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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수부대가 체험한 광주 5·18

2019.06.06 11:16

oldfaith 조회 수:361

공수부대가 체험한 광주 5·18



[김용삼, "공수부대가 체험한 광주 5·18," 미래한국, 2017. 5. 31, 62-68쪽; 전 월간조선 편집장.]


전두환 전 대통령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1980년 5월의 광주는 이제 역사가 아닌 신화가 되었다”고 썼다. “역사란 승자(勝者)의 기록”이라는 잠언처럼 한 시절 ‘내란’으로 확정판결까지 받았던 5·18이 어느 새 ‘민주화를 위한 노력의 일환’에서 ‘민주화 운동’으로 그 격이 달라졌다. “‘폭도’로 지목됐던 시민들이 소총과 기관총, 수류탄과 장갑차로 무장을 하고 국군을 공격한 사건이 어떻게 민주화 운동이 되는가?” 하고 문제 제기를 하면 이제 ‘정치적 금치산자’로 몰릴 판이다.


필자는 현역 기자 시절(월간조선 기자) 김영삼 대통령의 지시에 의해 제정된 ‘5·18 특별법’에 의해 시작된 ‘12·12 사건 및 5·18 사건 수사기록’ 전량을 입수하여 첫 페이지부터 마지막 페이지까지를 다 보았다. 당시 검찰 수사기록은 117권, 총 분량이 무려 14만 페이지, 용달차 1대 분량에 달하는 엄청난 양이었다.


그 중 상당수가 2011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이 자료는 피고인과 참고인들의 증언 및 신문, 진술, 사건 진행과 관련한 참고자료, 시위 진압을 위해 투입됐던 군 지휘관들의 증언 등으로 가득 차 있다. 이 수사를 통해 일부 민간인들의 주장처럼 광주에서 집단 발포 명령자나 지금까지 공개된 사망자 이외의 추가 사망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수백 명이 죽고 다친 시민들도 할 말이 많겠지만, 상부의 명을 받고 현장에 출동하여 밤새도록 시위대와 육탄으로, 혹은 총격전으로 격렬하게 맞섰던 진압군들도 할 말이 많았을 것이다. 검찰 수사기록 중에서 단연 눈길을 끌었던 자료는 상부의 명을 받고 5월 20일 광주로 출동했던 박종규 중령(당시 3공수여단 15대대장)의 체험기였다.


▲ "폭도는 우리 동포다. 허벅지 아래만 때려랴", "머리를 때리지 말라", "과격한 진압을 삼가라"는 말은 폭도의 돌맹이에 맞아 죽으라는 지시나 다름 없었다.


5월 20일 광주로 출동


육군본부가 펴낸 <역사자료>에 수록되었다가 검찰수사 과정에서 증거물로 제출된 박종규의 체험기는 진압군으로 참여했던 군 지휘관의 기록이라는 점에서 지금까지 광주 시민들에게 ‘증오의 대상’으로 지목되어 왔던 공수부대는 어떤 상황에 처했었는가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박종규 중령이 상부의 명령을 받고 3공수 15대대 병력을 이끌고 광주로 출동한 것은 1980년 5월 20일이었다. 당시 15대대는 배낭(륙색) 속에 내의 2벌, 예비 전투화, 치약·칫솔, 양말, 모포를 넣은 단독 군장으로 차량에 탑승했다. 이날 출동 때는 개인당(장교는 제외) 가스탄(최루탄) 1발과 지역대당 미제 E-8 발사탄(다연발 최루탄) 1세트씩, 그리고 진압봉 1개씩을 추가 지급했다.


열차 안에서 건빵 1봉지씩으로 점심식사를 대신한 15대대는 광주에 도착하여 광주시내 양동다리에서 광주고속에 이르는 광주의 남쪽 주요 도로에 배치됐다. 비가 오는 가운데 상황은 점점 심각해져 수만 명의 시위대에게 공수부대가 포위 고립되기 시작했다. 최세창 3공수여단장은 시민들의 저항이 격렬해져 군중들에게 포위 고립될 위기에 처한 여단 산하 11·12·13·15대대를 광주역 앞으로 집결하도록 지시했다.


