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민주화 운동’에 북한이 개입했을 가능성에 대한 새로운 조사와 5·18 유공자 명단 공개를 다시 촉구한 국회의원들의 최근 발언을 둘러싸고 정치권과 그 주변에서는 다시 난장판이 벌어져 더 긴급한 현안들을 덮어버리고 영향력 있는 논객들이 연출하는 언어의 난투극이 무섭다.
죽은 자들을 잠들게 하라
이것을 지켜보노라면 이미 39년 전 그 피의 아비규환 속에서 저승으로 밀려나 그 곳에서나마 겨우 평온을 찾았을 망령들이 다시 놀라 벌떡 일어나며 “왜 우리가 죽어서까지도 편히 잠들 수 없게 시끄럽냐”며 호통을 치지 않을까 걱정스럽다.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자신을 바치겠다고 나섰던 젊은이들, 폭동으로부터 나라를 수호하는 임무를 수행한다고 믿으며 죽어간 계엄군 병사들, 험악해진 대치 상황 속에서도 생계를 꾸려나가기 위해 나섰다가 영문도 모르고 폭동에 휘말려 희생된 사람들, 극히 소수겠지만 ‘남조선 혁명과 해방’이라는 공개적으로 천명된 대한민국 전복 목적을 위해 남한에 비밀리에 파견되어 잠복활동을 해왔던 김정일의 지하투사들과 그 동조자들, 사회에 뿌리 내리지 못하고 시류에 휩쓸리던 사람들… 죽음은 평등에 대한 가장 확실한 보장이라고 누군가 말했던가.
5·18 망자들이 이승에서 살았던 삶이 어떻게 서로 달랐든 간에 불시에 생명을 박탈당한 그들은 모두가 똑같이 애도와 존중과 위무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원혼들이다. 그들은 각기 어느 부모의 소중하기 그지없는 자식이요 형제자매이며 어버이였다. 살아남아 애통해 하는 가족들의 첫째 관심사이자 인간으로서의 도리는 그 희생자들의 혼이 여한을 오래 품지 않고 고이 잠들 수 있도록 넋을 기리고 위무하는 일일 것이다. 그것이 또한 함께 희생이 클 수 밖에 없던 가족이나 친지들이 하루속히 상실의 아픔과 분노를 뒤로 하고 다시 정상적이고 생산적인 삶으로 돌아갈 수 있게 돕는 가장 효과적인 길이요 다행히도 화를 면했던 모든 사람들의 도리이고 의무이다.
그 많은 사람들의 삶을 송두리째 앗아가고 더 많은 사람들, 아니 우리나라 전체에, 깊은 신체적, 정신적, 정치적 상처를 남긴 그 흉폭한 사건의 경위를 엄밀하게 조사하여 밝히고 연루자들의 공과 여부를 밝히는 일은 모두가 희생자들의 혼을 위무하고 그들의 이름을 엄숙하게 기린다는 대전제 하에서 이뤄져야 할 일이다. 죽어서 혼이 되면 산 자가 모르는 것도 다 알 수 있는 능력이 생기거나 아니면 이승의 일은 이미 관심사가 아닐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가장 가까운 가족이나 동지로서 반드시 알고 싶고 해야 할 일은 저들이 왜, 어떻게 죽었는가를 시간이 아무리 걸리더라도 정확하게 밝히고 망자들의 소원이었던 민주화나 가족의 안위와 번영이 제대로 이뤄지고 있다는 희소식을 전하는 일일 것이다.
5·18 역사적 해석, 열려 있어야
그렇게 함으로써만 유혈 사태를 낳았던 우리 사회의 분열과 갈등의 깊은 원인에 대한 공통의 이해가 생기고 이해가 생기고 그런 비극의 재발이 없도록 개인적, 사회적 상처를 근본적으로 치유하는 일이 가능해질 것이다. 이런 일에서 성공의 열쇠는 조사의 정직과 정확과 정밀, 그리고 항상 열려 있으면서도 논리적으로 엄밀한 자세의 사실 취합과 해석 과정을 거친 설득력 있는 결론, 그리고 모두가 수긍할 수 있는 결론에 기초한 후속 조치에 있음이 물론이다.
