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보식, "文은 자신을 대통령 아닌 민족통일국가 세우려는 ‘남쪽 리더’로 자부,” 조선일보, 2020. 8. 24, A27쪽.]
며칠 전 본지(本紙)에 '4·15 선거 부정 의혹을 밝혀야 한다'라는 전면 광고가 실렸고, 노재봉(84) 전 국무총리의 이름이 맨 앞에 있었다. 이런 민감하고 불확실한 사안에 전직 총리가 공개 입장을 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득표율 통계나 투표함·사전투표지 등에서 나타난 여러 문제점을 제자 교수들과 몇 차례 토의했다. 민주주의 제도에서 선거보다 중요한 게 없는데, 문재인 정권은 이런 국민적 의혹을 적극적으로 풀어주지 않았다."
―한쪽의 주장이나 음모론에 영향받은 게 아닌가. 만약 재검표를 해서 당초 개표 결과와 똑같이 나오면 어떻게 감당하려는가?
"만약 내가 틀렸다면 공개 사과하고 비난도 받겠다. 하지만 투표 결과에는 한 점 의혹도 남아선 안 된다. 이번에 선거 무효 소송만 130여건 제기됐다. 석 달 넘게 지났지만 대법원에서 전혀 응답이 없다고 들었다. 선거 무효 소송은 여섯 달 안에 끝내도록 돼 있는데, 과연 재검표가 이뤄질지조차 불투명해졌다."
코로나 방역의 정치적 이용
―팔순 중반 전직 총리 신분이면 이런 광고에 이름을 올리지 않고 세상과 거리를 두려고 하지 않나?
"지금은 체제 위기다. 현 정권에서는 통념으로 이해 안 되는 일들이 날마다 벌어지고 있지 않나. 총리를 지냈다고 안이하게 지낼 상황이 아니지 않은가."
그는 노태우 정부에서 대통령 비서실장·국무총리를 지냈지만, 원래는 당대에 손꼽히는 국제정치학자였다. 서울대 교수로서 20여년간 재직했고 지금도 국제정치 분야 외국 저널을 빠짐없이 읽는다고 한다.
―7년째 매주 목요일 제자 교수들과 공부 모임을 해오고 있다고 들었는데?
"시국 상황을 이론적으로 규정해보려는 것이다. 우리가 어디에 있고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어야 하지 않겠나. 2년 전 출간한 '한국 자유민주주의와 그 적들'이라는 책도 이 모임에서 나온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 임기 3년 반이 지났는데도 분열과 혼란은 여전한 것 같다. 주위 사람들을 만나면 '이 정권에서는 하루라도 마음 편한 날이 없다'고들 말한다. 물론 정권 지지 세력은 이런 관점에 전혀 동의하지 않겠지만.
"분열과 혼란을 야기하는 것이 문재인 정권의 정치 기술이다. 이는 적(敵)을 설정하거나 만들어내고 증오와 복수심을 유발한다. 지금 진행되는 광화문 집회 공격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8·15 광화문 집회에는 비가 내렸는데도 5만명 이상 모였다. 현 정권에 분노한 국민이 대부분 자발적으로 몰려나온 것이다. 하지만 문 대통령은 광화문 집회 바로 다음 날 "국가 방역 시스템에 대한 명백한 도전이고 용서할 수 없다"고 말했는데?
"국민의 생명이 걸려 있는 코로나 방역은 중요한 사안이다. 하지만 대통령이라면 광화문에 그렇게 많은 인파가 몰려나온 것에 대해서도 응답했어야 한다. 이를 싸잡아 '국가 방역에 도전했다'는 식으로 몰아갈 사안은 아니었다."
―사실관계를 따지면, 문 대통령이 발언한 시점에서의 수도권 코로나 확산은 광화문 집회와 거의 무관하다. 그런데도 특정 교회 탓으로 돌리며 사랑제일교회나 전광훈 목사만을 집중 타격하고 있는데?
