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 애치슨 라인, 2025 트럼프 라인
2024.08.02 11:50
[트럼프 라인]
1950 애치슨 라인, 2025 트럼프 라인
위기 딛고 더 강해진 美 스트롱맨
"한 시대 종언 때 등장하는 인물"
측근 '한국 중시' 발언에 안심말고
방어선 바꿀 가능성에도 대비해야
[이하원, "1950 애치슨 라인, 2025 트럼프 라인," 조선일보, 2024. 7. 18, A31쪽. 외교담당 에디터]
2017년 11월 방한한 트럼프 미 대통령의 첫 행사는 평택 미군 기지 캠프 험프리스 방문이었다. 이곳은 해외 미군기지 중 최대 규모다. 주한미군사령부와 제2보병사단을 비롯, 주한 미군 가족 등 4만 명이 거주하는 초대형 복합기지다. 중국 산둥성 웨이하이시로부터 약 400km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누구라도 이곳을 둘러보면 북한은 물론 중국 견제에 유리한 요충지라는 것을 알게 된다. 당시 미 행정부 관계자들은 주한 미군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가진 트럼프가 험프리스를 시찰하면 달라질 것으로 기대했다.
결과적으로 오판(誤判)이었다. 주한 미군을 경시하는 그의 생각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트럼프 정부의 마지막 국방장관인 마크 에스퍼는 자신의 회고록 ‘성스러운 맹세’에 주한 미군 관련 에피소드를 상세하게 기록해 놓았다. 트럼프가 주한 미군 철수를 자꾸 주장하자 폼페이오 국무장관이 “(1기 때는 다른 일로 바쁘니) 주한 미군 철수는 두 번째 임기 우선순위로 합시다”라고 하자, 트럼프가 “그렇지, 두 번째 임기”라고 했다는 얘기도 기록돼 있다.
이 때문에 최근 트럼프 재선을 준비하는 미국우선주의정책연구소(AFPI) 관계자들이 방한했을 때 관련 질문이 쏟아졌다.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기용 가능성이 거론되는 프레드 플라이츠 AFPI 부소장은 “트럼프가 당선되면 주한 미군 철수나 감축은 없을 것”이라고 안심시켰다. 시진핑 중국 주석의 3연임 독재,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북한의 계속적인 도발로 상황이 바뀌었다는 것이다. 장호진 국가안보실장도 우려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과연 그럴까. 트럼프의 자유주의 국제 질서 무시, 주한 미군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엔 일관성이 있어서 그의 참모들 발언을 믿기 어렵다는 평가가 많다. 트럼프가 주한 미군에 대한 입장을 밝힌 것은 199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34년 전 ‘플레이보이’와 인터뷰에서 주한 미군이 “부당하게 대우받고 있다”며 왜 한국에 있느냐고 했다. 가장 최근엔 지난 5월 시사주간지 타임 인터뷰에서 “위험한 곳에 (주한) 미군이 있다. 말도 안 된다. 한국은 부유한 나라다. 왜 우리가 누군가를 방어해야 하냐”고 했다. 이런 트럼프에게 방위비를 얼마쯤 인상해준다고 오랜 생각이 바뀔지 의문이다.
주한 미군 존재 의의를 일관되게 폄하하는 트럼프의 발언을 듣다 보면 1950년 한국을 미국의 방어선에서 제외한 애치슨 라인을 떠올리게 된다. 한반도를 김일성의 동족살해(同族殺害) 남침으로 이끈 애치슨 라인의 함의는 간단하다. 미국 입장에서는 한반도를 버려도 일본이 태평양의 방파제처럼 버티고 있기에 크게 걱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트럼프는 주일 미군의 방위비 분담금이 적다고 불평하면서도 주한 미군에 대해서처럼 철수를 명시적으로 언급한 적은 없다. 그는 2019년 5월 일본의 나루히토가 등극한 지 한 달도 안 돼 국빈으로 초대돼 일본의 극진한 ‘오모테나시’(환대)를 만끽했다. ‘보물 같은 미일 동맹’이라고 말할 정도로 일본을 신뢰한다. 트럼프는 재집권 시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재협상을 기정사실화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그가 주한 미군 철수 또는 감축을 협상 테이블에 던져 놓으며 애치슨 라인과 유사한 ‘트럼프 라인’을 추진할 가능성이 없다고 할 수 있나.
지난 13일 총탄이 오른쪽 귀를 ‘관통’하는 상황에서도 오른손을 번쩍 치켜들며 “싸우자”는 트럼프를 봤을 때 소름이 돋았다. ‘스트롱 맨’이 사실상 재선될 가능성이 급상승한 순간, 앞으로 어느 누구도 그를 막을 수 없겠다는 생각이 스쳐갔다. 헨리 키신저는 “트럼프는 역사상 한 시대가 종언을 고할 때 등장해 그 시대의 가식을 벗겨 내는 인물일 수 있다”고 했다. 트럼프 2기 시대의 대한민국 활로에 대한 대전략(Grand Strategy)을 고민하고 또 고민할 시간이 성큼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