15대대는 광주역으로 집결하는 데 별 어려움이 없었지만 11·12·13대대는 시위대에 완전 포위되어 돌과 몽둥이 공격을 받자 화염방사기, 가스분출기로 겨우 통로를 열고 쫓기듯 광주역으로 왔다. 그때까지 병사들은 아무 것도 먹지 못하고 계속 시위대에 쫓겨 다녀야 했다.


박종규 대대의 임무는 광주고속과 광주역을 잇는 도로의 방어였다. 그런데 캄캄한 밤에 느닷없이 도청 쪽에서 버스 한 대가 터덜터덜 굴러와 광주역 앞 분수대를 들이받고 전복됐다. 액셀러레이터와 운전대를 일정 속도와 방향에 묶어놓고 기어를 1단에 넣은 후 클러치를 떼면서 사람이 뛰어내려 돌진시키는 ‘무인(無人) 차량 공격’이 시작된 것이다.


무인 차량 공격과 더불어 각 방면에서 시위대의 몽둥이 공격, 투석 공격, 갈고리와 곡괭이 공격, 차량 돌진이 이어졌다. 시위대는 공수단을 제압하기 위해 함성을 지르며 전진했다. 출동 당시 1인당 1발씩 지급된 최루탄은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이날 밤 상황을 요약하면 1500여 명의 공수부대가 광주역에서 수만 명으로 불어난 시위대에 포위 고립되어 몽둥이와 돌, 갈고리와 곡괭이로 공격당하고 차량 돌진 공격까지 당하는 상황이었다.


▲ 15대대는 산을 타고 행군하던 중 시위대가 군용차량에 가득 타고 카빈 소총을 흔들며 전속으로 질주하는 모습을 목격했다. 이제 시위대가 총기로 무장하고 있다는 사실이 확인된 것이다. / 사진출처 : 대한뉴스 제 1284호


돌진 차량에 들이받혀 사망한 공수부대 중사
  
이 참혹한 상황에 처한 3공수 15대대장 박종규는 말한다. “폭도도 우리 동포다. 허벅지 아래만 때려라”, “머리를 때리지 말라”, “과격한 진압을 삼가라”는 말은 폭도의 돌멩이에 맞아 죽으라는 지시나 다름없었다고. 그날 밤 계엄군과 시위대의 격돌은 민주시민 항쟁의 차원이 아니라 죽이고 죽이려는 감정의 대립이었다고. 영남과 호남의 대립이 아니라 20대 젊은이들의 난투극이었다고….


수십 차례의 파상공격(돌, 몽둥이)이 이어졌고, 그 사이사이에 간헐적 차량 공격이 계속됐다. 밤 10시가 넘었을 때 갑자기 “차 온다!”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12대대 쪽에서 시속 100㎞의 속도로 라이트를 켠 화물차가 질주하여 분수대를 돌아 달아났다. 이때 6대대 운전병이 돌진하는 화물차에 들이받혀 사망했다. 시위대는 무인 차량 공격이 효과가 없자 유인(有人) 돌진 공격으로 전환한 것이다.


드디어 박종규의 15대대를 향한 유인 차량 공격이 이어졌다. 화물차 한 대가 엄청난 속력으로 돌진해 오고 있었다. 당시 공수대원들은 실탄을 소지하지 않았다. 유일한 실탄 소지자는 대대장 박종규 중령의 45구경 권총 실탄 14발뿐이었다. 15대대의 방어 대형을 향해 화물차가 미친 듯이 돌진해 오자 박종규는 권총을 꺼내 탄창을 장전한 다음 노리쇠를 후퇴시키고 타이어를 겨냥하여 방아쇠를 당겼다. 그러나 총알은 빗나갔고 돌진 차량 운전사는 분수대를 들이받고 정지되어 12대대 병력에 체포되었다.


