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미니안주의에 대해 질문드립니다
2010.07.09 14:00
김효성 목사님께!
안녕하세요! 목사님!
목사님께 중요한 질문이 있어서 글을 씁니다.
저에게 지금 전도사를 하고 있는 한 친구가 있습니다.
그 친구는 한세대학교 신학대학원을 졸업했고, 그에 따라
알미니안주의와 오순절 교파를 지향합니다.
그 친구와 식사를 하다가 장로교에 대한 얘기가 나오고,
그 친구가 칼빈의 생애와 예정론(선택과 유기의 교리)에 대해
부정적으로 언급했습니다. 그 때 친구는 칼빈이 제네바를 폭정으로
통치했으며 세르베투스를 직접 화형에 처했다는 말도 했습니다.
저는 몇 일동안 그 친구와 e-mail이나 전화로 칼빈의 생애와 예정론에 대해
많은 말을 했습니다. 그 친구는 칼빈의 행적과 예정론에 대해 위와 같이 일관되게
말했습니다.
몇일 후 서로가 그런 대화에 지쳐갈 때쯤 그 친구가 저에게 e-mail을 보냈습니다. 그 내용은
알미니안주의 입장에서 예정론, 제한적 속죄, 성도의 견인을 매우 심하게 비판하는 글입니다.
'인간의 전적 타락'과 '저항할 수 없는 은혜'도 다소 비판하는 것 같습니다.
목사님께 보여드리기 위해 그 e-mail을 파일로 만들었고, 업로드했습니다.
저는 우선 이러한 주장에 반대합니다. 그러나 저는 평신도이고 개혁주의 신학에 대해 많이 알지
못하기 때문에 어떻게 반론을 해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목사님께 정중히 문의를 드립니다.
내용은 좀 긴 편입니다. 많이 바쁘시겠지만 시간을 내셔서 읽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이 글의 문제점과 오류는 무엇으며, 이렇게 주장하는 자에게 어떻게 반론을 할 수 있는지
말씀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짧게 써 주셔도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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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대
2010.09.16 1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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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ldfaith
2016.03.17 15:25
http://www.oldfaith.net/02sys.htm
http://www.oldfaith.net/05others/01outline.htm
주의 이름으로 문안드립니다.
요즘은 매우 바쁜 시기이어서 보내주신 글에 대해 자세하게 답변할 시간적 여유를 제가 갖지 못함을 양해해 주십시오.
그러나 그 글을 대충 보니 그것은 알미니안주의자들의 일반적 주장인 것 같습니다.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에 관해서는 역사상 많은 토론을 통해 어느 사상이 성경적이고 논리적인지는 이미 확증된 바라고 믿습니다. 이것은 형제를 포함하여 개혁신앙을 가진 수많은 목사들과 평신도들의 공통적 신념입니다.
그 내용은 개혁주의 조직신학들에 나와 있습니다만, 그 요점을 저의 <기독교교리개요>나 <조직신학>에서 인용하는 것으로 답글을 대신하겠습니다.
칼빈주의(개혁주의)와 알미니안주의의 차이점은 다음 다섯 가지 교리에서이며 그것을 성경적으로 확증하면 모든 문제의 대답이 될 것입니다.
1. 인간의 전적 부패와 무능력
아담의 첫 범죄의 죄책이 모든 인류에게 전가되었을 뿐 아니라, 또한 그 범죄로 인한 부패성이 그들에게 전달되었다. 아담의 첫 범죄로 인한 인간 본성의 부패성은 흔히 전적 부패성과 전적 무능력이라 불린다. 원죄로 인해, 사람은 지정의(知情意) 전체에 있어서 전적으로 부패되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잃어버리고 그 대신 육신적이고 세상적인 욕망들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사람은 때때로 사람의 표준에서 선하게 보이는 일들을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 회개와 믿음이나, 구원에 이르게 할 선과 의를 행하기에 무능력해졌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6:2은 말하기를, “이 죄(원죄)로 말미암아 그들은 그들의 본래의 의와, 하나님과의 교제로부터 떨어졌고, 그래서 죄로 인하여 죽게 되었으며, 영혼과 몸의 모든 기능들과 부분들에 있어서 전적으로 더러워졌다”고 했다.
