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당시 좌익, 양민 앞세워 관공서 습격
2007.08.14 10:55
[김성욱, “6·25당시 좌익, 양민 앞세워 官公署 습격,” 미래한국, 2007. 5. 26, 2쪽.]
노근리 사건의 정황에서 설명됐듯, 6·25 당시 인민군·빨치산이 양민을 위협해 총알받이처럼 삼았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6·25 직전에는 5사단 소속으로 빨치산 토벌에, 사변 후에는 1사단 소속으로 참전했던 기업인 임병주 씨(육사 8기)는 이렇게 증언했다.
“6·25사변 직전 빨치산들은 소위 보급투쟁을 위해 마을에 내려와 소나 돼지 같은 가축은 물론 사람까지 끌고 갔고, 면장·이장 등 공직자를 살해하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공비들은 양민(良民)들을 앞세워 관공서를 습격하기도 했다. 뒤에서 총으로 위협하면서, 전진하지 않으면 쏴버리는 식이었다. 국군도 내막을 알고 있다 보니 양민과 공비가 뒤섞여 밀려오는 무리에 차마 총을 쏠 수 없어, 관공서가 점령당하는 일까지 생겨났다. 공산주의자들의 악랄한 수법은 6·25때 인민군에게 그대로 이어졌다. 양민과 인민군이 뒤섞여 공격하는 상황에서, 당황한 미군들이 발포하거나 폭격하기도 했다.”
노근리 사건의 정황에서 설명됐듯, 6·25 당시 인민군·빨치산이 양민을 위협해 총알받이처럼 삼았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6·25 직전에는 5사단 소속으로 빨치산 토벌에, 사변 후에는 1사단 소속으로 참전했던 기업인 임병주 씨(육사 8기)는 이렇게 증언했다.
“6·25사변 직전 빨치산들은 소위 보급투쟁을 위해 마을에 내려와 소나 돼지 같은 가축은 물론 사람까지 끌고 갔고, 면장·이장 등 공직자를 살해하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공비들은 양민(良民)들을 앞세워 관공서를 습격하기도 했다. 뒤에서 총으로 위협하면서, 전진하지 않으면 쏴버리는 식이었다. 국군도 내막을 알고 있다 보니 양민과 공비가 뒤섞여 밀려오는 무리에 차마 총을 쏠 수 없어, 관공서가 점령당하는 일까지 생겨났다. 공산주의자들의 악랄한 수법은 6·25때 인민군에게 그대로 이어졌다. 양민과 인민군이 뒤섞여 공격하는 상황에서, 당황한 미군들이 발포하거나 폭격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