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어지럽히지 말라
2009.12.16 16:02
[고정일, “역사를 어지럽히지 말라,” 조선일보, 2009. 11. 28, A30쪽; 소설가, 동서문화 발행인.]
1940년 독일군이 파리를 점령하자, 프랑스는 ‘비시 나치괴뢰’ 정부가 들어선다. 1905년부터 일본은 공식적 조약에 의거해 조선을 통치한다. 프랑스가 점령당한 기간은 4년 남짓, 일본이 조선을 지배한 기간은 40년이 넘는다. 2차대전 당시 쿠브 뒤 뮈르빌은 비시 정권 재무관료였지만, 드골 정권에서 10년 넘게 외상.총리를 지냈다. 모리스 파퐁은 나치협력 전력에도 예산부장관에 올랐다. 더 충격적인 것은 미테랑 대통령이 비시 정권 협력자였음은 '비밀 아닌 비밀'이었다. 이들의 행위는 조국을 위한 불가피한 처신으로 인정받았다.
1924년 조선일보 발행권을 인수한 우창 신석우는 월남 이상재를 찾아 민족의 장래와 신문의 역할을 강조하면서 조선일보를 다시 왜놈 앞잡이들에게 넘길 수 없다며 사장을 맡아달라 호소했다. 월남은 한참 생각하다 민족 계몽육성에 힘써야 한다며 이 제의를 받아들인다. 우창은 경영과 지면을 대대적으로 혁신해 나갔다.
하루는 월남이 편집국에 들어서자 마침 총독부에서 나온 일본인 관리가 기사를 당장 빼라고 난리를 치고 있었다. 이때 월남은 77세 노인답지 않게 벽력같은 호통을 쳤다. “이놈들아 정신 차려!” 담당기자를 나무람인지 총독부 관리를 나무람인지 분명치 않았으나 움찔 놀란 그 관리는 슬그머니 물러갔다. 그러자 월남은 기자에게 “걱정할 것 없네. 그대로 진행하게.” 이렇게 수시로 격려하고는 했다.
어느 날 월남을 방문한 일제 거물 오사키(尾峙行雄)가 대뜸 입을 열었다. “일본과 조선은 부부 같은 사이인데, 남편이 조금 잘못했다 해서 아내가 들고일어나서야 되겠소?” 그 말은 일본을 남편으로, 조선을 아내로 비유, 3.1 독립운동을 넌지시 비난한 것이었다. 오사키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월남은 말을 받았다. “그러나 정당한 부부가 아니고 만일 강간폭력으로 맺어진 부부라면 어떻게 하겠소?” 오사키는 낯 뜨거워 말 한마디 못하고 물러났다. 월남이 세상을 뜨자 독립협회 동지였던 서재필 이승만은 “월남은 거인이었고, 그의 비범한 탁론과 강직한 기백에 감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애도했다.
우창 또한 독립운동가였다. 그는 1919년 4월 임시정부 첫 의정원회의에서 ‘대한’을 국호로 제안, 공화제를 의미하는 ‘민국(民國)’을 붙임으로써 ‘대한민국’이라는 정식 국호가 탄생한다. 1927년 3월 우창은 사장에 취임했다. 그는 6년 6개월 동안 가산 42만원의 거금을 조선일보에 쏟아 부었다. 그러나 전 재산을 바치고도 적잖은 빚을 안고 회사를 떠나야만 했다. 우창은 뒷날 “일제하 신문사 사장이란, 욕과 고생은 많을지언정 외국신문 사장처럼 결코 영예스러운 자리는 못 되는 것”이라고 탄식한다.
파인 김동환은 감정이 풍부했다. 조선일보사 편집국 창문을 통해 저물어 가는 저녁놀을 바라보면서 “아!” 감탄을 하면 학예부장 안석주는 “이크, 파인의 감격이 또 시작됐군!” 놀렸다. 그가 시를 쓰고 안석주가 삽화를 그린 여러 작품들이 돋보인다. “북극에는 날마다 밤마다 눈이 오느니/ 회색하늘 속으로 눈이 퍼부슬 때마다/ 눈속에 파뭇기는 하-연 북조선이 보이느니”(‘적성을 손가락질하며’에서).
