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의 ‘자국우선주의’를 극복하려면
2024.02.22 11:01
트럼프의 ‘자국우선주의’를 극복하려면
美의 예멘 후티반군 공습 때 빠진 아태 동맹국은 한국뿐
남중국해 ‘항행의 자유 작전’도 10년째 불참 동맹국은 한국뿐
인간사회도 국제사회도 베푼 만큼 받는 법
트럼프 시대에는 더욱 그럴 것
[이용준, "트럼프의 ‘자국우선주의’를 극복하려면," 조선일보, 2024. 2. 14, A30쪽. 세종연구소 이사장 前 외교부 북핵대사]
한반도 주변에 ‘위대한’ 국가들이 넘쳐나고 있다. 중국의 시진핑 주석이 일찌감치 중화 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기치로 패권 도전을 선언했고,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은 ‘위대한’ 러시아 제국의 부활을 위해 빼앗긴 땅을 수복하겠다며 3년째 우크라이나 전쟁을 이어가고 있다. 그 뒤를 이어,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겠다는 ‘MAGA(Make America Great Again)’의 횃불을 들고 트럼프 전 대통령이 백악관 재입성을 향해 진군 중이다.
마치 19세기 제국주의 시대가 부활하기라도 한 듯 한반도가 온통 ‘위대한’ 주변국들에 둘러싸이고 그들이 상호 대립하는 신냉전 체제가 깊어지고 있다. 그 사이에 끼여 상충하는 압박과 요구에 직면하고 있는 한국의 입장은 고달프다. 안보는 미국에 의존하고 경제는 미국의 적국 중국에 의존했던 모순된 정책은 이제 설 땅이 없고, 한국이 원하건 원치 않건 선택이 불가피한 시대가 왔다. 게다가 당선 가능성이 점증하는 트럼프 전 대통령의 백악관 복귀가 초래할 ‘미국우선주의’로의 정책 전환은 냉전 이래 70년간 한미동맹의 일방적 수혜에 안주해 온 한국 외교에 심각한 도전이 되고 있다.
한국은 오랜 세월 미국, NATO, 호주, 일본 등으로 이루어진 자유민주진영 동맹 체제의 일원이었다. 미국이 주도해 온 이 동맹 체제는 과거 로마 시대의 동맹 체제와 매우 흡사하다. 공화정 시대 전성기의 로마는 이집트 등 6개 동맹국과 18개 속주로 구성된 연합체였다. 로마는 패권국임에도 불구하고 동맹국 내정에 간섭하지 않고 세금도 받지 않았으나, 동맹국이 침공을 당하면 군대를 파견해 지원했다. 당시 로마가 그런 군사적 보호의 대가로 동맹국에 요구한 조건은 지극히 너그러웠다. 로마가 전쟁에 나갈 때 병력을 제공할 의무와 로마의 다른 동맹국을 침공하지 않을 의무가 전부였다. 그런 너그러운 동맹 조건 덕분에 로마의 패권은 다른 어느 패권국보다 오래 지속될 수 있었다.
그러한 로마식의 개방적 동맹 개념을 승계한 미국은 냉전 시대 40년간 자유민주진영 전체에 막대한 군사적, 경제적 보호막을 제공했고 한국은 그 대표적 수혜국이었다. 그러나 탈냉전 후 30년간 지속된 세계화의 시대에 미국의 일부 동맹국들은 미국의 군사적 보호에 의존하면서도 자국의 경제적 이익 극대화를 위해 미국의 잠재적 적국인 중국, 러시아와 손잡고 그들의 전략적 이익에 봉사했다. 그 대표적 사례는 유럽의 독일과 아시아의 한국이었다. 국력이 점차 쇠퇴해 가는 탈냉전 시대의 미국이 직면했던 이런 배신적 상황에 대해 정면으로 분노의 칼을 뽑았던 것이 트럼프 전 대통령이었다.
‘자국우선주의’라 비난받는 트럼프 대외 정책의 핵심은 미국의 이익이 없는 곳에 일방적 안보지원을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미국의 안보지원을 받으려면 그에 상응하는 기여를 제공하고 자주국방을 강화하라는 것이다. 그에 대한 동맹국들의 볼멘 불평에도 불구, 미국을 대체할 더 좋은 옵션은 없는 것이 현실이다. 미국 대신 중국이나 러시아의 안보지원을 받으려면 아마도 주권이나 영토를 담보로 제공해야 할 것이다. 또한 ‘자국우선주의’는 세계적 공통 현상이며, 한국도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나라다. 미국의 안보지원을 70년간 받고도 자국의 현안에만 매몰돼 남중국해, 대만 등 미국의 핵심 관심사에 무관심하고 방위비 분담금을 한 푼이라도 더 깎는 게 애국이라 칭송받는 한국도 철저한 ‘자국우선주의’ 국가다.
트럼프 전 대통령 재임 기간 중 중국의 대만 침공이 현실화하고 북한이 그에 편승해 군사행동을 벌일 경우 미국의 군사지원이 가능할지 걱정하는 이가 많다. 국제사회는 인간 사회와 마찬가지로 베푼 만큼 받는 사회고, 트럼프의 시대엔 더욱 그럴 것이다. 한국 외교가 트럼프 시대의 격랑을 헤쳐가는 데 필요한 지혜는 먼 곳에 있지 않다. 한국민의 세계관 깊은 곳에 자리한 ‘자국우선주의’를 극복하고 우리가 미국에 바라는 만큼의 상응하는 기여를 미국과 국제사회에 제공하는 것이 최선의 길이다. 이달 초 미국의 예멘 후티반군 공습에는 아태 지역의 호주, 뉴질랜드, 캐나다도 8개 연합국의 일원으로 동참했다. 파병이 금지된 일본을 제외하면 미국의 아태 지역 동맹국 중 빠진 나라는 한국뿐이다. 미국의 남중국해 ‘항행의 자유 작전’에 10년째 불참하는 동맹국도 한국뿐이다. 트럼프의 ‘자국우선주의’만 비판할 때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