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10일 6·25전쟁 때 북한의 남침으로 백척간두에 있던 대한민국을 위기에서 구하는 데 큰 역할을 한 백선엽 장군이 타계했다. 좌파는 백 장군이 만주군관학교 출신으로 간도특설대에 복무해 친일파라며 현충원 안장을 반대하기에 이르렀다. 8·15 75주년을 맞아 친일파의 의미가 무엇이고 간도특설대란 어떤 것이며 국군 창설 이후 6·25 때 기여한 일본 육군특별지원병제도는 어떤 것인지 이에 대해 연구를 많이 한 정안기 박사에게 들어본다.
- 얼마 전 백선엽 장군께서 돌아가셨는데 좌파 쪽에서는 간도특설대 경력을 물고 늘어지고 있습니다. 먼저 당시 간도특설대에 대해 설명해 주시죠.
간도특설대 규모는 중대급이라고 보면 됩니다. 1938년 12월 300명 정도 규모로 창설된 겁니다. 관동지구사령부의 직할로서 일종의 특수부대 성격이죠. 부대 창설 자체도 토벌대로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만주의 일본 관동군은 소련을 염두에 둔 부대입니다.
원래 관동군의 주적은 소련군이니까요. 소련군을 상대로 하는 특수부대 그러니까 후방 교란, 정보수집 등이 목적으로 만들어진 겁니다. 간도특설대라고 해서 조선인으로만 구성된 것도 아닙니다. 러시아인, 몽골인, 이슬람, 만주인 등 민족별 특수부대가 창설되었습니다. 정보수집 및 교란 등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각 민족별로 구성하게 된 겁니다. 당시 만주라는 곳은 여러 민족이 혼재하던 곳이었습니다.
논의에 앞서 우리가 합의를 해야 할 것이 있어요. 일단 조선인들은 1910년 한일합방으로 일본의 신민이 된 겁니다. 당연히 일본이 보호해야 할 일본국민이란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만주, 간도에서 일본신민, 일본국민이 된 조선인을 일본은 보호해야죠. 중국 마적단이 간도의 조선인을 약탈한다는 것은 즉 당시로는 일본국민을 약탈하는 것이니 일본군 일본 경찰이 나설 수밖에 없죠.
한마디로 국가는 국민을 보호하는 것이고 국민은 국가에 충성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그것이 근대국가론의 기본이죠. 제가 만주학회에서 꽤 오랫동안 연구를 해왔고, 사무총장도 했고 이 부분에 대해서는 꽤 연구를 했습니다.
최근 와서는 광복군, 조선의용군에 대해 많은 추적을 했습니다. 팔로군에 조선의용군이 속했던 것은 아니냐 하는 사람이 있는데 턱도 없는 이야기입니다. 간도특설대가 팔로군을 토벌했다면 그 속에 조선의용군도 있으니까 같은 민족에 총을 댄 것 아니냐고 하는데 턱도 없는 이야기입니다.
왜냐하면 1944년, 1945년 당시 조선의용군이라는 것은 만들어지는 단계였고 인원도 많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간도특설대라는 부대 자체가 총을 들고 싸우는 부대라기보다는 후방 교란, 정보수집에 더 초점을 두는 부대라는 점입니다. 그러니까 저들이 백선엽 장군이 특설대로 독립군한테 총부리를 겨눴다고 말하는 것은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되죠.
- 충성과 반역이 보수우파사회에서 센세이션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이 책을 집필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지요.
2015년 고려대에서 위안부 발언을 하면서 어려운 상황에 부닥친 적이 있습니다. 그러다가 우연히 브랜든 팔머 교수의 ‘일본통치하 조선의 전시동원’을 접하면서부터였습니다. 하와이대에서 출간된 것인데 일본어로 번역이 되었습니다.
