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파정권, 자유대한민국수호] 백범도 국부로 모신 이승만, DJ도 당선직후 참배
2021.07.06 15:58
백범도 국부로 모신 이승만, DJ도 당선직후 참배
초대 대통령은 과연 친일매국인가
남로당·좌파가 친일파로 몰고가
노무현도 “당시 토지개혁 획기적”
[김기철, "백범도 국부로 모신 이승만, DJ도 당선직후 참배," 조선일보, 2021. 7. 5, A3쪽.]
이재명 경기지사는 2017년 초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에 뛰어들면서 “이승만 대통령은 친일 매국 세력의 아버지”라고 비난했다. 이 지사 말대로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이 친일 매국 세력일까.
진보 진영에서 존경하는 인물 1순위로 꼽히는 임정 주석 백범 김구는 해방 이후 ‘환영 국부 김구 주석'이라는 현수막을 보고 “국부는 한 나라에 한 분, 이승만 박사뿐”이라고 했을 정도로 우남을 깍듯이 대접했다. 백범을 모시고 1948년 남북협상 때 평양까지 수행한 비서 선우진씨 증언이다. 독립운동가 이회영 손자인 이종찬 국립 대한민국 임시정부기념관 건립위원장도 본지 인터뷰에서 “백범과 우남 이승만은 임시정부가 출범한 1919년부터 30년간 긴밀하게 협력한 동지(同志)였다. 해방 직후에도 이승만이 총재를 맡으면, 김구가 부총재(대한독립촉성국민회)를 맡는 식으로 행동을 함께 했다”고 말했다.
이승만이 이 지사 주장대로 ‘친일 매국 세력’이었다면, 백범이 그렇게 대접하고 행동을 함께 하지 않았을 것이다. 심지어 공산당 지도자 박헌영도 1945년 9월 인민공화국 주석에 이승만을 추대할 만큼, 이승만은 좌우 모두 인정하는 이름난 항일지도자였다.
이승만이 1948년 5월 31일 개원한 제헌국회에서 재적의원 198명 중 188명의 압도적 지지로 국회의장에 당선된 사실도 주목해야 한다. 임정 요인과 항일운동가가 다수 참여한 제헌의원들이 ‘친일 매국’ 혐의를 받는 사람에게 몰표를 줄 리 없다.
정치권에선 이승만의 독재와 실정을 비판해왔지만, 그를 ‘친일 매국’으로 몬 건 비교적 최근 일이다. 김대중 대통령도 1997년 12월 당선 직후 첫 일정으로 현충원을 찾아 이승만 대통령 묘소를 참배했다. 김대중 정부에서 정신문화연구원장을 지낸 한상진 서울대 명예교수는 이승만 대통령에 대해 “어느 나라든 나라를 세운 분을 국부(國父)라고 평가한다”며 “우리도 그래야 한다”고 말했다.
분위기가 바뀐 건 노무현 대통령 때부터다. 노 대통령은 ‘기회주의가 득세한 역사’라며 이승만 대통령을 비롯, 해방 이후 한국 현대사를 비판적으로 봤다. 하지만 그도 2004년 11월 칠레 방문 당시 동포간담회에서 ‘그때 토지 개혁, 농지 분배를 했는데, 지나고 보니 정말 획기적인, 역사를 바꾼 사건이었다’면서 “그것을 해서 한국전쟁이 터졌는데 국가 독립, 안전을 지켜냈고 국민이 하나로 뭉쳐 체제를 지켜냈다”고 이승만 시대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이승만을 친일 매국 세력으로 모는 건 남로당의 정치 선전 선동으로 시작됐다. 남로당은 1948년 5.10 총선을 반대하는 소위 ‘2.7구국투쟁‘을 시작하면서 ‘국제제국주의 앞잡이 이승만, 김성수 등 친일파를 타도하라'는 구호를 내걸었다. 북한 김일성 정권은 ‘리승만 매국도당’이란 선동 구호를 입버릇처럼 썼다. 이런 흐름은 1980년대 이후 좌파 진영부터 몇 년 전 논란을 빚은 ‘백년전쟁’ 영상까지 이어져왔다.
원로 역사학자 이인호 서울대 명예교수는 2019년 본지 인터뷰에서 이승만을 ‘악질 친일파’로 몰아간 ‘백년전쟁’에 대해 “대한민국을 파괴하려는 공산 진영의 주장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지 사실과는 거리가 멀다”면서 “이승만이 친일파였다면 당시 독립운동 세력과 해방 이후 선거에서 그를 찍은 국민은 바보였을까”라고 반문했다. 이 교수는 “당시를 살았던 앞 세대의 선택에 대한 존경심이 너무 없다”고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