우리의 역대 정부는 각기 나름대로의 노력을 해온 것이 사실이다. 사건의 연루 당사자 중 한 사람이었던 전두환 대통령의 집권 시절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수차례에 걸쳐 정부 차원의 조사가 이뤄졌고 유가족과 민주화 세력 측의 요구가 수용되면서 시위세력과 진압군 양쪽이 다 성실한 대한민국 국민임을 인정하며 희생자 모두를 추모하는 조심스런 절충안으로서의 5·18 특별법이 만들어졌다.
1980년 5·18 광주사태는 ‘폭동’이라는 현상 서술적인 학술용어 대신 ‘광주민주화 운동’이라는 가치평가적인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고 망월동 국립묘지가 조성되었으며 희생자와 유가족에 대한 보상 조치가 만들어졌다. 또한 5·18 관련 자료들이 유네스코에 등재되어 영구 보전됨으로써 우리 역사에서 큰 전환점을 이룬 이 중요한 사건에 대한 연구는 시간이 흘러 상처가 다소 아물고 이성적 판단이 격정을 압도할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가 조성된 후로도 활발하게 진행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었다.
‘5·18민주화운동’ 문제가 다시 사회를 둘로 갈라놓는 뜨거운 쟁점으로 떠오른 것은 그것이 한편으로는 대한민국의 정체성 부정으로 연결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과 연결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희생자에 대한 보상 문제가 새로운 특권층의 대두로 의심될 정도로 다른 유공자들, 예를 들어 전사자들의 처우에 비해 관대함이 드러나며 보상자 수가 급격히 증가했기 때문이다. 잠복해 있던 이 두 가지 문제가 표면화 되기 시작한 것은 구 민주당이 민주화운동 희생자 추도식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합창 대신 제창할 것을 주장하며 ‘광주 민주화운동 특별법 개정안’을 국회에서 발의하면서부터였다.
5·18 사건에 북한이 연루되었다는 등의 주장으로 5·18 희생자들의 명예를 훼손하는 자는 5000만원 이하 벌금이나 5년 이하 징역에 처한다는 조항을 골자로 하는 그 법이 통과될 경우 역사적 사건으로서의 광주는 정치적으로 성역화 되어 연구나 토론의 대상조차 될 수 없을 것이라는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양심과 언론의 자유보호를 생명으로 하는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거기에 더해 유공자 자격심사는 보훈처가 아니고 광주의 한 위원회에 위임되어 있는데 사건 당사자들인 유공자 명단은 비공개이며 포괄적인 5·18 유공자 보상의 내용 중에는 각종 공기관 취업이나 입학시험에서 5~10%의 가산점을 주는 조항도 포함되어 있음이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러한 사실이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더 심각해진 취업난 문제와 연결되면서 젊은 층 사이에서 새로운 관심과 반발의 대상으로 떠오른 것이다.
지지층을 집결시킬 의제 찾기에 고심하던 한국당은 그 동안 방치했던 광주민주화 운동 희생자 명단 공개 요구를 주요 현안으로 들고 나왔지만 그것이 광주 문제에 대한 어떤 본질적 해결을 시도하겠다는 소신과 의지에서보다는 얄팍한 정치적 계산에서 나왔던 것이기 때문에 ‘5·18을 모독’한다는 여당의 한방 공격에 사뭇 비틀거리는 민망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결코 있어서는 안 되었을, 믿기 어려운 그 피비린내 나는 동족상잔을 지켜보며 그 비극이 하루속히 종식되기를 바랐던 사람들의 머리 속에는 혹시라도 북한의 영향이 작용하지 않았는가 하는 의혹이 처음부터 떠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남조선’을 ‘혁명’으로 전복시켜 통일을 이룩하겠다는 것은 북한이 공개적으로 천명해온 목적이었으니 북한 개입 가능성에 관한 여러 가지 설이 지금까지 끈질기게 나돌고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5월 17일에는 계엄령이 전국으로 확대 선포되었기 때문에 서울역 앞에 이미 군집했던 10만 규모의 거대한 민주화대중까지도 무모한 희생을 피하고 미래를 기약하기 위해 부득이 해산을 결정했던 상황이었다. 계엄령은, 선포 정당성 여부는 별개의 문제로, 폭력 대응을 불사하겠다는 경고인데 군과 민이 폭력으로 대치할 경우 민의 희생이 클 것이라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그런데 유독 광주에서만 서울의 시위세력과의 공조 가능성이 무너진 바로 이튿날 시위가 일어나 엄청난 피의 대가를 치러야 했던 이 비극이 과연 책임감 있는 광주 민주화운동 지도부의 판단에서 발단된 것이라고는 믿기가 어려운 점이 있었다. 김일성이 대한민국 정부를 내부로부터 붕괴시키기 위해 학생들의 민주화 운동을 배후에서 조종하려 한다는 것은 그 전부터 이미 비밀이 아니었다. 사실 민주화는 북한과 전혀 상관없이, 아니 북한의 위협에 제대로 대처하기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우리가 추구해야 했고 추진하고 있던 목표였다.