밤 11시, 또 다시 군중 속에서 헤드라이트를 켠 2톤 트럭이 돌진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 차량은 박종규 대대장을 겨냥하여 돌진해 왔다. 당시 정황을 박종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발이 아스팔트에 붙어서 떨어지지 않았다. 차는 이미 맹렬한 속도로 3m 앞에 다가오고 있었다. 그 짧은 0.1초 동안 나는 부모님 생각이 났다. 집안 생각도 났다. 그러나 가장 끝까지, 죽음 앞에서 생각한 것은 배고파 지친 우리 대대 병력이 내가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 이 난국을 정리해 나갈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이제 죽음은 나의 행동에 달려 있거나 나의 선택에 달려 있는 게 아니고, 나의 운명에 달려 있었다. 앞뒤의 선택은 이미 늦었고, 내가 살기 위한 선택은 좌나 우 둘 중의 하나였다.”


박종규는 오른쪽으로 뛰어 넘어져 간신히 돌진 차량을 피했지만 진압 대열에 서 있던 대원 두 명이 차의 뒷바퀴에 끌려가면서 부상을 입었고, 3공수 16대대 소속의 정관철 중사는 트럭 앞부분에 들이받혀 두개골 골절상을 입어 현장에서 사망했다.


김완배 중령(3공수 12대대장)의 증언에 의하면 이때 공용터미널 방향에서 돌진한 차량에 의해 중상을 당한 공수단 하사 2명과 중사 1명을 전남대로 후송했다가 다음날인 5월 21일 헬기로 전교사로 공중 후송했다. 김완배 대대장은 이때의 차량 돌진 공격 이후 계엄군이 공격적인 자세로 돌변했다고 증언한다.


돌진 차량이 분수대에 부딪혀 멈추자 우르르 몰려간 군인들이 운전사를 끌어내렸다. 감정에 북받친 대원들이 진압봉으로 그를 두들겨대기 시작했다. 운전사는 말 한마디 못 하고 맞고 있었다. 박종규는 “때리지 마! 때리지 마!” 하고 소리를 질렀다.


전남대 정문 앞에서 공방전 벌여


그러나 그것은 전장(戰場)에서 사격을 중지시키는 것만큼 들리지 않는 대대장의 명령이었다. 박종규가 고함을 지르자 모두들 자기 위치로 갔고, 마지막 병사 하나가 운전사의 머리를 발로 짓이기고 돌아갔다. 운전사는 축 늘어져 뻗어 있다가 잠시 후 툭툭 털고 일어나 조용히 도망갔다. 키는 160㎝ 정도, 몸무게 50㎏ 정도의 호리호리한 몸매에 20세 전쯤 되는 청년이었다. 24시가 되어 시위가 뜸해지자 15대대 병력은 전남대로 철수했다. 그때까지 저녁식사를 하지 못했던 대원들은 전남대로 철수하여 밤늦게 라면으로 허기를 때웠다.


5월 21일 오전 9시부터 전남대 정문 앞에서 시위대들의 파상적인 공격이 시작됐다. 정문을 둘러싸고 공수부대와 시위대 간에 밀고 밀리는 접전이 수십 차례 벌어졌는데, 그때마다 E-8 발사 연막탄이 유용하게 활용되었다. 그러나 휴대한 발사통은 20여 개에 불과했다.


시위 군중은 장갑차와 군용차량으로 무장하고 있었는데, 차량에는 ‘전두환 물러가라’고 빨간 페인트로 글씨가 쓰여 있었다. 시간이 갈수록 시위 군중이 늘어나 이제 전남대 우측 능선의 철조망을 따라 침투를 시도했다.


병력은 지치고 시위대의 시위는 점점 조직화되면서 부대의 와해가 목전에 다가오고 있었다. 시위대 해산에 위력을 발휘했던 E-8 발사통도 다 떨어져 가고 있었다. 광주 출신 장교가 마이크로 “나도 고향이 광주입니다” 하고 호소했지만 막무가내였다. 이때 “광주 출신”이라는 사실을 밝히고 시위대와 대화를 시도한 사람은 3공수 12대대장 김완배 중령이었다.