저는 전시경제를 연구했습니다. 교토대 유학 때도 전시(戰時)파트가 제 전공이었고, 그것으로 학위논문을 썼고 한국으로 돌아와 식민지 전시경제는 어떻게 돌아갔고, 그것이 해방 후에는 어떤 관련이 있는지를 연구했습니다. 이런 부분에 대한 산업사, 기업사, 제도사 등 연구를 해 왔습니다. 그러다가 한국에서는 위안부 문제가 불거졌죠. 브랜든 팔머의 식민지 전시동원 첫장을 딱 보면 ‘육군특별지원병 제도’가 나옵니다.
또 자료에도 보면 놀라운 표가 있어요. 지원율 자체가 48:1, 49:1의 엄청나게 높은 지원율을 기록한 것입니다. 어떻게 이럴 수 있는가 놀라움을 금치 못했죠. 일제에 강제로 끌려갔다는 기존 한국 근현대사의 논리로 보면 있을 수 없는 것이죠. 그래서 정말 그럴까 하는 의문이 생긴 겁니다.
그래서 일본에서 자료를 조사해보니 놀라운 기록이 나오는 겁니다. 총독부가 일본 육군성 앞으로 보낸 자료를 보내 매년 지원병이 증가하는 겁니다. 지원병이 늘게 되면 교관, 시설, 예산을 늘려야 하기 때문에 관련 자료를 총독부가 취합해 보내 것인데 그 자료가 엄청 상세합니다.
조선의 지역별 연령별 지원자 수가 꼼꼼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예산내역도 나오고 지원병의 신체등급자료 등도 다 포함되어 있는 겁니다. 깜짝 놀랐죠. 자료를 보니까 사실인 겁니다. 일제 관헌의 공권력이 개입했다 하더라도 그런 숫자가 나올 수 없습니다. 신문, 잡지 자료를 찾아보니 지원하면서 혈서를 쓰는 것도 나옵니다. 기존 연구는 엄청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죠.
특별지원병에 누가 지원했나 보니 송요찬, 최경록, 임부택 같은 6·25전쟁 때 그야말로 대한민국을 구한 사람들이 총망라되어 있는 겁니다. 더 조사를 해보니 이분들이 중일전쟁(1937~)에도 참전을 했고, 태평양전쟁에도 참전하면서 필리핀, 버마, 뉴기니까지 갔더라구요. 그분들의 회고록을 보게 되니 그분들이 겪은 일들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그래서 제가 결심을 했죠. ‘이건 내가 필생의 힘을 쏟아 한 번 해볼 테마다’라고 말입니다.
저는 원래 경제사가 전공이지 근대사가 전공은 아닙니다. 그런데 경제를 전공했으니까 실증 자료를 찾아내고 거기에 조선 청년들이 겪은 일들 그리고 총독부의 자료까지 합해서 보니 한마디로 딱 스토리가 서더군요. 조선총독부가 강제로 한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왜 총독부가 징병제가 아니고 지원제로 했느냐 하는 겁니다. 그 맥락에서 ‘조선인 특별지원병제도’가 왜 나왔으며 그 속에서 당시 조선의 청년들은 무슨 생각을 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 과정을 하나하나 추적해 갔습니다.
중국인 마적단이 조선인 약탈
- 그럼 조선인 특별지원병에는 주로 어떤 사람들이 지원한 것입니까.
주로 중농층 대가구 가족들의 차남들입니다. 이것도 총독부가 조사한 자료에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자료를 보면서 ‘이건 정말 나한테 하느님이 행운 준 것이구나’하는 생각도 했죠. 또 육군 특별지원병에는 전남 출신이 많습니다. 압도적입니다. 굳이 남북을 비교해보면 남한지역에서의 지원병이 70%나 됩니다. 북한지역보다 월등히 많습니다.
왜 그런가? 상대적으로 당시 남북지역을 비교하면 북한지역(평안도 함경도)은 그래도 깨어 있는 일종의 양반개념이 없는 평준화 된 상민(常民)의 사회였다면 남한지역은 아직도 양반·상놈의 관념이 있던 반상의 사회였다는 것입니다. 그렇다 보니 반상의 사회라는 전근대적인 틀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젊은이들이 대거 육군 특별지원병에 지원했다고 보는 것입니다. 일종의 사회적 돌파구가 된 셈이죠.
