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천석, "대한민국 命運 바꿀 경계선 넘고 있다," 조선일보, 2017. 9. 30, A26쪽.]
세상에 오르내리는 소문이 평판(評判)이다. 그냥 소문은 혼자 부풀다 제풀에 꺼진다. 평판이 빨리 사그라들지 않는 이유는 절반의 진실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평판은 급박한 순간에 힘을 발휘한다. 평판이 좋으면 형편이 궁색해져도 어렵지 않게 급전(急錢)을 융통할 수 있다. 평판이 반드시 도덕 감정과 일치하는 건 아니다. 악평(惡評)도 평판이다. 말로 그치지 않고 꼭 행패를 부리는 불량배(不良輩)는 두려움을 자아낸다. 성깔을 건드리지 않으려고 모두 몸을 사린다. 불량배는 악평을 무기로 사용한다. 좋은 평판이든 나쁜 평판이든 영향력의 핵심은 언행일치(言行一致)다. 허풍쟁이는 신용을 쌓지 못한다.
모든 나라가 평판 관리에 신경을 쏟는다. 안보와 경제는 평판의 바람을 심하게 탄다. 물렁하게 보이면 아무나 건드린다. 국제사회에선 더 그렇다. UN은 재판소라기보다 부실(不實) 병원과 비슷하다. 입원하는 사람은 많아도 완치(完治)돼 퇴원하는 환자는 거의 없다. 중환자 경우는 두말할 게 없다. 작은 나라들이 '외부 위협에 절대 물러서지 않는 나라' '침략을 당하면 온몸의 가시를 세워 반드시 격퇴하는 고슴도치'라는 평판을 쌓으려 노력하는 이유도 여기 있다. 강대국은 '동맹의 약속은 허물지 않는 나라'라는 신용을 잃지 않으려 한다. '만만치 않은 나라'라는 평판을 쌓으면 누구도 함부로 대하지 못한다. 프랑스·미국·중국을 차례로 물리친 베트남이 그런 경우다.
평판을 지탱하는 두 기둥은 능력(POWER)과 결의(決意)다. 능력 없는 결의는 허망하고, 결의 없는 능력은 무용지물(無用之物)이다. 1950년에서 1999년 사이 총 43번의 강대국과 약소국 간 전쟁이 있었다. 결과가 어땠을까. 약소국이 22번 승리했다. '상대를 단숨에 무력화(無力化)시키는 힘'과 '고통을 오래 견디는 정치적 결의'가 각각 승패 결정 요인으로 작용했다. 이제껏 강대국 본토(本土)가 약소국의 핵·미사일 공격에 노출될 위험 때문에 벌어진 전쟁은 없었다. 그런 전쟁의 양상은 상상할 수가 없다.
동맹국 의심을 사고, 적에게 얕잡아 보이는 행동이 거듭될수록 안보 평판은 악화된다. 모든 나라는 상대의 의도-선의(善意)든 악의(惡意)든-가 아니라 능력을 근거로 대비책을 준비한다. 스탈린은 히틀러의 의도만 헤아리다가 2000만명의 소련 병사와 국민을 희생시켰다.
어느 동맹이든 위기에서 동맹국의 버림을 받거나 동맹국 때문에 불필요한 분쟁에 휘말려드는 위험이 항상 붙어 다닌다. 동맹의 본질이 그렇다. 어느 한 쪽이 일방적으로 혜택을 받는 동맹일수록 폐기(廢棄) 처분될 가능성이 크다. 2차 대전 직전 영국의 체코 방위 공약, 70년대 미국의 남베트남 방위 공약이 그 길을 밟았다. 동맹의 딜레마를 완전 해소할 방법은 없다. 냉전 시대 서독과 일본은 자국(自國)의 위험 부담을 높이는 선택으로 미국을 붙들어 안보 균형을 맞췄다.
위기 상황에서 국가가 내놓는 메시지는 의미가 분명하고 수신자(受信者)가 누구인지 명확해야 한다. 메시지는 보내는 쪽이 담은 뜻이 아니라 받는 쪽의 해석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평화'라는 한 단어의 의미가 상대에 따라 정반대로 해석되기도 한다. 동맹국에 보낼 메시지가 적에게 전달되고 적에게 보내는 메시지가 동맹국에 잘못 전달돼 전쟁의 방아쇠를 당긴 비극이 숱하다.
사령탑(司令塔)이 누구인지 모를 외교는 낭떠러지에서 나라 등을 떠민다. '사드 배치 여부로 동맹이 흔들린다면 그건 동맹도 아니다'던 대통령 통일외교·안보특보(特補)는 '북한을 인도 파키스탄처럼 실질적 핵보유국으로 인정하고 사태를 풀어가야 한다'는 데로 나갔다. '한·미 동맹을 깨더라도…''주한 미군 철수…' 등등의 이야기는 동네 식당 단골 메뉴가 됐다. 재래식 무기로 핵무장한 상대를 제압하는 건 불가능하다. 촛불로 버섯구름의 공포를 다스릴 수도 없다. 헌법이 명령하는 대통령 최고 책무(責務)는 '국가 독립 수호'다. 국민을 누구에게 끌려다니는 종으로 만들지 말라는 명령이다.
전쟁과 평화의 정치학에서 '제1원칙'은 지도자가 국가 과제 우선(優先)순위를 명확히 하는 일이다. 그래야 적의 오판(誤判)을 막고 동맹국 신뢰를 얻고 국민 뜻이 하나로 모아진다. 대통령이 현 상황을 '6·25 이후 최대 위기'라고 규정하는 데도 대통 령 부하들은 적폐(積弊) 청산의 진흙탕을 뒹굴고 있다. 이 상황에선 대한민국 대표 목소리가 '문재인 방송'인지 '문정인 방송'인지 하는 혼란도 수그러들지 않을 것이다.
