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 건달’ 개탄했던 어느 사회주의자의 訃告
2024.05.02 11:13
[홍세화, 사회주의자]
‘민주 건달’ 개탄했던 어느 사회주의자의 訃告
문재인·586 비판했던 ‘톨레랑스’ 지식인 홍세화… 죽음 목전에도 總選 투표
‘진보 참칭’해온 인사들의 더없이 화려한 부활에 그의 격문이 떠올랐다
‘한국 사회 어디에서 수치심 찾을 수 있나’
[김윤덕, "‘민주 건달’ 개탄했던 어느 사회주의자의 訃告," 조선일보, 2024. 4. 24, A30쪽. 선임기자]
홍세화를 만난 건 작년 이맘때다. 암 투병 소식에 일면식도 없는 그에게 무턱대고 문자를 보냈었다. 답장을 기대한 건 아니었다. 사회주의자인 그는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란 책으로 세상에 이름을 알린 뒤 조선일보에 줄곧 비판적 태도를 견지해왔다. 그런데 두 시간 뒤 문자가 울렸다. 홍세화였다. ‘사람과 사람의 만남은 소중합니다’라면서도 인터뷰를 전제로 한 만남은 아니길 바란다고 했다.
사흘 뒤 우리는 광화문의 한 찻집에 마주 앉았다. 그는 일산에서 전철을 타고 왔다. 암 4기로 진단받았지만 생수를 사러 마트에 갈 때만 빼고 웬만하면 걸어 다닌다고 했다. 담배는 끊지 않았다고 했다. 암으로 죽는 것보다 암 스트레스로 죽는 사람이 더 많다며. 그는 온화하고 유머가 있는 남자였다.
우리는 주로 파리 생활과, 40대 중반인데도 결혼하지 않는 그의 두 자녀 이야기, 서울대 문리대 연극반 시절의 추억을 두서없이 나눴다. 십수 년 전 프랑스를 여행할 때 파리의 택시 운전사들에게 당한 수모를 들려주자 자기 일인 양 미안해하기도 했다.
차가 다 식을 무렵 기어이 불편한 질문을 던졌다. 조국 사태 이후 그가 일관해온 ‘진보 저격’에 관하여. 홍세화는 문재인 전 대통령이 부동산, 미투, 산업재해, 성 소수자 등 불편한 질문엔 침묵하면서, 국민청원게시판으로 ‘상소’나 받는 ‘임금님’이라고 비판해 파장을 일으켰었다.
파리로 돌아가 택시 운전이나 하라는 맹비난에도 그는 멈추지 않았다. 586 운동권을 “제대로 공부한 것도 아니고, 돈 버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도 모르는 민주 건달”이라 일갈하는가 하면, “모든 수단을 총동원해 ‘기회의 사재기’를 한 가족을 위해 ‘우리가 조국이다, 추미애다’를 외치는 이들은 대체 어떤 멘털인가” 개탄했다. 자신이 몸담아온 언론사 간부가 대장동 일당과 수억원대 돈 거래를 한 사건에 분노해 1인 시위를 했던 그는 “진보의 가치가 소멸되고 있다”며 끝내 절필했다.
찻잔을 만지며 홍세화가 말했다. “그땐 정말 빡쳤죠. 사회주의를 욕먹이고 진보를 참칭한 이들에게. 적어도 좌파 지식인이라면 ‘아, 이건 내가 해선 안 되는 거야’라는 원칙이 있어야 해요. 주식 투자, 펀드, 신분을 대물림하려 편법을 쓰는 것…. 부끄러움은 느껴야죠.”
그날 홍세화가 가장 길게 이야기한 건 ‘장발장’이었다. 장발장은 벌금 낼 돈이 없어 교도소에 온 이들에게 무이자, 무담보로 벌금을 빌려주는 은행이다. ‘장발장 은행장’이라 적힌 명함을 건넨 그는 신청자가 너무 많아 후원금이 못 따라가는 형편이라며, 좌우 할 것 없이 가난한 민중들 삶엔 도무지 관심이 없는 권력자들에게 화가 치민다고 했다.
홍세화를 마지막으로 본 건 그해 5월 김지하 1주기 시화전에서다. 조용한 성품 때문인지, 진보를 향해 쏟아낸 독설 탓인지 그는 외로워 보였다. 이른바 민주 진영 동지들과 왁자하게 인사를 나누는 대신 김지하의 유작을 홀로 응시하다 어느새 사라졌다.
그는 곧 가족을 만나러 파리에 간다고 했었다. 파리에 가면 일요일 새벽 4시에 차를 몰고 파리의 도심을 질주할 거라고도 했다. 30년 전 파리에서 택시 운전을 하며 터득한 유일한 낙(樂)이었다. “하지(夏至)라 새벽 4시면 동이 터요. 토요일 밤 다들 신나게 놀다 잠들어서 일요일 새벽의 파리는 텅 비어 있지요. 떠오르는 태양에 서서히 자태를 드러내는 도시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내 고단한 운명과 대조돼 그때는 연방 주먹으로 눈물을 훔치며 달렸었죠. 콩코드 광장을 지나 센 강을 건너 생제르맹 대로로, 바스티유를 거쳐 레퓌블리크를 지나 개선문까지.”
전태일의 죽음을 보고 사회주의자가 됐다는 홍세화는 남민전 사건에 연루돼 프랑스로 망명해 살면서 톨레랑스(관용)에 눈떴다. 서로의 차이를 차별과 억압의 근거로 삼아선 안 된다는 관용, 힘의 투쟁보다 대화, 처벌보다 포용을 역설해온 그는, “조선일보가 사회적 약자들, 소외 계층의 편에 서주길 바란다”는 부탁도 잊지 않았다.
홍세화의 부고(訃告)는 총선 직후 들려왔다. 부고의 한 대목에 시선이 멎었다. 암과 사투하던 와중에도 사전투표를 하러 병원을 나섰다는 것이다. 죽음을 목전에 두고 그는 무엇을 위해 투표장으로 간 걸까. 그의 한 표는 세상을 바꾸었을까. 총선 후 우리가 아는 ‘화려한’ 면면의 인사들이 정치적으로 부활하는 모습을 보며 홍세화가 그의 책에 쓴 한 줄 격문이 가슴을 때렸다. ‘지금 한국 사회 어디에서 수치심을 찾을 수 있단 말인가. 약삭빠른 냉소로 가득한 이 도시에 온통 탁류가 흐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