당시 일본인이 조사연구보고서에도 나오는 것이 있습니다. 앞으로 조선 사회가 전근대적 사회를 벗어나게 되면 서북지역 출신들이 조선 사회를 쥐고 흔들 것이라고 말입니다. 통계적으로 봐도 그렇습니다.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학생들 70~80%가 서북지역 출신이고 해외 유학도 그렇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그랬잖아요.
기존 한국 근현대사에서 드러나지 않았던 것들이 이번 연구를 통해 실증적으로 드러났고 그렇다면 친일파 논란에 대해서도 근본적으로 재검토를 해야 하는 이유가 나오는 겁니다. 육군 특별지원병의 지원율과 당시 조선 청년들의 생각을 들여다보면 최남선이라든가 이광수에 덧씌워진 친일파 논란도 다시 봐야 하는 것이 됩니다.
- 이 책에 대한 결론부터 말씀하신다면.
이 책을 들여다보면 최남선, 이광수에 대한 친일파 논란은 턱도 없는 것입니다. 육군 특별지원병에 지원한 이들은 일제의 공민으로 태어났지만 국민의식을 내면화 체화시키고 군사기술을 체득했고 그 기술로 대한민국 건국과 호국 그리고 발전에 기여했다는 것입니다.
- 당시 조선인의 일본 육군 특별지원병에 지원하는 사람들은 친일을 한다는 인식은 없었던 것인가요?
있을 수 없지요. 왜냐하면 이 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일본국민으로 태어난 것이니까요. 이들은 대부분 1920년대생이고 또 국민학교에 들어가면 가장 앞서가는 근대교육을 받은 것이 됩니다. 지금의 초등학교와는 다릅니다. 정신교육, 훈화교육이 강조되었습니다. 국민학교 다니면서 일본국민으로 황민화 국민화 교육을 받은 것이죠.
당시 남한사회의 향촌사회라는 것은 조선시대 양반상놈 개념이 그대로 있는 곳이란 말입니다. 학교내에서 근대적 교육을 받지만 밖은 여전히 ‘종’으로 살아야 했던 시대입니다. 서정주 시에도 나오지만 ‘애비는 종이었다’는 것이 그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육군 특별지원병제도가 나오니까 그들에게 이것은 구세주와 같은 역할이 된 것입니다. 현실을 돌파하고 새로운 삶을 개척할 수 있는 계기가 됐습니다. 향촌사회에서 개처럼 사느니 일본군이 되겠다는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닌 겁니다. 게다가 당시 일본군의 위상이 매우 높았습니다. 한마디로 자기해방이었던 겁니다.
- 육군 특별지원병에 지원하는 것이 민족차별에서 벗어나기 위한 목적도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시골 촌구석에서 사는데 일본사람을 만나봐야 뭐 차별이라도 받든가 할 텐데 촌구석에 일본사람을 만날 일 자체가 없는 겁니다. 차별을 받으려면 일본인과 동등한 조건에서 뭘 하려다가 차별을 받아야 말이 성립되는데 그런 상황 자체가 안 되는데 무슨 민족차별에서 탈출하려고 육군 특별지원병에 지원했다? 한마디로 말이 안 되는 소리입니다.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이들은 민족차별이 아니라 우리 향촌 사회 내의 내부적인 차별로부터 탈출하고자 했던 것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 육군 특별지원병으로 합격이 된다는 그 의미는 무엇인가요?
정말 대우가 좋습니다. 그냥 징집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일본은 그 당시에 이미 국민개병제를 실시한 나라입니다. 20세가 되면 일단 청년들은 모두 징병검사를 받게 됩니다. 징병검사를 받아 정말 신체등급이 좋은 사람들만 군에 갈 수 있었습니다. 조선인들은 징병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다가 육군 특별지원병제도로 조선인들에게도 문호를 개방한 것이죠. 합격하면 일본인들과 말 그대로 똑같은 대접을 받습니다. 일본이라는 사회가 원래 군인에 대한 인식이 특별합니다. 당시는 상등병으로 제대하는 사람은 전체 입대자의 4분의 1밖에 안 됩니다.