하지만 광주의 대학 운동권 대표격 인물들은 17일 밤에 이미 도주하고 있었음이 후에 드러났는데 과연 어린 학생들을 계엄군의 총칼 앞으로 뛰어들게 만들었어야 할 만큼 시각을 다투는 새로운 과제가 따로 떠올랐는가라는 지극히 상식적인 질문도 나오지 않을 수 없다. 폭력 대치가 일단 시작되면 전쟁과 같이 걷잡을 수 없는 상황이 되게 마련인데 사태가 확산되는 것을 막으려고 광주의 원로들이나 계엄군 측이 수차례 제시한 타협안을 극구 거부한 세력이 있었다.
흉흉했던 소문의 상당 정도는 사건 당시 실시간으로 북한에서 나오고 있던 선전물의 반향이었다는 사실 또한 5·18 사태에 대한 북한 지하세력의 개입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게 만든다. 이러한 의문은 희생자들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것이 아니라 원혼들의 한을 풀어주기 위해서라도 해소되어야 하는 것이다.
증오를 멈추고 서로를 돌아보자
5·18 사태에서 드러난 바로 믿기 어려운 잔학성 때문에 계엄군을 증오하고 저주하는 희생자들과 그 가족들이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것이 모두 계엄군의 고의적 소행이라고 믿지 못하고 북한 오열 개입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싶어 하는 측이나 공동으로 드러내는 감정은 진정으로 민주화를 바라고 싸우다가 또는 영문도 모르고 무고하고 무참하게 희생당한 사람들에 대한 한없는 연민과 애도, 그리고 그런 폭력 대치 상황을 피할 수 없게 만든 세력들에 대한 증오이다.
하지만 누가 가해자이고 누가 피해자인가 하는 문제는 누가 희생자이고 아닌가 하는 문제와 반드시 일치하는 것이 아니다. 더구나 진압군은 가해자이고 시민군은 피해자이다라는 등식으로 자동적으로 가려질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박정희 대통령 사망 후 권력 공백기에 우리는 퇴치해야 할 외세나 전제군주 지배 아래 있던 것이 아니고 부족함이 많으나마 자랑할 것도 많은 독립국가의 주권자들이었다.
계엄군은 절대다수의 시민을 보호하기 위해 우리가 훈련시켰고 우리 국민으로 구성된 ‘공권력’의 일부였지 적대세력이 아니었다. ‘국가 폭력’이라는 말은 어떤 특수한 개인적 범법 사례를 제외하고는 민주주의 국가에서 함부로 쓸 수 있는 말이 아니다. 만약에 5·18 사태가 진압으로 끝나지 않고 더 길게 계속되었더라면 이 나라는 그 때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평화와 민주주의가 꽃피는 낙원이 곧 바로 우리 앞에 펼쳐졌을까?