다급한 상황에서 상무대로 갔던 여단장이 전화로 “전남대에서 철수하여 광주교도소를 경비하라”는 지시를 했다. 상황이 심각해지자 군 지휘부에서는 광주교도소만이라도 지켜야 한다는 결정을 내린 것이다. 만약 그때 전남대에서 철수하지 않았다면 3공수여단은 뿔뿔이 흩어져 무등산으로 도망가야 했을지도 모른다. 11·12·13·16대대가 먼저 출발하고, 15대대가 마지막까지 전남대를 지키다가 철수했다.


15대대가 후문을 막 빠져나가는 순간, 철교 부근의 시위 군중 속에서 “탕탕” 하는 총소리가 들렸으나 거리가 멀어 확인할 수 없었다. 15대대는 군용 차량에서 내려 도보로 광주교도소까지 이동했다. 차량으로 이동할 경우 시위대의 표적이 될 뿐만 아니라, 차량 전복 등으로 대형 피해가 예상되었기 때문이다.


15대대는 산을 타고 행군을 했다. 좁은 길을 따라 행군하던 중 시위대가 군용 차량에 가득 타고 카빈 소총을 흔들며 전속으로 질주하는 모습을 목격했다. 이제 시위대가 총기로 무장하고 있다는 사실이 확인된 것이다.


광주교도소에서 무전병 저격 당해


오후 4시쯤 되어서야 교도소가 보였다. 광주교도소는 31사단 병력 중 1개 대대가 방어하고 있다가 3공수여단과 교대하기로 되어 있었다. 15대대의 선두가 광주교도소 정문에 들어서고 대열의 중간쯤에서 무전병을 대동하고 이동하던 박종규 대대장이 31사단 대대장과 악수를 나누고 돌아서는 순간, “탕!” 하는 총성과 함께 무전병이 쓰러졌다.


대학생 4명이 탈취한 군용 지프차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사격을 가한 후 도주한 것이다. 그들은 권총을 차고 배낭을 메지 않은 사람이 무전병을 대동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지휘관이란 사실을 알고 저격을 한 것이다. 총알은 박종규 대대장의 바로 옆에 있던 무전병의 왼팔을 관통했다. 무전병은 다행히 광주교도소 응급실에서 소독약과 소독솜 몇 장으로 응급치료를 했다.


3공수여단 병력은 광주교도소를 ㄷ자 형으로 방어하기 위해 11·12·13·15대대가 방어 편성을 하고, 16대대를 예비로 두었다. 시위대의 대량 공격에 대비하여 교도소 담장에 이르는 도로를 봉쇄하고, 도로 차단을 위해 2.5톤 트럭을 가로질러 세워두었다.


양쪽 산에는 경계병을 배치했으며, 교도소 옥상에서 전면으로 공격할지도 모를 시위대를 감시하도록 했다. 교도소장은 “광주교도소 내에는 반공사범(소위 북괴 간첩)이 많이 있어 이들이 탈출할 경우 심각한 상황이 전개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대대장 중 하나가 불쑥 여단장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 “여단장님 발포해도 됩니까?”

여단장은 교도소장에게 “현행 규정상 외부 침입자가 있을 경우에 어떤 대응책이 가능한가?” 하고 물었다. 교도소장은 “담을 넘는 자에게는 현행 규정상으로도 발포하게 되어 있다”고 답했다.


그날 밤 두 번의 야간 비상이 있었다. 한 번은 아주 가까이서 총성이 들리면서 시위대의 침투가 임박했다는 첩보에 따라 전원 전투 배치를 했고, 한 번은 12·13대대 지역 전면으로 시위대가 접근하고 있다는 첩보에 의한 비상이었다. 다행히 별다른 충돌 없이 밤이 지나갔다.


5월 22일. 라디오와 상무대 첩보에 의하면 시위대는 광주 시내를 완전 장악했다고 한다. 광주시내 곳곳에 있는 건물에서 시커먼 연기가 하늘로 치솟고, 전남대에서도 불길이 치솟았다. 3공수여단이 미처 가져오지 못한 매트리스를 모아 놓고 시위대가 불을 지른 것이다. 가끔 소방 사이렌이 요란하게 울리기도 했다. 교도소 주변 산에 총을 든 젊은이들이 발견되어 적의 침투인 줄 알고 쫓아갔으나 다행히 상무대 병력이었다.