성경은 사람의 전적 부패성을 밝히 증거한다. 대표적 성경 구절들은 다음과 같다. 창세기 6:5,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이사야 64:6, “대저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義)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예레미야 17:9,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아누쉬, '절망적이게 사악한'[KJV], ‘치료할 수 없는’[NIV]) 것은 마음이라.” 시편 58:3, “악인은 모태에서부터 멀어졌음이여 나면서부터 곁길로 나아가 거짓을 말하는도다.” 로마서 3:10-12,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고린도전서 2: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 분별됨이니라.” 에베소서 4:18, 19,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저희가 감각 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성경은 또한 사람의 전적 무능력도 증거한다. 구약의 역사 전체가 이 사실을 증거한다. ① 창세기는 노아 시대의 세상이 결국 홍수 심판으로 멸망했음을 증거한다. ② 민수기는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 40년 동안 계속 하나님을 불신앙했고 하나님께 불평하고 불순종했음을 증거한다. ③ 사사기는 그 시대에 이스라엘의 반복된 실패의 역사를 증거한다. ④ 왕국의 역사서들은 이스라엘의 왕국이 결국 멸망했음을 증거한다. ⑤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는 바벨론 포로 생활로부터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이 또 다시 범죄했음을 증거한다. ⑥ 말라기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구약의 맨 마지막 때까지 여전히 하나님께 범죄하고 불순종했음을 증거한다.
특히, 다음의 여러 성경 구절들은 사람의 전적 무능력을 직접 언급하고 있다. 예레미야 13:23, “구스인이 그 피부를, 표범이 그 반점(斑點)을 변할 수 있느뇨? 할 수 있을진대[만일 할 수 있다면]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 [비교] 신명기 30:11, 14,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한 이 명령은 네게 어려운 것도 아니요 먼 것도 아니라 . . . 오직 그 말씀이 네게 심히 가까와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 ‘어려운 것이 아니라’는 말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아니라’는 뜻이며,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다’는 말은 ‘네가 이를 행하도록 [네 마음에 있다]’는 뜻이다.
요한복음 15: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로마서 5:6,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로마서 7:18,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로마서 8:7, 8,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에베소서 2:1,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2. 하나님의 무조건적 선택(이중예정)
하나님께서는 만세 전에 세상의 모든 일들을 계획하시고 작정하셨으며 특히 구원얻을 사람들을 선택하시고 예정하셨다. 이것은 놀라운 진리이다.
[세상의 모든 일들에 대하여]
하나님은 만세 전에 그의 가장 지혜롭고 거룩한 뜻에 따라 세상에 되어질 모든 일을 자유롭게 또 불변적으로 작정하셨다. 시편 115:3,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셨나이다." 시편 135:6, "여호와께서 무릇 기뻐하시는 일을 천지와 바다와 모든 깊은 데서 다 행하셨도다." 이사야 46:9-11, "내가 종말을 처음부터 고하며 . . .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 . . . 경영[계획]하였은즉 정녕 행하리라." 다니엘 5:23, "왕[바벨론의 벨사살 왕]의 호흡을 주장하시고 왕의 모든 길을 작정하시는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리지 아니한지라." 로마서 11:36,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러나 하나님의 작정은 제2원인의 자유나 우연을 부정하지 않고 오히려 인정한다. 그러므로 성경의 예정론은 세상의 숙명론과 다르다. 빌립보서 2:13,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열왕기상 22:34, "한 사람이 우연히 활을 당기어 이스라엘 왕[아합]의 갑옷 솔기를 쏜지라." 이 일은 선지자 엘리야를 통해 하신 하나님의 예언을 성취하였다. 잠언 16:33, "사람이 제비는 뽑으나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
또 하나님의 작정의 진리는 사람의 도덕적 책임을 무시하지 않는다. 모든 사람은 회개하고 믿어야 하며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게, 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야 할 책임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작정을 믿는 동시에 도덕적 책임을 다하는 성실한 인격자가 되어야 한다.