"전광훈 목사를 개인적으로 만난 적은 없지만, 현 정권에 가장 격렬하게 맞서온 그를 비롯한 일부 교회 세력을 이 기회에 잡겠다는 것처럼 보였다. 현 정권은 더 큰 악재(惡材)를 이용해 자신의 실정과 무능·부정(不正)을 덮는 방식을 취해왔다. 어쨌든 전 목사가 이런 공격의 빌미를 준 것은 사실이다."
―현 정권은 그전에 교회 등의 소모임 금지를 해제하고 외식·공연·여행 쿠폰을 발행했다. 17일은 임시 공휴일로 정했다. 국민에게 방역 해제의 메시지를 이미 줬던 것이다. 실제 해운대에서는 40만 인파가 몰렸다. 그런 정권이 광복절 집회 직전에 코로나 확산 우려를 내세우자 설득력이 없었던 것이다. 오히려 정권 비판 집회를 차단하려는 술책으로 받아들여진 것인데?
"일각에서 현 정권이 코로나 방역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있다는 말이 나오는 것이다. 문재인 정권에서 중요하게 봐야 할 점은 '체제'의 문제다. 역대 정권에서는 모든 권력 행위가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전제로 이뤄졌다. 하지만 지금은 체제 전복적 상황이 진행되는 중이다. 나는 그 시발점을 박근혜 탄핵으로 본다."
법의 지배
―박근혜 탄핵은 폐쇄적인 국정 운영 스타일, 즉 '국정 농단'으로 촉발된 것인데?
"이는 박근혜 탄핵이라기보다 '체제 탄핵'의 성격으로 봐야 한다. 촛불 집회를 동원해 체제를 뒤집는 탄핵을 벌인 것이다. 당시 국회 탄핵 소추안과 헌법재판소의 탄핵 결정문을 보니 전혀 법률 문서가 아니었다. 나중에 법대 교수들을 만나는 자리에서 '서울 법대에서는 학생들에게 법철학도 안 가르치느냐'고 핀잔을 줬다. 합법성(合法性)에는 '법의 통치'와 '법에 의한 통치'가 있다."
―같은 뜻 아닌가, 소위 '법치주의'라는?
"전자는 입헌(立憲)주의다. 헌법에 의거해 권력 행사의 자의적인 남용을 막는 것이다. 하지만 후자인 '법에 의한 통치'는 어떤 상황에서 다수당이 만들어낸 법으로 자의적인 권력 행사를 가능케 허용한다."
―민주주의 제도는 다수당에 의한 지배를 정당화하지 않는가?
"다수의 지지를 업고 히틀러나 스탈린 등 독재자도 그렇게 자의적인 법을 만들었다. 최근 우리나라 다수당이 만든 공수처법이 이런 경우다. 하지만 공수처법은 헌법적 근거가 없다. '법의 지배'가 아니라는 뜻이다. 부동산 규제와 세금 문제도 다수당이 법을 고쳐 밀어붙일 수 있다. 하지만 조세법정주의나 사유재산 보호라는 헌법 정신을 훼손하는 것이다."
―이런 점을 제기하면 보수 기득권 프레임을 씌워버린다. 과거에는 지식인과 전문가들이 정권을 비판하면 듣는 시늉이라도 했다. 하지만 현 정권에서는 수천명이 넘는 교수로 구성된 '사회정의를 위한 전국교수모임'이 어떤 현안에 대해 집단 성명을 발표해도 '보수 성향 교수들의 뻔한 소리'로 취급해버린다.
"과거에는 자유민주주의라는 전제에서 보수나 진보가 나뉘었다. 현 정권에서는 지금까지 합의된 이런 전제가 허물어졌다. 지금 우리 사회는 '보수 대 진보'가 아니라 '자유민주주의 대 전체주의'의 대립 구도로 봐야 한다. 문재인 정권은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바꾸려고 하고 있다. 그는 자신을 '대한민국 대통령'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이 때문에 나도 그를 대통령으로 보지 않지만."
―선거로 당선된 대통령에 대해 너무 심한 언사인데?
"그럴 수 있겠지만, 대통령이라는 사람이 스스로 대한민국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데 어쩌겠나."
