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우정, "이것은 대한민국 법이 아니다," 조선일보, 2020. 7. 29, A30쪽.] → 역사, 제주 4.3사건
국회의원 132명이 제주 4·3사건 특별법 개정안을 27일 발의했다. 개정안은 거대 여당이 지배하는 국회에서 졸속 통과될 가능성이 크다는 점, 그동안 상식으로 통용됐고 사법부가 인정한 한국 현대사의 한 대목을 뒤집었다는 점에서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
제주 4·3사건은 엄청난 비극이다. 죄 없는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상당수가 한국군의 토벌 과정에서 희생된 것도 사실이다. 희생자의 원혼을 위로해야 한다. 생존 부상자를 돕고 후손을 살펴야 한다. 충분치 않지만 이미 실행하고 있다. 불법적 공권력에 희생됐다면 배상도 이뤄져야 한다. 특별법은 그런 정신을 담고 있다. 하지만 개정안이 안고 있는 문제점은 특별법 정신을 크게 훼손할 정도로 중대하다.
첫째 사건의 정의를 뒤집었다. 김대중 정권 때 만든 현행법은 1948년 4월 3일에 제주도에서 발생한 남로당 제주도당의 폭동을 '소요(騷擾)'로 규정하고 있다. 다수가 폭행·협박·파괴 행위를 통해 질서를 망가뜨렸다는 뜻이다. 개정안은 이 문구를 '봉기(蜂起)'로 바꿨다. 중립적인 뜻이지만 역사 서술에선 주로 억압에서 떨쳐 일어나는 피(被)지배자의 항쟁을 이 단어로 표현한다. 덧붙여 개정안에서 '경찰 발포'가 '봉기'의 원인으로 명기됐다. 4·3사건은 '경찰의 폭력 탓에 일어난 봉기'로 요약된다. 주민 다수를 죽인 뒤 북한으로 들어가 국가 훈장을 받고 김일성을 위해 빨치산으로 목숨을 바친 주모자 김달삼의 흔적은 어느 구석에서도 찾을 수가 없다.
제주 4·3사건은 1947년 3월 1일 시위 및 경찰 발포, 1948년 4월 3일 대한민국 탄생을 막기 위한 남로당 제주도당의 제헌국회 선거 방해와 좌익 무장대의 주민 살해, 1954년까지 이어진 좌우 무력 충돌과 공권력 진압에 의한 집단 희생이 핵심이다. 역사학자는 어느 한 편에서 역사를 서술할 수 있다. 법은 그래선 안 된다. 이번 개정안은 경찰과 공권력의 폭력만 명기하고 좌익의 불법과 폭력을 상징하는 최소한의 문구(소요)조차 삭제함으로써 그들에게 당한 억울한 희생자를 정당한 봉기의 희생자로 전락시켰다. 이것은 대한민국의 법이 아니다.
둘째 개정안은 현행 특별법에 관한 2001년 헌법재판소의 결정을 무력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었다. 당시 헌재는 특별법이 보호할 수 없는 희생자의 범위를 명확히 설정했다. '대한민국 건국을 위한 선거를 저지하고, 자유민주적 기본 질서를 부정하며, 북한 공산정권을 지지하면서 경찰·선거 종사자와 가족을 가해하기 위해 무장세력을 조직해 공격한 행위까지 포용할 수는 없다. 대한민국의 정체성에 심각한 훼손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헌재가 현행법을 합헌으로 결정한 이유 중 하나가 이 법이 '주민'이란 문구로 법의 보호를 받는 무고한 희생자를 특정하고 있다는 이유였다. 그런데 개정안에서 이 '주민' 문구는 '민간인'으로 대체됐다. 헌재가 헌법적 의미까지 부여한 특별법의 핵심 단어를 구태여 바꾼 이유는 무엇일까.
개정안엔 또 다른 논쟁적 조문이 담겨 있다. 사건 당시 혐의자를 처벌하기 위해 작성된 고등군법회의 명령과 이 명령에 따라 이루어진 군법회의 판결은 무효라는 것이다. 깊은 논의가 필요하다. 대한민국이 갓 태어난 시기였다. 법령이 정비되지 않았다. 법적 요건을 완비하지 못한 상태에서 공권력이 행사됐다. 많은 사람이 억울하게 희생됐다. 당시 증언집을 읽으면 군법회의 명령과 판결을 무효화해 한꺼번에 신원(伸 )하는 조문은 타당성이 있어 보인다. 하지만 필연적으로 대한민국을 공격해 죗값을 치른, 즉 헌법재판소가 특별법의 보호를 받을 가치가 없다고 규정한 반(反)헌법적 무리까지 보호하고 배상하는 딜레마를 안게 된다. 개정안은 이렇게 헌재의 2001년 결정을 사실상 무력화한다.
문제는 이런 결과가 4·3사건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같은 해 일어난 여순 사건도 14연대 남로당 조직원의 폭동과 좌우 무력 충돌, 공권력의 과도한 진압에 의한 집단 희생 등 발생 원인과 전개 과정이 비슷하다. 4·3사건 특별법 개정안의 논리대로라면 여순 사건 역시 폭동이 봉기로 미화되고 폭동 가해자들은 대한민국 법의 보호를 받을 길이 열린다. 정말 이래도 될까.
4·
3 특별법 개정안의 또 다른 문제점은 '희생자나 유족을 비방할 목적으로 사건의 진상조사 결과를 부인 또는 왜곡하면 징역형이나 벌금형에 처한다'는 조문이다. 정부가 "봉기"라고 하면 '봉기'라는 것이다. 이런 규정이 4·3사건에 적용되면 얼마든지 5·18 민주화 운동, 세월호 참사로 확대될 수 있다. 나는 이것이 이번 개정안의 가장 독소적인 부분이라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