특히, 작정과 죄와의 관계에 있어서,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타락과 죄까지도 작정하셨으나, 죄를 만드신 자는 아니시다. 사람은 자신의 죄의 책임을 하나님께 돌릴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지극히 거룩하시고 그에게는 불의나 거짓이 없으시기 때문이다. 사무엘상 2:25,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엘리의 아들들]을 죽이기로 뜻하셨음이었더라." 누가복음 22:22, "인자는 이미 작정된 대로 가거니와 그를 파는 그 사람[가룟 유다]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이와 같이, 성경은 하나님의 작정과 사람의 도덕적 책임을 동시에 증거한다.
[사람의 구원에 대하여]
사람의 구원에 관한 하나님의 예정(predestination)은 이중적이다. 그것은 선택하심과 버려두심(유기, 遺棄)을 포함한다.
하나님께서는 만세 전에 자신의 전적 긍휼과 은혜로 인류 가운데 어떤 이들을 죄에서 구원하여 영생에 이르도록 무조건적으로 선택하셨다. 사실, 선택이라는 말 자체가 하나님의 무조건적 선택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선택이 사람의 회개나 믿음에 근거한 것이라면, 그것은 참된 의미에서 하나님의 선택이 아니고 사람의 선택이 될 것이다.
요한복음 6:37, 39, 44, "내게 주신 자." 요한복음 10:26-27, "내 양." 사도행전 13:48,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로마서 9: 16, 18,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 에베소서 1:4-6,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 . .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에베소서 1:11,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디모데후서 1:9,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하나님께서는 인류의 나머지 사람들을 그들의 죄와 멸망 가운데 버려두셨다. 어떤 이들을 선택하셨다는 사실은 다른 이들을 버려두셨다는 사실을 내포한다. 그러나 버려진 자들은 자신의 죄로 인해 멸망을 당하는 것이므로 결코 하나님께 불평을 할 수 없다. 로마서 9:18,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 로마서 9:22,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 사무엘상 2:25,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엘리의 아들들]을 죽이기로 뜻하셨음이었더라." 누가복음 22:22, "인자는 이미 작정된 대로 가거니와 그를 파는 그 사람[가룟 유다]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베드로전서 2:8, "저희가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저희를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 유다서 4, "이는 가만히 들어온 사람 몇이 있음이라. 저희는 옛적부터 이 판결을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니."
이와 같이, 우리의 구원은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무조건적 선택에서 나온 것이다. 하나님께서 어떤 이를 선택하신 증거는 그가 진실히 죄를 회개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다. 우리의 구원이 확실하고 안전한 까닭은, 그것이 우리의 변덕스런 결심에 근거하지 않고 하나님의 불변적 예정과 선택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3. 그리스도의 제한적 속죄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는 세상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었는가, 아니면 오직 하나님의 택한 자들을 위한 것인가? 그의 십자가의 죽음은 세상 모든 사람의 죄를 대속(代贖)한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택한 자들의 죄만 대속한 것인가? 감리교회는 예수께서 세상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셨고 하나님은 세상의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를 원하시지만 단지 그들이 믿지 않기 때문에 구원받지 못하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이것을 '보편속죄론'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 장로교회는 하나님의 구원 의지나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가 제한적이라고 가르친다. 이것을 '제한속죄론'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제한속죄론이 성경적이라고 믿는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사람의 구원은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달려 있음]
첫째로, 사람의 구원은 긍극적으로 하나님께 달려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사람의 구원을 포함하여 세상의 모든 일을 그의 기쁘신 뜻대로 계획하시고 행하시는 절대주권자이시다. 사람의 구원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다. 하나님은 실제로 죄인을 구원하시는 구주이시다. 시편 3:8,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로마서 9:18,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리라." 요한복음 6:44,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느니라." 그러므로 만일 하나님께서 인류 전체를 구원하시려고 뜻하셨다면, 그렇게 하셨을 것이다. 우리는 인류 전체를 구원하실 능력이 하나님께 있다고 믿는다. 마태복음 19:26,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 그러나 실상 인류 전체가 구원받지 않는 것을 보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구원은 제한적임]
둘째로, 사람의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구원 의지가 제한적이라는 사실은 성경의 분명한 진리이다. 하나님은 구약 시대에 이방인들과 구별하여 이스라엘 백성에게 특별한 사랑을 베푸셨다. 또 성경 전체에 밝히 증거되어 있는 선택의 진리는 하나님의 구원 의지의 제한성을 증거한다. 요한복음 6:37,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요한복음 10:15,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요한복음 10:26,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요한복음 17:9,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또 성경에 빈번한 '우리' 또는 '많은'이라는 표현들은 하나님의 제한적 구원 의지를 암시한다(사 53:5-6, 8, 11; 마 20:28; 26:28 등).