이날 낮에 무장을 한 시위대가 백설표 설탕 광고판 방향에서 수차례 공격을 감행했다. 가만 앉아 있다가는 당할 것 같아 12·13대대가 시위대를 공격하여 제압했는데, 이 과정에서 공수대원 여러 명이 부상을 당했다.


이상휴 대위(당시 3공수 13대대 9지역대장)의 ‘광주사태 충정작전 소감문’에 의하면 당시 광주교도소를 공격한 시위대가 장갑차(APC)를 앞세우고 총을 난사하면서 돌진해 오자 대대 특공조가 앞으로 전진하여 근접 전투를 해서 후퇴시켰다고 증언한다.


광주비행장으로 철수


12대대장 김완배 중령의 증언에 의하면 이때 광주교도소를 공격하러 왔던 차량 중 한 대가 도망가지 않고 멈춰 섰다. 수색대가 다가가 보니 운전사가 다리에 총상을 입고 지프 앞좌석에 앉아 있어 생포했는데, 그는 3개월 전 광주교도소에서 출옥한 사람이었다.


5월 22일 12·13대대가 파쇄공격을 한 후 오후 늦게 비행기에서 뿌려진 삐라(전단) 한 장을 주워 보았다. 폭도들에게 경고하는 내용으로, 그날 처음 계엄사령관 명의로 자위권 행사가 불가피함을 알리는 경고문이었다. 그날 밤은 별다른 충돌 없이 지나갔다.


5월 23일 광주교도소 방어임무를 20사단에 인계하고 3공수여단은 광주비행장으로 철수하라는 명령이 내려왔다. 먼저 20사단 1개 연대가 광주교도소에 도착했다. 총기와 장갑차로 무장한 시위대를 피해서 광주비행장까지 이동해 가는 것이 큰 문제였는데, 15대대가 첨병 임무를 받았다.


광주 중심을 피해서 외곽으로 행군로를 선정하고 출발했다. 비교적 별다른 충돌 없이 송정리 부근에 도착했을 때 헬기에서 행군을 지휘하던 부여단장으로부터 다급한 무전 연락이 왔다. 행군 전면에 아무 이상이 없느냐는 것이었다. 박종규 대대장은 “별일 없이 행군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부여단장은 “도로상에 폭도들이 TNT를 매설했다는 첩보가 있고, 11여단이 당했으니 조심하라”는 메시지였다. 첨병에게 그와 같은 첩보를 전달했다. 11여단은 철수 도중 진압군 간에 오인으로 인한 상호 교전이 벌어져 대대장의 팔이 달아나고, 11여단 작전장교가 즉사했다.


3공수여단은 별다른 충돌 없이 광주비행장에 도착했다. 15대대는 격납고에 바람막이를 치고 들어가 휴식을 취했다. 시위대의 공격에 대비하여 공군의 경계가 강화되었고, 정문에는 비행기 화재 시 소화 작업을 하는 소화차량이 배치되었다. 이 소화차량에서 내뿜는 가스에 맥주를 놓으면 순식간에 얼어버릴 만큼 강력한 것이어서, 시위대가 침투하는 곳에 뿌리면 사람이 그대로 냉동되어 버린다고 한다.


각 초소에는 실탄이 지급되어 위험분자가 접근하면 발포하라는 지시가 있었다. 특전사령관 정호용 소장이 격려차 광주에 내려와 격납고 생활을 시찰했다. 정호용 장군의 강력한 주장과 공수단장들의 적극적인 지지에 의해 5월 26일의 광주탈환 작전이 준비되었다.


각 여단별로 시위대가 점거한 주요 건물에 대한 탈환 임무가 주어졌고, 광주의 핵심지점인 전남도청 탈환은 임수원 중령이 지휘하는 3공수 11대대에게 부여되었다. 5월 27일 새벽 4시에 전남도청을 덮치기 위해 전날 밤 23시부터 11대대가 이동을 개시했다. 나머지 대대는 비행장에서 대기했다.