상등병을 달고 제대했다면 당시 면에서 지역유지가 되고 지역 리더가 되죠. 지금도 일본에서는 군대 다녀왔다고 하면 보는 눈이 달라집니다. 제가 일본 유학 때도 군을 다녀왔다고 하니 보는 눈이 달라집니다. 나라를 지키는 군인에 대해 일본 사회, 일본인들은 감사하는 마음이 유독 큽니다.
- 그런데 좌파는 일본이 전쟁하면서 병력이 부족하니까 조선인에게도 문을 열게 되었다고 주장합니다. 이 점에 대해 정 박사님의 생각은 어떤 것인가요?
그 당시 일본군의 병력 규모가 중일전쟁 때부터 따지면 총 누계로 780만 명 정도 동원했고 태평양전쟁 시기 최대 병력은 280만 정도 되었습니다. 조선인에게 부여된 육군 특별지원병 총 병력수가 1만7000명 정도였습니다. 한마디로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병력 수준이었습니다.
그런데 병력이 부족해서 조선인에게 일본군 입대의 문을 열었다는 것은 한마디로 말이 안 되는 겁니다. 그러면 왜 조선인에게 이 제도를 시행했는가 하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논점이 되는 것입니다.
조선인 육군 특별자원병 전남 출신이 압도적 다수
- 그럼 왜 문을 조선인들에게 열었던 것입니까?
저의 책 1장에서 그 부분을 분석해 놨는데 그 제도가 성립되는 과정을 말합니다. 일본이 조선인도 일본국민이라고 말하면서 황국신민화를 하죠. 대동아주의를 실현하려고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정권도 안주고 병역의무도 안주는 겁니다. 그러니까 조선인들이 요구합니다. 참정권을 달라고 말이죠. 그러니까 ‘너희는 민도가 낮고 정치 수준이 낮아 안 된다’고 거부를 합니다.
이런 문제의식을 갖고 일본에 제기하게 된 계기가 있습니다. 만주사변을 거치면서 조선사회도 변하게 됩니다. 1920년대까지만 해도 일본에 대한 거부감이 상존했고 차이가 있었습니다. 만주사변도 내면적으로 자세히 들여다보면 만주, 간도지역 조선인들 문제 때문이었습니다.
중국인들이 토지 소유권을 내세우며 자꾸 만주지역 조선인 사회를 핍박하니까...그리고 재만조선인 사회도 중국인들의 횡포와 핍박으로부터 일본의 보호를 요구했구요.
그렇게 만주사변을 거치면서 조선인들의 일본에 대한 인식이 변합니다. 알고 보니 일본이 정말 강한 나라구나, 조선인에 대해 차별만 하는 것이 아니라 보호하려고 하는 것도 있구나 하는 식으로 말입니다. 그렇게 되자 조선의 정치세력도 변합니다. 권리를 요구하기 전에 의무부터 하자는 식으로 바뀌면서 오히려 조선의 정치사회가 먼저 징병제를 요구합니다.
당시 조선인들의 문맹률이 80%나 됩니다. 초등학교 취학률은 30% 정도인 상태에서 국민개병제를 실시하는 일본 입장에서는 조선인과 일본인의 수준 격차가 너무 벌어지고 문화적 차이도 있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조선인에 대해 징병제를 실시할 수 없는 상황인 겁니다. 징병제를 실시하기 전에 전 국민 의무교육제가 먼저 필요한 것도 있구요.
일본 육군성 자료를 보면 당시 30년대 조선인에 대한 징병제는 30년 정도 지나야 가능하다고 전망합니다. 그러니까 조선인정치세력이 역제안을 합니다. 그렇다면 조선인 가운데도 국민학교도 나오고, 충분히 사상도 건전하고 병역의무를 수행할 수 있는 우수한 청년들을 뽑아 우선 병역을 시행해보자고 한 겁니다. 그러니까 조선총독부나 일본제국의회도 할 말이 없어지게 되었죠.
