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 정부 '지침'에 따라 교과서 기술
교과서 6종(동아, 비상, 씨마스, 지학사, 금성, 천재교육)은 4·3 사건을 모두 '8·15 광복과 통일 정부 수립을 위한 노력'이란 제목 아래 다루고 있다. 동아출판사 교과서는 '통일 정부 수립을 위한 노력'이란 주제 아래 중도파의 좌우합작·남북협상과 함께 4·3 사건을 소개한다. 남로당이 일으킨 4·3 사건이 중도파의 좌우합작·남북협상과 동등한 위상으로 서술되는 셈이다. 비상, 지학사, 씨마스 등 4종이 모두 4·3 사건을 통일 정부 수립 운동처럼 썼다.
금성과 천재교육 교과서는 '8·15 광복과 통일 정부 수립을 위한 노력'이란 장(章) 아래 4·3 사건을 다루는 점은 같다. 하지만 '정부 수립을 위한 갈등'(금성) '분단과 통일의 갈림길'(천재)이란 소제목 아래 4·3 사건을 실어 '4·3=통일 정부 수립 운동'이란 느낌은 약해졌다. 해냄 출판사는 '냉전, 통일 국가 수립을 가로막다'란 제목 아래 '제주 4·3 사건과 같은 비극은 왜 일어났을까'를 실어 4·3을 통일 정부 수립 운동으로 연결하는 서술은 피했다. 미래엔은 '8·15 광복과 대한민국 정부 수립' 아래 4·3 사건을 실어, 이 사건을 정부 수립 과정에서 일어난 갈등으로 서술했다.
새 한국사 교과서는 왜 4·3 사건을 '통일 정부 수립 운동'으로 썼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교과서 검정 업무를 맡은 교육부 '지침' 때문이다. 교육부가 2018년 6월 발표한 고교 한국사 교과서 '교육 과정'에 따르면, 4·3 사건은 해방 이후 현대사에서 '8·15 광복과 통일 정부 수립을 위한 노력'의 소주제로 다루도록 명기(明記)했다. 함께 가르칠 항목으로 8·15 광복, 냉전,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 좌우합작운동, 남북협상을 적시(摘示)했다. 이 교육 과정은 2017년 대통령 지시로 국정 한국사 교과서가 폐지된 이후 마련했다. 교육부 산하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이 주관해 만들었다. 교과서 필자 중 한 명은 "검정을 통과하려면 이 지침에 따를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런데도 교육부는 교육 과정을 바꾸면서 '역사 교육의 다양성과 자율성을 보장한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4·3 사건을 일제히 통일 정부 수립 운동으로 가르치는 게 역사 교육의 다양성을 보장하는 것일까. 무엇보다 이런 '지침'이 대한민국 국민의 보편 상식에 부합하나.
'4·3=통일 국가 수립 운동'은 남로당 입장
작년까지 사용한 고교 한국사 교과서(8종)는 4·3 사건을 '대한민국 정부 수립 과정에서 일어난 갈등'으로 서술했다. 교육부 지침이 4·3을 '대한민국 수립과 6·25전쟁'이란 주제 아래 다루도록 했기 때문이다. 금성출판사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다'란 소제목 아래 '정부 수립을 둘러싼 갈등'으로 4·3 사건을 기술했다. 비상교육은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 아래 4·3 사건을 다뤘다. 리베르, 천재교육, 교학사 교과서 모두 비슷하다. 하지만 미래엔과 두산동아는 각각 '통일 정부 수립 운동', '통일 정부 수립을 위하여 노력하다'라는 제목 아래 4·3 사건을 다뤘다.
원로 국사학자 한영우 서울대 명예교수는 "4·3 사건은 남로당 입장에서 보면 통일 국가 수립 운동이다. 6·25도 북한 입장에서 보면 조국통일전쟁 아닌가"라며 "대다수 양민이 희생당한 4·3 사건을 통일 정부 수립 운동으로 쓰는 건 학계 판단보다 한참 앞서 나간다"고 했다. 한 교수는 "정부는 누가 어떤 과정을 거쳐 이런 교과서 집필 지침을 만들었는지 투명하게 공개해야 한다"고 말했다. 교육부는 "교과서 지침 변경에 누가 관여하고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 공개하지 않을 방침"이라고 말한다.
4·3 사건은 남로당 무장 폭동이 도화선이 돼 수많은 제주도민이 억울하게 희생된 현대사의 비극이다. 혈육을 잃은 제주도민은 수십 년간 '폭도'
가족으로 몰리고 연좌제로 고통받았다. 4·3 특별법을 만들고, 노무현 정부 당시 4·3 사건 공식 보고서를 만든 이유는 진상 규명을 통해 제주도민의 억울한 희생을 위로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교과서에서 제주도민이 남로당 선전대로 '통일 정부 수립'을 위해 노력하다 희생당한 것처럼 기술하면, 제주도민에게 다시 북한 편든 '폭도'의 굴레를 씌우는 게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