새벽 2시경 별다른 충돌 없이 전남도청 가까이에 도착했다는 보고가 들어왔고, 오전 5시경 작전의 성공 보고가 들어왔다. 11대대의 인명 피해는 1명 전사, 시위대 1명 사살, 나머지 시위대는 생포했다. 간단하게 전남도청 점령이 완료된 것이다. 당시 상황을 박종규는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무장한 폭도가 200여 명. 그들은 모두 죽음을 불사하는 극렬분자들이었다. 거기에 수없이 쌓인 TNT, 수류탄, 각종 무기, 자기들끼리 회수해 쌓아 놓았다는 수천 정의 총기.

그 위험 속에 단 2명의 희생만으로 탈환에 성공한 것은 엔테베 작전에 못지않은 자랑거리였다. 죽은 11대대 병사는 2층에서 폭도가 쏜 총에 머리를 맞고 즉사했다고 전해 들었다.”


1980년 당시 군이 작성한 ‘충정일일 주요 사항’(1980년 6월 11일) 자료에 의하면 5월 17일 아침부터 5월 27일 진압이 될 때까지 광주 민주화운동 기간 동안 시민들은 소총 4747정, 기관총 49정, 실탄 29만 발, 수류탄 552발을 탈취했다. 또 6월 11일 현재 인명 피해는 다음과 같이 집계하고 있다.


시민들의 오발로 인한 사망자도 다수 발생


시민과 군의 충돌 과정에서 시민 158명이 사망하고 127명이 부상했지만, 군인과 경찰도 27명이 사망하고 253명이 부상을 당했다. 또 사망자들의 시신을 검시한 결과 사인(死因)이 총상, 자상(刺傷·대검 등에 찔려 사망), 타박사(打撲死·몽둥이 등에 맞아 사망), 차량사(車輛死) 등으로 분류되었다. 차량사는 박종규 중령의 수기에서 소개했듯이 시위대의 무인 돌진공격, 유인 돌진공격에 의해 트럭이나 버스에 들이받혀 사망한 공수부대원, 경찰관들의 죽음이다.


사인 중 M16에 의한 사망이 96명으로 가장 많고, 카빈 및 기타(M1 혹은 기관총)에 의한 사망자도 35명이나 된다. 당시 광주에 투입된 계엄군은 M16 소총으로 무장하고 있었고, 시민들은 경찰·예비군 무기고에서 탈취한 카빈·M1 소총과 기관총, 수류탄 등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이러한 사인 분석은 5·18 당시 계엄군에 의한 총격뿐만 아니라 시민들이 소지하고 있던 총에 맞아 사망한 사례도 다수 존재했음을 증명한다.


광주에서 무장 시위대로 활동했던 김유○ 씨의 피의자 신문조서에 의하면 김 씨는 아세아자동차 공장에서 장갑차 탈취, 나주군 남평지서 무기고에서 무기 탈취에 가담했으며, 자신이 휴대했던 총기로 오발사고를 낸 사실을 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있다.


“그날(5월 22일) 17시경 전남대학교 앞에서 차가 정차할 때 도로가에 군중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저의 옆에 탔던 25세 청년이 총을 2발 쏘았는데 50세 가량 된 남자가 쓰러지는 것을 보고 제가 놀라서 ‘총을 쏘지 말라’고 소리를 지르다 저도 그만 1발 오발을 한 것이 35세 가량 된 청년 옆구리에 맞았습니다. 차에 탔던 9명이 내려가 총에 맞아 쓰러진 2명을 저희들의 차에 싣고 전남대학병원 응급실에 입원시켰습니다. 저희들은 다시 차를 타고 시가지를 돌아다니며 시위를 하다 19시경 도청 앞 광장에서 학생들이 총을 반납하라고 하여 총과 실탄을 반납했습니다. 백운동 집으로 돌아오면서 병원에 가서 총 맞은 사람의 상처를 알아보았더니 50대 중년은 사망했고, 35세 가량 청년은 치료 중이나 중태란 말을 듣고 집으로 돌아와 잠을 잤습니다.”