보편속죄론은 성경의 어떤 구절에 호소한다. 그러나 성경이 하나님의 구원 의지의 제한성을 분명히 계시하기 때문에, 그런 구절은 이런 빛 아래서 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에스겔 18:23, "내가 어찌 악인의 죽는 것을 조금인들 기뻐하랴? 그가 돌이켜 그 길에서 떠나서 사는 것을 어찌 기뻐하지 아니하겠느냐?"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악인들에게 회개를 명하시는 것은 그들의 멸망을 기뻐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며 따라서 회개치 않는 악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의롭고 공평하며 아무도 그것을 불평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디모데전서 2:4, 6,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속전으로 주셨으니"라는 말씀에서, '모든 사람'은 반드시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이 아니고 제한적 혹은 대략적 의미의 '모든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디모데전서와 후서에서 '모든'이라는 말은 그런 제한적 혹은 대략적 의미를 가진다(딤전 2:1; 4:15; 5:20; 딤후 1:15; 4:16 등 참조). 그러므로 본문에서 '모든 사람'은 ① 이방인과 유대인을 통틀어 모두를 가리키든지, ② 각계 각층의 사람 모두를 가리키든지, ③ 엄밀한 의미에서 택함받은 사람 모두를 가리킬 수 있을 것이다.
베드로후서 3:9,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는 말씀에서, '너희'는 구원받은 혹은 구원받을 신자들에 대한 말씀이므로 제한속죄론과 충돌되는 것이 없고 또 보편속죄론을 지지하는 구절이라고 볼 것도 아니다.
[속죄는 실제로 죄의 형벌을 받는 것]
셋째로, 속죄의 본질 때문이다. 즉 속죄(贖罪)는 가상적인 어떤 것이 아니고, 실제로, 역사적으로, 객관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형벌을 받으셨고 죄값을 다 지불하신 것이다. 사도행전 20:28, "하나님께서 자기 피로 사신 교회." 히브리서 10:12,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고린도후서 5: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義)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갈라디아서 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그러므로 만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 모든 사람의 죄를 속하셨다면, 모든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최종적 지옥 형벌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고, 모든 사람이 다 구원받게 될 것이다. 즉 보편속죄론은 보편구원론으로 나아간다. 그러나 보편구원론은 명백히 비성경적이다. 그러므로 속죄의 본질상,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는 제한적이다.
4. 불가항력적 은혜(구원[중생]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임)
성경은 구원을 또한 중생(重生, 거듭남)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중생이란, 죄로 죽었던 영혼이 다시 살아나는 것이다. 죽었던 영혼이 다시 산 결과, 중생한 자의 마음은 근본적으로 새로워진다. 그는 새 사람이 되고 새 마음을 가지게 된다.