- 앞서 정박사님이 언급하실 때 만주사변이 조선내 사회 분위기랄까 전반적으로 완전히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는데 그 이유는 무엇인지요?
만주사변 발발 자체가 만주에 살고 있는 조선인에 대한 중국인들의 핍박과 탄압 때문에 발생한 것입니다. 즉 중국인으로부터 조선인을 보호하겠다는 것이 만주사변 발발의 원인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만주국 건설하면서 붐이 일어납니다. 많은 조선인이 풍운의 꿈을 안고 만주로 만주로 넘어갑니다.
거기서 더 넓은 세상을 보고 한 것이 그대로 조선사회로 들어오면서 자연스레 조선도 변하게 됩니다. 경제도 발전하게 되니까 뭐랄까 조선독립이라는 화두가 물밑으로 가라앉게 됩니다. 개인의 생활이 나아지면서 권리와 의무에 대한 자각도 생긴 겁니다. 그래서 당시 사회 분위기를 이렇게 전합니다.
30년대 들어와 반일주의자는 회색분자로 바뀌고 회색분자는 친일주의자로 바뀐다고 말입니다. 수량적 통계도 보면 정치사범이 대폭 줄고 신사참배도 늘고 변합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일제강점기는 20년대이거나 아니면 태평양전쟁 기간의 이미지이지 30년대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대중가요로 유명한 ‘감격시대’나 ‘복지만리’도 일종의 만주 특수를 배경으로 한 노래입니다.
- 그러면 해방 후 특별지원병 출신들은 어떤 상황에 처해진 것입니까?
이들이 군에 갈 때는 지역에서 영웅 대접을 해 줬습니다. 그리고 복무 성적도 좋았습니다. 체력 수준도 좋았고 고향민들의 적극적 후원으로 일본군 생활을 하게 되죠. 태평양전쟁에서 약 5000-6000명 정도 전사를 합니다. 1만1000명 정도가 생존해 돌아와 보니까 어떤 상황이 되느냐 하면 친일이 문제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서 엊그제만 해도 영웅 대접을 받았는데 돌아와보니 순식간에 이상한 사람이 되어 버린 겁니다. 태평양전쟁에서 살 아 돌아온 사람들은 심신이 완전히 피폐해집니다. 사회생활에 바로 접하지 못하고 상당히 타격을 받게 되죠. 그후 군사영어학교에 들어간 사람들은 중국 전선이나 조선반도에 근무했던 사람들이었죠. 쉽게 귀국하고 바로 적응할 수 있었으니까요.
육군 특별지원병으로 태평양전쟁에 참가했다가 나중에 국군에 몸담게 되는 분들은 정말이지 최고의 군사 능력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중국 전선에 있었던 사람들과는 차이가 납니다. 사실 박정희도 실전 경험은 없었다고 봐야죠. 육군 특별지원병 출신들은 4년 내지 5년 정도를 일본군에서 하사관으로 경험을 쌓은 상태였습니다.
비교가 안 되는 상태였습니다. 한마디로 백전노장이었죠. 이들이 국군에 들어와 국군창설 초기 신병 교육을 시킨 겁니다. 그렇다 보니 한국군에 일본군 잔재라고 할까요, 그 영향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국군 창설 초기 구조를 보면 군 상층부는 만주군관학교나 일본육사 출신들이 차지하지만 그 바로 밑 부분 실질적으로 병사들을 훈련하고 전투에 임했던 사람들은 대부분 육군 특별지원병 출신들이었습니다.
- 그렇다면 일본군에 지원을 독려했다는 이유로 친일파로 몰리는 모윤숙이라든가 최남선, 이광수도 사실과 다르다고 봐야겠군요?