이상휴 대위(당시 3공수 13대대 9지역대장)의 ‘광주사태 충정작전 소감문’은 충장로에서 시위 진압 도중 경남 번호판이 부착된 차량 기사의 사망 장면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얼마간 시간이 흐른 뒤 광장 중앙에 8t 트럭이 한 대 서 있고 사람이 몰려 웅성거렸다. 알아보니 석축용 경치석이 실려 있었고 경남 번호판이 부착된 차량이었다. 폭도들이 운전사, 조수를 끌어내려 때리고 발로 차고 밟고 하여 두 사람이 현장에서 죽었다. 갑자기 차에 불이 붙었다. 검은 연기가 하늘을 덮었다. 타이어 터지는 소리에 시민과 폭도들은 괴성을 질렀다.”


“과도정부 전복을 위해 극렬투쟁”


김유○ 씨가 진술한 오발사고로 사망한 50대 남자를 비롯하여 경남 번호판을 단 차량 운전기사와 조수도 망월동에 ‘의로운 죽음’으로 묻혔을 것이고, 민주화 유공자로 인정되어 파격적인 보상과 유가족들에 대한 광범위한 혜택이 주어졌을 것이다.


당시 광주에서는 시민·학생들이 소총과 기관총, 장갑차와 수류탄, 그리고 화순 탄광에서 탈취한 엄청난 양의 다이너마이트(TNT)로 무장하고 계엄군과 대치하고 있었다. 왜 이처럼 격렬하고 극단적인 투쟁을 택했던 것일까. 1980년 5월 27일 새벽 전남도청에서 체포된 학생수습대책위원회 부위원장 김종배(당시 조선대 무역학과 3학년)는 검찰 조사에서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저희들이 총을 들고 무장한 채 광주시내 일원을 검거 장악하고 정부에서 선뜻 받아들여질 수 없는 ‘비상계엄 해제’ ‘김대중 석방’ ‘과도정부 퇴진’ 등의 정치적 요구 사항을 계속 관철시키기 위해 계엄군과 대치하고 있으면 광주사태가 전 국민의 동정을 받아, 또는 전국에 있는 반체제 재야인사, 대학생 및 불순세력의 책동으로 인해 전국적인 규모로 확대되어 나갈 것이고, 외국의 여론도 민주주의, 인도주의 차원에서 과도정부에 대단히 불리하게 전개됨으로써 4·19의 선례에 따라 과도정부는 전복될 것으로 믿었습니다.”


박종규 대대장은 자신의 체험기 결론 부분에서 광주사태의 진상을 규명하기 위한 자신의 의견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억울한 희생자가 보상을 요구하며 팔을 걷어붙일 때, 총기를 잘못 다루다가 사람을 죽인 폭도는 떳떳이 나의 잘못도 있다고 침묵을 깨야 한다. 군인을 매도하는 광주시민의 함성이 있을 때, 나를 치어죽게 하려다 달아난 지금 30이 되었을 청년은 나 같은 합리적이고 선량한 국민의 군인도 있었다고 설득해야 할 것이다. 어떻게 민간인을 총으로 쏠 수 있느냐고 울부짖는 사람 앞에 광주교도소에서 나를 저격한 대학생은 자신이 총을 쏘았다고 자백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진정한 광주사태의 규명이다. 가해자(?)의 설명이 피해자의 절규에 파묻혀 버려서는 안 될 것이며, 극도의 혼란한 상황에서 의식 없이 쏘아댄 유탄에 맞아 불구가 된 어린이의 슬픔을 군인이 조준하여 사살한 양 붙들고 늘어져도 한풀이이지 사실의 규명이 아니다. 피해자의 많고 적음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보다는 어떻게 죽었는가 하는 것이 중요하다.”


박종규는 광주에서 사망한 민간인의 죽음 못지않게, 자신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국가의 명을 받고 광주에 와서 시위 진압 도중 사망한 군인의 죽음도 기억해 달라고 절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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