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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이여, 현대사를 사랑하라

2005.11.12 16:59

관리자 조회 수:863 추천:138

「기무라 간(木村幹), “한국인이여, 현대사를 사랑하라,” 조선일보, 2005. 9. 23, A27; 일본 고베대학원 교수.」

얼마 전 일본의 어느 보수 정당 연구모임에서 한국 정치에 대해 강연할 때 한 의원으로부터 “한국에서 보수주의(保守主義)가 복권할 것으로 보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그때 나는 "보수주의의 복권이 아주 어려운 상황이라고 생각한다"고 대답했다.

이유를 설명하면 이렇다. 보수주의란 인간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고, 그런 능력밖에 갖지 못하는 인간이 사회를 함부로 엉클어버리면 그 사회의 근간을 이루는 중요한 뭔가를 잃어버린다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상이다. 그렇다고 보수주의가 단순히 현상 유지나 특권 유지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한번 깨져버린 사회는 두 번 다시 원상 회복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개혁주의가 폭주할 때 경고음을 울리고, 일정한 선(線)을 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선 어느 사회나 보수주의가 필요하다. 잃어버릴지 모르는 사회의 중요성을 확인하는 것은 개혁 그 자체를 위해서도 당연히 필요하다. 그리고 한 사회에서 보수주의가 일정한 지지를 얻기 위해서는 그 사회가 걸어온 길에 대해 어느 정도 긍정적인 이해를 확보하고 있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요즘의 한국은 어떤가. 지금 한국에서 넘쳐나는 것은 자신이 살고 있는 사회에 대한 불만이고, 해방 이후 역사에 대한 부정적인 논의뿐이라는 인상을 준다. TV나 영화에서 그려지는 한국현대사는 문제점투성이고, 거기에는 강한 비판적 메시지가 담겨 있다. 한국 사람들이 자신들이 살아가는 사회와 자신들의 역사에 대해 긍정적인 이해를 갖지 않는 한 보수주의가 일정 이상의 지지를 모으기는 힘들다. 한국에서 보수주의가 복권하기 어렵다고 대답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국 사람들이 왜 자기 역사에 대해 이렇게까지 부정적인 사고방식을 갖게 됐을까라는 점은 도저히 이해가 안 간다. 미·소에 의한 분할점령, 6·25전쟁, 군사쿠데타와 유신정권, 광주사건, IMF위기 등 해방 후 한국이 걸어온 길은 고난의 역사였다. 그렇다고 해서 해방 이후 한국의 역사가 모조리 부정적인 측면만 갖는 것은 아닐 것이다.

1950년대의 이승만 대통령은 필리핀의 막사이사이 대통령에게 필리핀 경제를 따라잡는 것이 목표라고 말한 적이 있다. 6·25전쟁 직후 일본은 물론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들에 비해서도 낮은 생활수준에 허덕이던 한국은 훌륭하게 경제발전을 일궈냈고, 풍요한 사회를 건설했다. 민주화도 마찬가지다. 1980년대 새로운 민주화의 ‘파도' 속에서 한국은 민주화를 실현했다. 필리핀을 비롯한 많은 나라들이 민주화 실현 이후에도 정치적 혼란이 계속된 데 비해 한국에선 민주주의가 훌륭하게 정착하고 있다.

한국은 민족분단이라는 극히 어려운 상황 속에서 경제발전과 민주화를 실현했다. 1950·1960년대에는 한국처럼 가난한 권위주의 독재국가가 수두룩했다. 반세기가 지난 오늘날 한국만큼 풍요롭고 민주적으로 된 나라는 단 하나도 없다. 외자(外資) 도입에 의한 경제발전과 그 결과로서의 민주화는 ‘한국 모델'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많은 나라들에 발전 모델을 제공하고 있다. 해방 후 한국의 성공은 세계사적인 사건이다.

한국인이 자기 역사를 자랑스럽게 생각하지 않으면, 도대체 세계 어느 나라가 자기 역사를 자랑스러워할 수 있을까. 물론 아주 문제가 없지는 않겠지만, 한국은 훌륭하게 해냈다. 그런데도 외국인이 바라보는 한국은 기이하게 비친다. 개혁을 한다면서 과거의 문제점을 따지기 이전에 한국인들은 스스로 왜 성공했는지를 한번 더 살펴볼 필요가 있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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