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성신문의 사설 '시일야방성대곡'은 유명한 제목에 비해 전체 내용을 아는 사람이 적다. 제목은 대대로 이야기되지만 전문(全文)은 널리 읽히지 않는다. 읽어도 제목만큼 분명하지 않다. 당시 지식인이 아니라면 이해하기 어려운 앞머리 내용 때문이다.
사설은 을사늑약에 서명한 조정 대신을 두 차례 '개돼지만도 못하다(豚犬不若)'고 격하게 비난한다. 그런데 서론에 등장하는 이토 히로부미에 대한 세 차례 호칭이 이상하다. '이토 후(侯)'라며 후작 존칭을 붙였다. 내용도 온건하다. 이토 후작이 동양 평화를 위하는 줄 알고 모든 이(官民上下)가 환영했는데 을사늑약이 웬 말이냐고 원망한다. '모든 이가 이토 후를 환영했다'는 시점은 한 해 전인 1904년 3월. 일본이 러일전쟁을 일으켜 한반도를 먹어 삼키던 때였다.
당시 황성신문은 민족 언론의 구심점이었다. 식견이 뛰어난 지식인의 집합소였다. 이런 태도는 언론만이 아니었다. 고종은 이때 방한한 이토에게 대한제국 최고 훈장인 '대훈위 금척대수장'을 하사했다. 훈공을 치하하면서 영국 빅토리아 여왕, 독일 비스마르크, 청나라 리훙장과 함께 이토를 '근세의 4대 인걸(人傑)'이라며 치켜세웠다. 이토는 고종에게 "동양 평화에 협력한다면 한국의 산하가 횡포한 열강의 소유가 되지 않도록 한국의 아픔을 일본의 아픔으로 여기며 함께 대처하겠다"고 답했다.
일본에 당할 만큼 당한 때였다. 10년 전 일본군에게 경복궁이 유린당했다. 동학 농민들이 일본군에게 학살됐다. 이듬해 궁궐에서 왕후가 일본군에게 살해당했다. 그 이듬해엔 왕실이 러시아 공관에 망명하는 치욕을 겪으면서 일제로부터 겨우 사직(社稷)을 보전했다. 그런 나라의 황실과 당대 지식인들이 이토의 '동양 평화' 요설(妖說)에 의지한 것이다.
일본은 '한국을 위해 함께할' 뜻이 없었다. 만한(滿韓) 교환론은 이전부터 이토의 지론이었다. 러시아가 만주를 먹는 대신 일본이 한국을 먹는다는 타협안이다. 러시아가 이를 거절하자 일으킨 것이 러일전쟁이었다. 이토가 요설을 부리다 귀국한 직후 일본은 한국을 보호국으로 만드는 내용의 '대한제국에 대한 방침'을 결정했다. 을사늑약은 1년 반 뒤 이루어졌다. '동양 평화'를 믿고 이토를 칭송하던 당대 한국 지식인들은 그 배신감에 울었다. '이날, 목 놓아 통곡(是日也放聲大哭)'한 것이다.
사실 '믿었다'보다 '믿고 싶었다'는 표현이 옳다. 구한말 지식인은 바보가 아니었다. 역사를 통해 일본의 난폭한 본성을 알았고 견문을 통해 불리하게 돌아가는 세태도 알았다. 하지만 한국을 도와줄 곳이 없었다. 중국과 러시아는 패배자로 전락했고 미국과 영국은 일본 편에 섰다. 일본의 자비와 선의를 믿는 것, 본성에 눈을 감고 요설에 기대는 것이 당장 편안했다. 믿을 근거가 있어서가 아니라 믿고 싶어서 믿은 것이다. 그 배후에 일제에 대한 누적된 공포가 있었다.
오래 당한 사람일수록 상대의 작은 호의(好意)에 쉽게 감동한다. 북한 김정은이 군사분계선을 넘어 문재인 대통령의 손을 잡았을 때, 그 손을 잡고 다시 북으로 건너갔을 때, 도보 다리의 환담이 새소리로 전해져 올 때 일시에 녹아내린 우리의 감정도 사실 그런 것일 수 있다. 이 감정의 무장해제 상태에서 우리는 판문점 선언의 '평화 공존' 발언을 들었다. 기승전결이 잘 짜인 12시간짜리 영화였다. 김정은은 이 한 편으로 한국에서 '예의 바른 지도자'가 됐다. 언제든 쓰레기가 될 수 있는 문서상의 '비핵화 약속'이 아니라 북한에 대한 한국 국민의 인식 변화가 더 극적이다. 이번에도 믿을 근거가 있어서가 아니라 믿고 싶어서 믿는 것이다. '민족 동질성'과 함께 '북핵 공포'가 배후에 있다. 공포가 더 큰 작용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당신은 전쟁과 파멸을 믿고 싶은가"라는 반론이 따라붙는다. 한국에 살면서 전쟁을 바라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근거 없는 믿음과 정서적 무장해제야말로 전쟁과 파멸을 부른다는 믿음은 있다. 북핵 폐기가 실현될 때까지 김정은의 '평화 공존' 주장은 이토의 '동양 평화' 주장만큼 요설이라는 믿음도 있다. 현란한 정치쇼와 말잔치는 '핵 폐기'라는 본질을 흐리려는 시도라는 주장도 믿는다. 6·25 남침, 여객기 폭파, 서해 도발, 천안함 폭침, 연평도 포격…. 70년 동안 누적된 북한에 대한 우리의 긴장과 감정은 북핵의 완전한 폐기 후 풀기 시작해도 늦지 않다.