모든 역사적 사건은, 특히 대중이 참여하는 큰 사건은 복잡한 중층구조를 가진다. 새로운 사실이 발견될 가능성은 항상 열려 있으며 새로운 해석의 여지도 항상 있다. 정치적 세를 몰아 어떤 사건의 의미를 규정한다고 해서 그것이 그대로 받아들여지거나 영구해질 수는 없다. 세계 최초의 공산주의 국가를 탄생시킨 러시아 혁명도 이제는 그 나라에서 국경일로 경축되지는 않지만 역사적 사건으로서 그 사건의 의의가 지워지는 것은 아니다. 역사를 정치도구화 하는 데 달인이었던 스탈린의 전체주의 독재 치하에서도 러시아 혁명이라는 역사적 사건에 대한 비판적 견해를 ‘허위’ 또는 ‘날조’라고 비난은 할 망정 ‘모독’이라는 표현은 쓰지 않았고 그 혁명에 대한 연구는 반공진영에서 오히려 더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광주 희생자 추모식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합창하는 데 만족하지 않고 제창할 것을 주장하면서 국가로부터 보상을 받는 유공자 명단은 공개하기를 거부하고, 더 나아가 희생자들의 명예를 훼손하는 행위는 법으로 처벌하겠다고 나서는 민주당은 분명 자충수를 두고 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은 광주 민주화운동 발발 2년 후에야 작사 작곡된 것으로 5·18 영령들은 들어보지도 못한 노래이다.
이 노래의 가사는 백기완 씨가 1980년 형무소 안에서 쓴 ‘묏비나리 - 젊은 남녁의 춤꾼에게’라는 시에서 발췌한 것으로 그 시는 대한민국에 저주를 퍼부으며 발로 짓밟아 버리라고 종용하는 내용이다. 이 노래를 부름으로써 망월동 묘지의 추모객들은 아는지 모르는지 묘지에 묻힌 영령들을 대한민국의 민주투사가 아닌 ‘반역 폭도’로 둔갑시키는 것이며 따라서 계엄군에 의한 강경 진압을 정당화 하는 셈이다.
자기 나라를 저주하며 무기를 들고 일어나는 폭도들을 진압하지 않는 나라나 군대가 세상에 있을 수 있는가? 그러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그들의 공격의 표적이 되었던 대한민국 정부가 이 5·18 참가자들과 유족들을 이름도 공개하지 않는 채로 국가 유공자로 보상하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5·18 유공자를 공개하는 것이 민주화
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진상 규명이나 후속 조치, 특히 현재 집권세력이 시도하고 있는 성역화 시도는 국민 절대다수를 설득 시키고 하나로 다시 화합하게 하기에는 매우 부적절하다는 이야기다. 사태가 격화되었을 때 계엄군과 시민군 또는 계엄군과 우연히 사건에 말려든 사람들 사이에서 벌어진 폭력 대치만 보고 그 사건의 성격을 규정한다는 것은 전쟁에서 피비린내 나는 전투 장면만 보고 그 전쟁의 원인과 성격을 가리겠다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정치적 침투 공작처럼 물밑에서 벌어지는 힘의 작용은 취재기자의 눈에는 물론 사건 당사자들의 의식 속에까지도 포착되지 않더라도 작용이 없었다고 단언할 수는 없는 일이다. 유공자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빠짐없이 나와서 자기들이 어떤 연유로 어떻게 희생되어 유공자가 되었는가를 정치적 보복이나 불이익의 위험을 느끼지 않는 상태에서 솔직히 밝히며 그들이 내놓는 정보들과 객관적 증거들을 대조하면서 조각을 맞춰 나가면 적어도 불필요한 의혹은 사라질 것이고 비로소 ‘5·18 민주화 운동’의 큰 그림이 입체적으로 그려질 가능성도 커질 것이다.
그렇지 않고 권력을 가진 측이 유공자 신분 공개 요구를 묵살하고 사건 자체를 박제화 하려는 시도를 하면 할수록 이름도 알지 못하는 유공자라는 사람들을 위해 세금을 한 푼이라도 더 내고 차별을 감수해야 하는 절대다수 국민 측의 반발은 가라앉지 오히려 거세질 것이다.