파인은 함북 경성에서 태어나 서울 중동학교와 일본 동양대 문과를 졸업했다. 조선일보 기자로 재직하던 1929년 월간 ‘삼천리’를 창간하며 잡지 명편집자로 이름을 날린다.
1933년 7월 우창과 조만식의 간청으로 사장으로 취임한 계초 방응모(1884~1950.납북)는 과단성 있게 사업을 펼쳤다. 50만원의 거액을 투입, 조선일보를 주식회사로 바꾸자 사세는 욱일승천의 기세였다. 한편 계초는 드러나지 않게 독립운동을 후원했다. 안창호가 경성의전병원에 입원했을 때 선뜻 500원을 냈다. 그가 1938년 3월 10일 운명하자 계초 등이 낸 조위금으로 장례를 지냈다. 독립운동가 김동삼이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했을 때 장례를 치른 이도 그였다. 계초는 상해 임정 기관지를 찍는 데 위험을 무릅쓰고 활자와 자금을 제공했다.
1940년 8월 10일, 일제 발악은 극에 달하여 조선일보를 폐간시킨다. 1945년 조선일보 복간호가 나온 날 상해 임정 주석 백범 김구는 환국했다. 백범은 바쁜 일정 속에 '有志者事竟成'(유지자사경성.뜻 지닌 자 성취할 수 있다)이란 축하 휘호를 써 보냈다. 우남 이승만도 일제강점기 민족계몽에 앞장섰음을 치하, 조선일보 부활 축전을 보낸다.
일제 강점 40년 국내의 민족계몽운동은 외국의 독립운동보다 더 온갖 수모를 인내하는 형극의 길이 아닐 수 없었다. 저서 ‘지식인들의 아편’에서 프랑스 정치사회학자 레이몽 아롱은 말한다. “어설픈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역사의 진실을 어지럽히지 말라.”
1940년 독일군이 파리를 점령하자, 프랑스는 ‘비시 나치괴뢰’ 정부가 들어선다. 1905년부터 일본은 공식적 조약에 의거해 조선을 통치한다. 프랑스가 점령당한 기간은 4년 남짓, 일본이 조선을 지배한 기간은 40년이 넘는다. 2차대전 당시 쿠브 뒤 뮈르빌은 비시 정권 재무관료였지만, 드골 정권에서 10년 넘게 외상.총리를 지냈다. 모리스 파퐁은 나치협력 전력에도 예산부장관에 올랐다. 더 충격적인 것은 미테랑 대통령이 비시 정권 협력자였음은 '비밀 아닌 비밀'이었다. 이들의 행위는 조국을 위한 불가피한 처신으로 인정받았다.
1924년 조선일보 발행권을 인수한 우창 신석우는 월남 이상재를 찾아 민족의 장래와 신문의 역할을 강조하면서 조선일보를 다시 왜놈 앞잡이들에게 넘길 수 없다며 사장을 맡아달라 호소했다. 월남은 한참 생각하다 민족 계몽육성에 힘써야 한다며 이 제의를 받아들인다. 우창은 경영과 지면을 대대적으로 혁신해 나갔다.
하루는 월남이 편집국에 들어서자 마침 총독부에서 나온 일본인 관리가 기사를 당장 빼라고 난리를 치고 있었다. 이때 월남은 77세 노인답지 않게 벽력같은 호통을 쳤다. “이놈들아 정신 차려!” 담당기자를 나무람인지 총독부 관리를 나무람인지 분명치 않았으나 움찔 놀란 그 관리는 슬그머니 물러갔다. 그러자 월남은 기자에게 “걱정할 것 없네. 그대로 진행하게.” 이렇게 수시로 격려하고는 했다.