사설은 을사늑약에 서명한 조정 대신을 두 차례 '개돼지만도 못하다(豚犬不若)'고 격하게 비난한다. 그런데 서론에 등장하는 이토 히로부미에 대한 세 차례 호칭이 이상하다. '이토 후(侯)'라며 후작 존칭을 붙였다. 내용도 온건하다. 이토 후작이 동양 평화를 위하는 줄 알고 모든 이(官民上下)가 환영했는데 을사늑약이 웬 말이냐고 원망한다. '모든 이가 이토 후를 환영했다'는 시점은 한 해 전인 1904년 3월. 일본이 러일전쟁을 일으켜 한반도를 먹어 삼키던 때였다.
당시 황성신문은 민족 언론의 구심점이었다. 식견이 뛰어난 지식인의 집합소였다. 이런 태도는 언론만이 아니었다. 고종은 이때 방한한 이토에게 대한제국 최고 훈장인 '대훈위 금척대수장'을 하사했다. 훈공을 치하하면서 영국 빅토리아 여왕, 독일 비스마르크, 청나라 리훙장과 함께 이토를 '근세의 4대 인걸(人傑)'이라며 치켜세웠다. 이토는 고종에게 "동양 평화에 협력한다면 한국의 산하가 횡포한 열강의 소유가 되지 않도록 한국의 아픔을 일본의 아픔으로 여기며 함께 대처하겠다"고 답했다.
일본에 당할 만큼 당한 때였다. 10년 전 일본군에게 경복궁이 유린당했다. 동학 농민들이 일본군에게 학살됐다. 이듬해 궁궐에서 왕후가 일본군에게 살해당했다. 그 이듬해엔 왕실이 러시아 공관에 망명하는 치욕을 겪으면서 일제로부터 겨우 사직(社稷)을 보전했다. 그런 나라의 황실과 당대 지식인들이 이토의 '동양 평화' 요설(妖說)에 의지한 것이다.
일본은 '한국을 위해 함께할' 뜻이 없었다. 만한(滿韓) 교환론은 이전부터 이토의 지론이었다. 러시아가 만주를 먹는 대신 일본이 한국을 먹는다는 타협안이다. 러시아가 이를 거절하자 일으킨 것이 러일전쟁이었다. 이토가 요설을 부리다 귀국한 직후 일본은 한국을 보호국으로 만드는 내용의 '대한제국에 대한 방침'을 결정했다. 을사늑약은 1년 반 뒤 이루어졌다. '동양 평화'를 믿고 이토를 칭송하던 당대 한국 지식인들은 그 배신감에 울었다. '이날, 목 놓아 통곡(是日也放聲大哭)'한 것이다.
사실 '믿었다'보다 '믿고 싶었다'는 표현이 옳다. 구한말 지식인은 바보가 아니었다. 역사를 통해 일본의 난폭한 본성을 알았고 견문을 통해 불리하게 돌아가는 세태도 알았다. 하지만 한국을 도와줄 곳이 없었다. 중국과 러시아는 패배자로 전락했고 미국과 영국은 일본 편에 섰다. 일본의 자비와 선의를 믿는 것, 본성에 눈을 감고 요설에 기대는 것이 당장 편안했다. 믿을 근거가 있어서가 아니라 믿고 싶어서 믿은 것이다. 그 배후에 일제에 대한 누적된 공포가 있었다.
오래 당한 사람일수록 상대의 작은 호의(好意)에 쉽게 감동한다. 북한 김정은이 군사분계선을 넘어 문재인 대통령의 손을 잡았을 때, 그 손을 잡고 다시 북으로 건너갔을 때, 도보 다리의 환담이 새소리로 전해져 올 때 일시에 녹아내린 우리의 감정도 사실 그런 것일 수 있다. 이 감정의 무장해제 상태에서 우리는 판문점 선언의 '평화 공존' 발언을 들었다. 기승전결이 잘 짜인 12시간짜리 영화였다. 김정은은 이 한 편으로 한국에서 '예의 바른 지도자'가 됐다. 언제든 쓰레기가 될 수 있는 문서상의 '비핵화 약속'이 아니라 북한에 대한 한국 국민의 인식 변화가 더 극적이다. 이번에도 믿을 근거가 있어서가 아니라 믿고 싶어서 믿는 것이다. '민족 동질성'과 함께 '북핵 공포'가 배후에 있다. 공포가 더 큰 작용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당신은 전쟁과 파멸을 믿고 싶은가"라는 반론이 따라붙는다. 한국에 살면서 전쟁을 바라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근거 없는 믿음과 정서적 무장해제야말로 전쟁과 파멸을 부른다는 믿음은 있다. 북핵 폐기가 실현될 때까지 김정은의 '평화 공존' 주장은 이토의 '동양 평화' 주장만큼 요설이라는 믿음도 있다. 현란한 정치쇼와 말잔치는 '핵 폐기'라는 본질을 흐리려는 시도라는 주장도 믿는다. 6·25 남침, 여객기 폭파, 서해 도발, 천안함 폭침, 연평도 포격…. 70년 동안 누적된 북한에 대한 우리의 긴장과 감정은 북핵의 완전한 폐기 후 풀기 시작해도 늦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