5·18 민주화 정신에 맞게 보상하라
‘5·18 광주 민주화운동’에 관한 논란의 핵심은 이제 유공자 명단 공개 문제로 귀착된다고 볼 수 있다. 세계 어느 나라에서고 국가유공자로 지정된 사람들의 명단이 비공개라는 사례는 들어 본 일이 없다. 이름의 공개가 바로 명예이고 보은이며 대체로는 사건 당시 그들이 몸담고 있던 기관이나 고장의 명소에 이름이 새겨진다. 우리나라에서는 북한과의 대치라는 특수 상황과 좌우익 편향성을 드러내지 않을 수 없었던 정권들의 한계나 사회 분위기 때문에 이른바 우익정부 아래서는 광주민주화 운동 참여자들이 개인적으로 혹시라도 보이지 않는 불이익을 받게 될 것을 우려해 명단을 비공개로 해야 한다는 구실이라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 종북이라고 의심받을 정도로 좌편향적 정권이 들어선 마당에서 그런 염려는 전혀 없으니 유공자가 비공개로 남아 있어야 할 이유가 없다. 유공자로 지정된 연유와 이름을 공개하는 것은 이 나라의 주인이요 납세자인 국민의 헌법적 권리를 충족시키는 의무이지 사생활 보호 차원에서 거부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이름 밝히기를 거부하는 사람은 유공자 처우를 안 받으면 된다. 유공자를 기리는 것은 그들에 대한 특별 보상의 의미도 있지만 그보다도 남들이 따라야 할 전범(모범이)이 되라는 의미가 더 강한 것이다. 이러한 유공자 명단과 연유 공개 원칙은 비단 5·18 유공자들 뿐 아니라 국가유공자로 특별대우를 받고 있는 모든 집단과 개인들에게 모두 해당되는 이야기다. 신분을 밝히지 않는 사람에게 특별대우를 하는 것은 위헌이다.
이어서 제기되는 문제가 유공자 처우의 적정성 문제이다. 5·18 희생자들의 망령을 위로하기 위해서는 원한을 풀어줘야 하고 희생당한 사람들의 걱정 속에는 분명 뒤에 남는 가족들의 생계 문제에 대한 걱정이 컸을 것이므로 국가의 힘이 미치는 한 그에 대한 배려가 있는 것은 바람직하다. 하지만 그 배려의 정도는 다른 국가유공자나 그 밖의 사회에 큰 공헌을 한 인물들과의 형평성을 고려해서 국민적 토론과 동의를 얻어 결정했어야 할 일이지 표심을 잡기 위한 얄팍한 계산에 맡겨질 일이 아니다.
더구나 사건 후 40년이 지나 후손들이 채용시험에서 5~10% 가산점을 받는 일까지 보장된다면 그것은 새로운 귀족계급의 형성 위험을 내포하는 위헌적 사항일 수도 있다. 역대로 귀족층이 형성된 것은 모두가 선대들의 특별한 공헌 때문에 후대가 누릴 수 있던 특전 때문이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특권층의 횡포에 맞서 민주적 평등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헌신했던 사람들의 후예가 이제 새로운 특권층으로 군림하게 된다면 그런 자가당착이 없고 망자들에 대한 그런 모독이 없을 것이다.
민주화 운동 유공자들이나 독립운동 유공자들이나 마찬가지로 싸우다가 희생당한 당자들은 지기들의 직계 후손들이 특별히 잘 살기 위해 그런 헌신적 투쟁을 감수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장학금이라면 몰라도 시험에서 가산점이라는 의족에 의지해서 살도록 해 주는 것은 길게 보아 독립이나 민주화 투사의 후손들에게 좋은 일도 아니다. 그들의 자립 의지와 발전 가능성을 훼손하는 결과를 가져와 사회에서 항구적으로 소외 당하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나라와 사회를 위해 헌신한 영령들이 진정으로 기뻐할 보상은 그들이 갈구했던 독립이나 민주화가 성취되었다는 것이지 자신들의 공적을 팔아 후손들이, 때로는 입양까지 하면서, 특전을 누리게 되었다는 사실이 아닐 것이다.
이번 기회에 생각해 봐야 할 일 또 한 가지는 5·18 희생자들을 단순 희생자들과 ‘민주화 유공자’로 구분해서 등록 받는 일이다. 희생자의 가족으로서 도움은 필요하지만 민주화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것은 아닌 사람들이 많이 있으며 도움은 필요해도 자기들이 ‘투사’로 알려지기를 원치 않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납세자인 국민이 알고 싶어 하는 것은 보상 받는 사람들이 어떤 경위로 보상 받을 자격을 갖게 되었는가 이지 비밀로 지켜져야 할 그들의 사생활을 엿보자는 것이 아니다. 납세자인 절대다수의 일반 국민들 입장에서 던지게 되는 또 다른 질문은 시간이 흐르면 유공자수가 줄기 마련인데 왜 급속하게 늘어나는가 하는 것과 연고자들이 많은 광주에서 이뤄지는 유공자 자격심사가 믿을 만한 것인가 하는 것이다.