어느 날 월남을 방문한 일제 거물 오사키(尾峙行雄)가 대뜸 입을 열었다. “일본과 조선은 부부 같은 사이인데, 남편이 조금 잘못했다 해서 아내가 들고일어나서야 되겠소?” 그 말은 일본을 남편으로, 조선을 아내로 비유, 3.1 독립운동을 넌지시 비난한 것이었다. 오사키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월남은 말을 받았다. “그러나 정당한 부부가 아니고 만일 강간폭력으로 맺어진 부부라면 어떻게 하겠소?” 오사키는 낯 뜨거워 말 한마디 못하고 물러났다. 월남이 세상을 뜨자 독립협회 동지였던 서재필 이승만은 “월남은 거인이었고, 그의 비범한 탁론과 강직한 기백에 감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애도했다.
우창 또한 독립운동가였다. 그는 1919년 4월 임시정부 첫 의정원회의에서 ‘대한’을 국호로 제안, 공화제를 의미하는 ‘민국(民國)’을 붙임으로써 ‘대한민국’이라는 정식 국호가 탄생한다. 1927년 3월 우창은 사장에 취임했다. 그는 6년 6개월 동안 가산 42만원의 거금을 조선일보에 쏟아 부었다. 그러나 전 재산을 바치고도 적잖은 빚을 안고 회사를 떠나야만 했다. 우창은 뒷날 “일제하 신문사 사장이란, 욕과 고생은 많을지언정 외국신문 사장처럼 결코 영예스러운 자리는 못 되는 것”이라고 탄식한다.
파인 김동환은 감정이 풍부했다. 조선일보사 편집국 창문을 통해 저물어 가는 저녁놀을 바라보면서 “아!” 감탄을 하면 학예부장 안석주는 “이크, 파인의 감격이 또 시작됐군!” 놀렸다. 그가 시를 쓰고 안석주가 삽화를 그린 여러 작품들이 돋보인다. “북극에는 날마다 밤마다 눈이 오느니/ 회색하늘 속으로 눈이 퍼부슬 때마다/ 눈속에 파뭇기는 하-연 북조선이 보이느니”(‘적성을 손가락질하며’에서).
파인은 함북 경성에서 태어나 서울 중동학교와 일본 동양대 문과를 졸업했다. 조선일보 기자로 재직하던 1929년 월간 ‘삼천리’를 창간하며 잡지 명편집자로 이름을 날린다.
1933년 7월 우창과 조만식의 간청으로 사장으로 취임한 계초 방응모(1884~1950.납북)는 과단성 있게 사업을 펼쳤다. 50만원의 거액을 투입, 조선일보를 주식회사로 바꾸자 사세는 욱일승천의 기세였다. 한편 계초는 드러나지 않게 독립운동을 후원했다. 안창호가 경성의전병원에 입원했을 때 선뜻 500원을 냈다. 그가 1938년 3월 10일 운명하자 계초 등이 낸 조위금으로 장례를 지냈다. 독립운동가 김동삼이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했을 때 장례를 치른 이도 그였다. 계초는 상해 임정 기관지를 찍는 데 위험을 무릅쓰고 활자와 자금을 제공했다.
1940년 8월 10일, 일제 발악은 극에 달하여 조선일보를 폐간시킨다. 1945년 조선일보 복간호가 나온 날 상해 임정 주석 백범 김구는 환국했다. 백범은 바쁜 일정 속에 '有志者事竟成'(유지자사경성.뜻 지닌 자 성취할 수 있다)이란 축하 휘호를 써 보냈다. 우남 이승만도 일제강점기 민족계몽에 앞장섰음을 치하, 조선일보 부활 축전을 보낸다.
일제 강점 40년 국내의 민족계몽운동은 외국의 독립운동보다 더 온갖 수모를 인내하는 형극의 길이 아닐 수 없었다. 저서 ‘지식인들의 아편’에서 프랑스 정치사회학자 레이몽 아롱은 말한다. “어설픈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역사의 진실을 어지럽히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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