조선인 정치세력들은 조선인들도 능력이 있고 그리고 근대국민으로서 제대로 살아가려면 참정권 같은 권리를 빨리 획득해야만 제대로 된 사회생활을 할 수 있고, 그래야 우리의 민족적 힘이 커지는 것이고, 독립의 기회를 잡아낼 수 있다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능력 있는 인적자원이 형성되지 않으면 독립의 기회가 와도 독립을 할 수 없고 국가를 세울 수 없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인 겁니다. 참정권을 요구하는 것 자체도 궁극적으로는 나중에 독립을 위한 사전 포석인 것이죠. 그 참정권을 얻기 위해서는 국민의무를 이행하자, 즉 병역에 대해서도 제 몫을 다하자는 것이고요.
- 그럼 육군 특별지원병들이 일본군에서 배운 것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그리고 대소전을 준비하면서 반공교육도 특별히 받았나요?
당연하죠. 1938년 전국적으로 반공협회가 발족이 되고 잡지가 발행이 되고, 각 경찰서를 중심으로 조선 전체에 지부가 결성되고, 매달 15일은 ‘반공의 날’이었습니다. 그 날은 모든 국민들은 반공교육을 받아야 했습니다. 당연히 육군 특별지원병 훈련소에서도 반공교육을 시키죠. 나중에 해방 후에는 반공의 날이 ‘반공·방첩의 날’로 바뀌죠.
이렇게 일본이 반공교육을 강조한 것은 1930년대 보면 함경도 지역에서 공산주의자들이 활개를 칩니다. 소위 말하는 조선공산당들의 활동지역들이 흥남이나 원산 같은 곳인데 파업도 일으키고 했죠. 일본 국내에서도 공산주의자들이 암약했고 일본 내 지식인사회에도 공산주의자들이 많았는데 문제는 이들 공산주의자들이 일본 천황제를 부정하고 이념적으로 부식시키는 겁니다. 그것을 차단시켜야 하는 목적도 있죠.
‘역사왜곡에 의한 친일파 논쟁은 공허’
- 태평양전쟁에 참전했다가 전사한 조선인 병사들이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하고 있는 것도 사회 이슈가 되고는 합니다.
야스쿠니에는 약 2만2, 3천 명 정도의 군인과 군속의 위패가 모셔져 있습니다. 우리나라로 말하면 국립묘지와 같은 역할을 하는 곳이죠. 군인으로 전사를 하게 되면 야스쿠니에 모신다는 것은 약속이 되어 있는 겁니다. 제가 조사를 해보니까 1945년 8월 15일 이전에 모셔진 사람은 415명에 불과했습니다. 나머지는 전부 해방 이후 모셔진 겁니다. 일본은 비록 전쟁에 졌지만 어쨌거나 전쟁기간에는 일본 국민이었기 때문에 당초 ‘죽음의 약속’을 지켜준 겁니다. 문제는 광복회를 비롯한 우리 사회는 그들, 일본군이었던 조선인들을 친일파라고 몰면서 귀환을 막고 있습니다.
나머지는 모두 해방 이후 모셔진 겁니다. 조선인들이 군인이기도 하지만 어쨌거나 전쟁 기간에는 일본국민이었기 때문에 약속을 지켜준 겁니다. 대단히 중요한 논점인 겁니다. 문제는 우리 사회는 그들, 일본군인이었던 조선인들을 친일파라고 몰면서 귀환을 막고 있습니다. 놀라운 이야기입니다. 그들이 전쟁에 나간 이유는 사실 조선을 위해 나간 것입니다. 참정권을 확보해 근대적 국민으로 재탄생하는 데 앞장서서 나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들이 현충원이 안된다고 한다면 어떤 형식으로든 모셔와야죠.