5·18 성역화의 문제점
정계 거물급 인사들이 대거 5·18 유공자 명단에 포함되어 있다는 소문이 돌고 여권 총수 격인 어떤 인사는 자기는 광주에 가지도 않았는데 유공자 증을 받았다는 고백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들은 그러한 상황을 해명하고 잘못을 바로 시정하려 하기는 고사하고 유공자 명단 공개를 촉구하는 동료 의원들이 5·18을 ‘모독’한다고 호통을 치며 제명까지 요구하고 나서니 참으로 민망한 일이다.
야당들까지 그 어처구니없는 소동에 말려들어 발언자들을 윤리위원회에 회부하여 제명결정까지 했다니 민주화 투사들의 원혼들을 조롱하고 모독하는 사람들이 과연 누구인지 묻고 싶다. 국회의원들의 말이 설사 거칠고 부적절했다 하더라도 발언을 이유로 제명을 한다면 이 나라에서 표현의 자유, 양심의 자유는 어떻게 되는 것이며 이 나라에서 어느 누가 무슨 일과 말을 자유롭게 할 수 있을 것인가?
자유민주 국가인 이 나라 국민의 대변자이고 입법기관인 국회의원들이 지켜내야 할 최고의 가치들은 무엇이고 섬기는 신은 누구인가? 5·18을 이야기할 때 그들이 진정으로 걱정하는 것이 광주를 포함한 대한민국 전체 국민의 치유와 안녕과 화합인가 아니면 자기들의 잘못은 가리고 표를 얻기 위한 얄팍한 계산에서 국민을 더욱 더 분열시키자는 것인가? 이제 대통령까지 직접 나서서 5·18을 성역화 하며 진정한 유공자가 누구인가를 가리자는 요구를 “5·18 민주화운동을 왜곡하고 폄훼하는 것이고” “우리 민주화 역사와 헌법 정신을 부정하는 것’이라고 호통을 치며 국회의원들의 표현의 자유와 3권 분립의 원칙조차 무시하니 민주주의란 무엇이고 누가 진정한 민주화 투사들의 혼령을 모독하고 헌법 정신을 부정하는 것인가?
민주화는 우리의 숙원이었고 값비싼 대가를 치르며 얻어낸 귀중한 결실이다. 하지만 참여민주주의가 확산되면서 우리는 이성보다는 격정, 멀고 긴 안목의 국민적, 국가적 이익 관리 보다는 코 앞에 아른거리는 작은 금전적 이익이나 권력의 유혹에 사로 잡혀 보다 큰 가치들이 훼손되는 것을 방치하지 않았는가 반성해 볼 일이다.
진정한 참여민주주의는 바로 우리 모두가 바라는 이상이지만 참여민주주의는 백지장 한 장 차이로 나치 전체주의 사례에서 보았듯이 추악한 민중독재로 변질될 수 있다. 광주 민주화운동은 군부 독재에 맞서 싸우겠다는 명분으로 일어났고 ‘촛불시위’는 ‘제왕적 대통령’의 ‘권력 남용’을 용서하면 안 된다는 취지에서 대통령 탄핵이라는 우리 역사 초유의 사태까지 빚어냈다.
그런데 그 이름들이 지금 대통령이 행정부, 입법부, 사법부 모두를 무시하고 그 위에 군림하며 표현과 양심의 자유, 언론의 독립, 법 앞에 평등 등 민주주의의 기본 가치들을 무시함은 물론 역사적 사건의 의미까지 대통령 말씀 한마디로 규정짓고 뒤집을 수 있다는 식의 독단적 권력 행사를 정당화 하는 구실로 내세워지고 있다.
어렵게 일궈낸 우리의 참여민주주의는 벌써 대중독재 단계를 넘어 부패한 전체주의식 일당독재, 일인독재 체제로 변질되고 있는 것이 아닌지 살펴야 할 일이다. 역사에 대한 이런 농단이 어디 있고 5·18 망령들에 대한 이런 모독이 어디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