―무슨 근거로 그렇게 보나?
"지금까지 발언을 종합하면 문 대통령은 대한민국을 진정한 주권국가로 안 보고 있다. 해방 이후부터 지금까지 세월은 아직 이룩하지 못한 민족국가 건설의 투쟁 과정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가 평양 방문에서 '남측 대통령'이라고 말한 것도 이런 맥락이었다."
―학생운동권 출신 이인영 통일부 장관이 '국부(國父)는 이승만이 아니라 김구가 됐어야…'라고 발언한 것도 그런 선상인데?
"이들은 해방공간(1945~1948년)에서 공산화될 뻔한 남한에서 자유 대한민국을 세운 이승만을 분단의 원흉처럼 본다. 여기에는 '이승만은 미 제국주의의 앞잡이로 민족 분단을 가져왔고 대한민국은 미국 식민지'라는 인식이 깔렸다. 이는 북한 정권이 선전해오던 것이다."
―대학 다니던 시절 유행하던 '북한 정권 정통성'이나 '신식민지' '매판자본' 같은 철 지난 용어가 현 정권에서 부활하는 것 같다.
"이들은 대한민국을 부인해도 경제적으로 발전한 사실은 어쩔 수 없이 인정한다. 하지만 그게 매판자본 때문에 발전했다고 단서를 단다. 밥도 못 먹는 나라에서 외자(外資)를 끌어들여 온 것은 보통 능력이 아니다. 누가 거지에게 돈을 빌려주나. 외자를 못 끌어들여 야단법석인데, 이를 '매판자본'이라고 욕한다. 운동권 출신 정치인의 이런 터무니없는 주장이 아직도 먹힌다. 현 정권은 방해자인 미국을 몰아내고 남북이 통일돼야…."
―지금의 대한민국은 임시 국가일 뿐, 통일이 돼야 '완전한 건국'이 된다는 것인데?
"문 대통령은 민족이 갈라진 상황에서 미국에 맞서 독립운동을 하고 있는 남쪽의 리더로 자부하는 것이다. 사실 '1민족 1국가'는 세계사 관점에서 보면 굉장히 예외 사례다. 같은 민족이라고 한 국가가 돼야 하는 것은 아니다. 같은 종족적 범주에 속하는 영국과 미국은 우리 기준으로 하면 반드시 통일이 돼야겠지만."
―진보로 분류되는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도 이런 논의를 편 적이 있다. 자칫 '반통일 세력'으로 비판받을 수 있는데?
"대한민국은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기반으로 하는 자유 민주 체제이고, 북한은 '모두는 하나를 위하고 하나는 모두를 위한다'는 전체주의 체제다. 그 속에서 주민들의 정체성은 각각 다르게 형성돼왔다. 자유민주주의 체제로의 통일 노력을 하는 것과는 별도로, 이런 현실에 눈감고 감상적 민족 개념으로 접근할 일은 아니다."
체제를 뒤집다
―현 정권에서 우리가 그동안 옳다고 여겨온 가치나 도덕관, 상식이 모두 허물어졌다. 여권 정치인 중에는 그전까지 안 그랬는데 갑자기 뭔가에 감염된 것처럼 이상하게 바뀐 이가 많아졌다.
"지금까지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기준에서 보면 현 정권은 말도 안 되는 짓을 하고 있다. 언론에서 그런 잣대로 비판해왔다. 하지만 현 정권에서 먹혀들었나. 만약 그렇게 믿는다면 그건 대단한 착각이다."
―비판의 잣대가 잘못됐다는 건가?
“현 정권은 다른 목적을 갖고 있다고 본다. 가령 언론에서는 부동산 정책 실패를 비판하지만, 현 정권 입장에서는 그게 실패할수록 성공인 셈이다. 정부 지원에 의존하는 국민 숫자가 늘어나는 게 체제를 뒤집는 목표에 합당하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북한에서 이런 공작을 몰래 꾀했는데 이제 남쪽이 맡아서 체제를 바꾸려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