성경은 중생을 ‘하나님께로서 남,’ ‘거듭남,’ 혹은 ‘성령으로 남’이라고 표현한다. 요한복음 1:13,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요한복음 3:3,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요한복음 3:5, 6,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야고보서 1:18,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아페퀴에센).” 디도서 3:5, “중생의(팔링게네시아스 παλιggενεσίας)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초대교회의 어거스틴은 중생과 회심을 구별하여 중생은 마음의 시초적 변화로서 하나님의 단독적(憺的, monergistic) 사역이며, 회심은 중생에 따라오는 것이라고 보았다. 중생을 하나님의 단독적, 주권적 사역으로 본 것은 성경적이다. 그것은 종교개혁자 루터나 칼빈의 사상이었고, 오늘날 개혁신학의 기본 입장이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중생과 칭의를 명확히 구별하지 않았다.
초대교회의 펠라기우스는 중생을 사람이 자기 생활과 습관을 도덕적으로 개선하는 행위 정도로 보았다. 현대 자유주의 신학은 본질적으로 이와 같은 견해를 가진다. 교회 역사상 어떤 이들은 중생을 하나님과 사람의 협력으로 이루어지는 사건으로 보았다. 이런 견해를 신인협력설(神人協力說, synergism) 혹은 반(半)펠라기우스주의(Semi- Pelagianism)라고 부른다. 근세에 나타난 알미니우스주의는 본질적으로 이런 견해와 같다. 한편, 천주교회는 사람이 세례를 통해 부패성이 제거되고 의가 주입(注入)됨으로써 중생된다고 보았다. 이것을 세례중생설 혹은 주입은혜의 교리라고 한다.
중생은 하나님의 주권적 행위이다. 사람은 영적으로 죽어 있고 전적으로 부패되고 무능력해져 있다. 로마서 3:11,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예레미야 17:9,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예레미야 13:23, “구스인이 그 피부를, 표범이 그 반점을 변할 수 있느뇨?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
죽은 영혼은 스스로 살아날 수 없고 하나님의 활동에 협력할 수도 없다. 죽은 자는 중생 시 스스로를 도울 수 없다. 중생에 있어서 그는 전적으로 피동적(被動的), 수동적(受動的)이다. 그것은 마치 예수께서 죽은 나사로를 ‘나사로야 나오라’고 불러내실 때 죽은 나사로가 주의 음성에 협력할 수 없는 것과 똑같다. 선지자 에스겔이 에스골 골짜기의 마른 뼈들을 향해 대언할 때도 오직 하나님의 역사로만 그것들이 다시 살아날 수 있었다(겔 37장).
그러므로 중생은 하나님의 단독적(憺的), 주권적 활동이며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이다. 중생에서 사람은 전적으로 피동적(被動的)이다. 중생에서 사람의 의지는 협력적 원인이 될 수 없다. 물론 하나님께서 단독으로 이 일을 하실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 때문이다. 성경은 사람들을 중생시키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 자신이심을 증거한다.
에스겔 11:19, “내가 그들에게 일치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영을 주며 그 몸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서 내 율례를 좇으며 내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리니.” 요한복음 1: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요한복음 3:5, “물과 성령으로(엑스 휘다토스 카이 프뉴마토스) 나지 아니하면.” ‘성령으로’(πνεύματος)라는 말은 중생에서 성령께서 원인자이심을 보인다. 에베소서 2:1, “[하나님께서] 허물들과 죄들로 죽었던 너희들을 살리셨도다.” 에베소서 2:4, 5,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에베소서 2:10,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디도서 3:5,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되 . . .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중생시키실 때 주로 복음의 말씀을 사용하신다. 따라서 성경은 말씀을 중생의 수단이라고 표현한다. 야고보서 1:18, “자기의 뜻을 좇아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베드로전서 1:23,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유아들의 경우는 다르나, 성인들의 경우, 중생은 복음을 듣고 믿는 것과 동시적이다. 그러므로 우리편에서는 오직 전도에 힘써야 한다.
5. 성도의 견인(중생한 자는 끝까지 은혜 안에 거함)
성경적 교리 체계를 신학적으로 개혁주의 혹은 칼빈주의라고 부르는데, 그 특징적 교리는 다음의 다섯 가지이다. 첫째는 사람의 전적인 부패와 무능(無能), 둘째는 하나님의 무조건적 선택, 셋째는 그리스도의 제한적 속죄, 넷째는 성령의 불가항력적(不可抗力的) 은혜, 다섯째는 성도의 견인(堅忍)이다. 이것을 칼빈주의 5대 교리라고 부른다. 이것들 중, 성도의 견인에 대해 알아보자.