이렇게 해야 근대국가로서 이성이 살아 있는 것이 됩니다. 또 반대로 이렇게 볼 수 있어요. 만약 일본이 야스쿠니에는 조선인 위패는 모실 수 없다고 한다면 우리는 일본에 이렇게 말할 겁니다. ‘부려먹을 때는 언제고 이제는 위패조차 모시는 것을 반대하느냐’고 말입니다. 야스쿠니에 전사한 군인의 위폐를 모시는 것은 사실 평등주의에 입각한 것입니다. 전사자 출신이 조선인이든 일본인이든 간에 차별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인식은 죽으면 모두 같은 ‘신’으로서 모시는 것이지 계급에 따라 차등이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현충원에 장군묘역이 따로 있고, 사병 묘역이 따로 있는데 야스쿠니에는 그런 것이 없고 군인으로 전사하는 순간 장군이든 사병이든 똑같은 ‘신’으로 대접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야스쿠니에는 참전했지만 전쟁터에서 죽지 않은 사람은 합사하지 않습니다. 전사자들만 모시고 있습니다.
우리 현충원에는 애국열사 묘역이라고 해서 화려하게 치장해 놨던데 이것은 6·25 때 전사자들에 대한 모욕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 육군 특별지원병 출신들이 해방 후 국군 내에서의 역할은 어떠했습니까?
육군 특별지원병 출신 중에 나중에 장군까지 올라가신 분은 86명인가 그렇습니다. 상당히 많은 장군을 배출시킨 것이죠. 그런데 해방 후 국군 창설 과정에서 이들은 사실 차별을 받았습니다. 군 요직에 들어가지 못했죠. 대부분 연대장 대대장 등 일선부대의 부대장에 보직을 받게 됩니다. 그러다가 6·25전쟁에서 큰 공을 세우면서 어떻게 보면 큰 기회가 된 것이죠.
실제로 보면 여순반란과 제주 4·3사건을 단기간에 진압한 최경록, 송요찬, 함병선 이 세명 모두 일본군 생활을 5년, 6년씩 한 사람들입니다. 백전노장이었죠. 그러니까 공산주의자들 반란을 단숨에 제압할 수 있었던 겁니다. 그리고 6·25전쟁 초기 북한군의 계획에 큰 차질을 빚게 한 춘천지구 전투도 보면 육군 특별지원병 출신의 공이 큽니다.
흔히 춘천지구 전투하면 김종오장군을 이야기하는데 사실 학도지원병 출신의 김종오 장군이 한 일은 별로 없어요. 실제로 전투를 진두지휘한 사람들은 연대장급들이었고 사실 임부택 연대장이 춘천지구 승리의 주역이었습니다. 임부택도 특별지원병 2기 출신입니다.
임부택 장군에 대해서는 정말이지 재조명되어야 합니다. 전공에 비하면 가려진 부분이 너무 많습니다. 함병선 장군 역시 마찬가지로 홍천지구 전투에서 북한군을 막아냈습니다. 그만큼 일본군에서의 전투 경험이 6·25전쟁에서도 실전으로 증명이 된 겁니다.
우리 사회에서는 맨날 친일파라고 말하지만 냉정히 생각해 봅시다. 이들 같은 일본군에서 실전 경험과 그리고 투철한 군인정신과 사생관을 가진 사람이 군에 있었을 때 하고 그렇지 못했을 때하고 말입니다. 6·25전쟁을 말하면 맨날 북한군 탱크 탓을 하지만 이미 탱크를 막는 방법은 태평양전쟁에서도 다 알려진 내용이었습니다.
춘천지구 전투에서 북한군 2군단을 막아 낼 때는 미군의 지원도 없을 때였습니다. 그런데도 북한군을 물리친 것이 당시 임부택 연대장이었습니다. 그래서 한강 방어선을 구축할 수 있었고 미군이 올 수도 있었던 것입니다.
이분들에게 우리는 감사해야 하고 자랑스러워 해야 합니다. 그런데 현재 대한민국에서 누릴 것은 다 누리고 사는 사람들이 그들에게 과거 일본군이었다는 이유만으로 친일파라고 손가락질하고 있으니 완전히 미친 사회죠.
**[대담자 소개]
정안기 박사--고려대를 졸업하고 교토대에서 일본경제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일본학술진흥재단(JSPS) 특별연구, 고려대 연구교수를 거쳐 서울대 객원연구원으로 동아시아 근현대사를 연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