이석기'는 배우이고 '역사 교과서'는 감독인 셈이다.

대한민국은 70년대에서 90년대에 유신, 신군부 독재, 5․18 광주 등을 거치면서 피해자와 반대자를 양산했다. 그것은 대한민국의 어두운 부분이었고 부끄러운 그늘이었다. 이 피해 의식과 반대 의식이 당시의 반체제를 형성했고, 대한민국에 이를 악문 세력은 이것이 반대한민국으로 진전되도록 '역사 교육'에 매진했다. 그 도구가 반체제 시각에서 쓴 역사 교과서고 지난 30여년간 역사 교육의 현장은 그들의 독무대나 다름없었다. 그것으로 '교육'을 받은 대학과 초․중․고 학생들이 지금의 30대 후반에서 50대 중반까지 걸쳐 있다. 이석기 등이 잡혀가서도 기고만장한 것은 이들의 잠재력을 믿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오늘날에도 그들은 고교 한국사 교과서의 전부를 장악하고 있으면서 그에 도전하는 새 교과서 하나의 출현마저 아예 싹부터 자르려고 살해 위협까지 들먹이고 있다. 자기들 독차지 판도에 어떤 틈이나 균열도 허락할 수 없다는 것이다. 특히 이념 편향성이 작은 오늘의 젊은 세대가 저들의 역사 교과서에 더 이상 함몰되지 않을 것임을 우려한 저들은 새로운 교과서의 출현을 거의 신경질적으로 가로막으려 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대한민국의 정치가 제 궤도를 찾고 경제가 국민의 삶을 보듬어주는 상황으로 가면 갈수록 반대한민국 세력의 설 자리는 좁아질 수밖에 없다. 오늘의 대한민국에 문제가 있다면 우리는 문제를 바로잡고 몸을 제대로 추스르면 됐지 그것을 구실로 나라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우리의 삶의 터전을 우리를 궤멸시키려는 적(敵)에게 갖다 바치는 일을 어떻게 감히 할 수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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