[성도의 견인의 의미]
성도의 견인(堅忍, perseverance) 즉 끝까지 견딤이란, 만세 전에 하나님의 선택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救贖)되고 예수를 믿어 구원얻은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끝까지 견디어 영광에 이른다는 진리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7:1, "하나님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받으시고 그의 영으로 효력 있게 부르시며 거룩케 하신 자들은 은혜의 상태로부터 완전히 또 최종적으로 떨어져 버릴 수 없고; 그 안에서 확실히 끝까지 견디며 영원히 구원을 얻을 것이다."
어떤 이들은 이 교리를 반대하면서 주장하기를, 사람이 전적으로 부패했거나 무능해진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사람이 회개하고 예수 믿을 것을 미리 보시고 선택하셨고(조건적 선택설 혹은 예지예정론[豫知豫定論]),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 모든 사람의 죄를 속죄하셨고(보편속죄설), 사람이 성령의 은혜를 저항할 수 있고, 구원받은 성도도 중도에 실패하여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다고 하였다. 이런 사상을 알미니우스주의라고 부른다.
[성도의 견인에 대한 성경적 증거]
성도의 견인 교리는 성경적인가? 우선, 성경에 명백히 가르친 구절들이 있다. 예를 들어, 요한복음 10:27-28,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 . .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빌립보서 1:6,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로마서 11:29,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뿐만 아니라, 성도의 견인을 지원하는 몇 가지 중요한 진리가 있다. 첫째는 하나님의 선택의 불변성이다. 로마서 8:30,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는 말(에독사센 ejdovxasen)은 부정과거시제로서 미래의 확실한 사건을 나타낸다. 예정된 자들은 하나도 남김 없이 다 영화롭게 된다.
둘째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와 중보(仲保)의 완전성이다. 히브리서 10:14,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 요한복음 6: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히브리서 7:25,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셋째는, 성령의 인치심이다. 에베소서 1:13-14, "그를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救贖)하시고 [그는 그 얻으신 것의 구속의 때까지 우리의 기업의 보증이 되사--직역]." 에베소서 4:30,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인치심'은 보증이며 보장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보증된 자들은 중도(中途)에 실패할 수 없다.
[성도의 견인 교리에 대한 반론들의 반박]
성도의 견인 교리에 대해 여러 가지 반론들이 있으나 그것들은 다 그 교리를 오해한 데서 나온다.
첫째로, 어떤 사람들은 성도의 견인 교리가 "죽도록 충성하라"(계 2:10)는 등의 성화의 권면에 반대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두 내용은 서로 반대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의 성화와 견인을 위해 사람의 자발적 행위를 수단으로 사용하신다.
둘째로, 어떤 사람들은 성도의 견인 교리가 나태와 방종으로 인도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성도의 견인은 우리편의 근면과 성실한 노력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뿐 아니라, 성도 견인의 확신은 성도에게 성화를 위한 큰 위로와 힘이 된다.
셋째로, 어떤 이들은 성도의 견인 교리가, "하나님이 원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롬 11:21)는 배교(背敎)에 대한 경고와 반대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배교의 경고가 배교의 가능성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의 성화를 위해 경고를 수단으로 사용하신다.
넷째로, 어떤 이들은 성도의 견인 교리가 믿음에 관해 파선한 후메내오와 알렉산더(딤전 1:19-20) 같은 배교(背敎)의 실례들에 반대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배교자들이 한 때 교회 안에 있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그들이 참으로 중생하고 구원얻은 자이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예수를 판 가룟 유다는 처음부터 예수를 믿지 않는 자이었고(요 6:64) 깨끗하게 죄 씻음을 받지 못한 자이었다(요 13:10-11).
이단을 연구하시는 분께서 이 file의 글은 통일교나 JMS에 속한 자가 쓴 글이 분명하다고
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