내년 보름달도 올해처럼 둥글 것이다. 그러나 그 보름달 아래 나라 처지와 보름달을 올려다보는 국민 마음이 올해와 같을 수는 없다. 대한민국은 국가 명운(命運)이 바뀌는 경계선 위를 날고 있다.
모든 나라가 평판 관리에 신경을 쏟는다. 안보와 경제는 평판의 바람을 심하게 탄다. 물렁하게 보이면 아무나 건드린다. 국제사회에선 더 그렇다. UN은 재판소라기보다 부실(不實) 병원과 비슷하다. 입원하는 사람은 많아도 완치(完治)돼 퇴원하는 환자는 거의 없다. 중환자 경우는 두말할 게 없다. 작은 나라들이 '외부 위협에 절대 물러서지 않는 나라' '침략을 당하면 온몸의 가시를 세워 반드시 격퇴하는 고슴도치'라는 평판을 쌓으려 노력하는 이유도 여기 있다. 강대국은 '동맹의 약속은 허물지 않는 나라'라는 신용을 잃지 않으려 한다. '만만치 않은 나라'라는 평판을 쌓으면 누구도 함부로 대하지 못한다. 프랑스·미국·중국을 차례로 물리친 베트남이 그런 경우다.
평판을 지탱하는 두 기둥은 능력(POWER)과 결의(決意)다. 능력 없는 결의는 허망하고, 결의 없는 능력은 무용지물(無用之物)이다. 1950년에서 1999년 사이 총 43번의 강대국과 약소국 간 전쟁이 있었다. 결과가 어땠을까. 약소국이 22번 승리했다. '상대를 단숨에 무력화(無力化)시키는 힘'과 '고통을 오래 견디는 정치적 결의'가 각각 승패 결정 요인으로 작용했다. 이제껏 강대국 본토(本土)가 약소국의 핵·미사일 공격에 노출될 위험 때문에 벌어진 전쟁은 없었다. 그런 전쟁의 양상은 상상할 수가 없다.
동맹국 의심을 사고, 적에게 얕잡아 보이는 행동이 거듭될수록 안보 평판은 악화된다. 모든 나라는 상대의 의도-선의(善意)든 악의(惡意)든-가 아니라 능력을 근거로 대비책을 준비한다. 스탈린은 히틀러의 의도만 헤아리다가 2000만명의 소련 병사와 국민을 희생시켰다.
어느 동맹이든 위기에서 동맹국의 버림을 받거나 동맹국 때문에 불필요한 분쟁에 휘말려드는 위험이 항상 붙어 다닌다. 동맹의 본질이 그렇다. 어느 한 쪽이 일방적으로 혜택을 받는 동맹일수록 폐기(廢棄) 처분될 가능성이 크다. 2차 대전 직전 영국의 체코 방위 공약, 70년대 미국의 남베트남 방위 공약이 그 길을 밟았다. 동맹의 딜레마를 완전 해소할 방법은 없다. 냉전 시대 서독과 일본은 자국(自國)의 위험 부담을 높이는 선택으로 미국을 붙들어 안보 균형을 맞췄다.
위기 상황에서 국가가 내놓는 메시지는 의미가 분명하고 수신자(受信者)가 누구인지 명확해야 한다. 메시지는 보내는 쪽이 담은 뜻이 아니라 받는 쪽의 해석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평화'라는 한 단어의 의미가 상대에 따라 정반대로 해석되기도 한다. 동맹국에 보낼 메시지가 적에게 전달되고 적에게 보내는 메시지가 동맹국에 잘못 전달돼 전쟁의 방아쇠를 당긴 비극이 숱하다.
사령탑(司令塔)이 누구인지 모를 외교는 낭떠러지에서 나라 등을 떠민다. '사드 배치 여부로 동맹이 흔들린다면 그건 동맹도 아니다'던 대통령 통일외교·안보특보(特補)는 '북한을 인도 파키스탄처럼 실질적 핵보유국으로 인정하고 사태를 풀어가야 한다'는 데로 나갔다. '한·미 동맹을 깨더라도…''주한 미군 철수…' 등등의 이야기는 동네 식당 단골 메뉴가 됐다. 재래식 무기로 핵무장한 상대를 제압하는 건 불가능하다. 촛불로 버섯구름의 공포를 다스릴 수도 없다. 헌법이 명령하는 대통령 최고 책무(責務)는 '국가 독립 수호'다. 국민을 누구에게 끌려다니는 종으로 만들지 말라는 명령이다.
전쟁과 평화의 정치학에서 '제1원칙'은 지도자가 국가 과제 우선(優先)순위를 명확히 하는 일이다. 그래야 적의 오판(誤判)을 막고 동맹국 신뢰를 얻고 국민 뜻이 하나로 모아진다. 대통령이 현 상황을 '6·25 이후 최대 위기'라고 규정하는 데도 대통 령 부하들은 적폐(積弊) 청산의 진흙탕을 뒹굴고 있다. 이 상황에선 대한민국 대표 목소리가 '문재인 방송'인지 '문정인 방송'인지 하는 혼란도 수그러들지 않을 것이다.
내년 보름달도 올해처럼 둥글 것이다. 그러나 그 보름달 아래 나라 처지와 보름달을 올려다보는 국민 마음이 올해와 같을 수는 없다. 대한민국은 국가 명운(命運)이 바뀌는 경계선 위를 날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