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 정부가 경제성장과 양극화 해소의 만병통치약으로 시행해온 소득 주도 정책이 역효과를 내고 있다. 그 결과 고용·소비·투자에 충격이 가해지고 소득 격차는 더 벌어지고 있다. 정부는 그러나 이 정책을 고수하며 더 강력하게 밀고 나갈 것임을 천명하고 있다.
그것은 한국 경제에 되돌아갈 수 없는 구조적 문제가 있다고 집권층이 확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믿음의 중심에는 대기업 중심 경제로 분배가 왜곡돼 저소득층의 소득이 더 적어지고, 이에 따른 소비 부진과 기업 투자 부진이 연쇄 발생하고 있다는 가설이다. 이른바 '재난적 양극화'가 만악(萬惡)의 근원이라는 얘기다.
장하성 청와대 정책실장은 '왜 분노해야 하는가?'라는 저서 등을 통해 이 문제를 줄기차게 정치권과 대중에게 설파해 왔다. 어떤 문제에 대해 사람이 지나친 신념을 갖게 되면 사실을 자신의 믿음과 부합하는 자료로만 선택하는 '확증 편견'과 자기의 이익과 자존심에 맞는 사실만을 강조하는 '자기 위주 편향'을 갖게 된다. 장 실장의 강변은 이 두 가지 편파성을 드러내고 있다.
무엇보다 그가 제시하는 통계 해석과 그런 결과가 나오게 된 구조적 원인에 대한 이해는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 선동과 조작 수준에 가깝다. 특히 그가 주장하는 우리나라의 '재난적 양극화'라는 주장은 어느 통계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경제적 양극화를 해석하는 지표 가운데 세계적으로 가장 보편적이며 정확한 '지니계수'를 적용할 때, 우리나라의 소득 분포는 전 세계 국가에서 상위 10% 안에 든다. OECD 국가 중에서도 중위권이며, 인구 5000만명이 넘는 나라 가운데는 지난해 기준으로 한국·독일·프랑스 3국이 제일 낮다. 그만큼 소득 양극화가 약하고 양호하다.
둘째로 소득 격차 확대를 무조건 나쁜 것으로 이해하는 것도 잘못됐다. 경기(景氣)가 좋아서 실업자들이 일자리를 얻으면, 이들은 소득의 아래 단으로 진입해 취업자 간 소득 격차가 확대되는 게 일반적이다. 고용률이 높아져 소득 격차가 커지는 것은 독일이 노동 개혁 이후 경험했던 현상으로 실업 상태보다 긍정적이다. 독일은 고용률이 높아지면서 소득 격차는 확대됐으나 실업률이 줄어 국민은 더 부유하고 경제는 최강이 되었다.
기업의 임금 소득 배분율이 낮아지는 게 '기울어진 운동장'의 증거라는 장 실장의 주장 역시 왜곡이거나 무지(無知)의 산물이다. 산업의 중심이 노동 집약에서 자본·기술 집약 위주로 이행하면 기업이 만드는 부가가치 중에 임금 비중이 낮아진다. 그리고 기업이 국제적으로 성공하면 여러 나라 근로자를 고용하기에 자국의 임금 비중도 낮아진다.
1970년 대비 2014년까지 모든 선진 20개국(G20)의 임금 소득 배분율이 낮아진 게 이를 증명한다. 2000년부터 2014년 사이에 배분율이 높아진 나라는 최근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한 아르헨티나와 경제 파탄으로 혼란을 겪는 브라질뿐이다.
최근 소득 주도 성장 정책 고수를 발표하면서 장 실장이 인용한 통계 해석도 상당 부분 왜곡됐다. 그는 2000~2017년에 우리 경제가 89.6% 성장했지만 1인당 국민소득은 72%, 가계 총소득은 70%, 평균 가계 소득은 32% 성장에 그친 점을 지목하며, 기업이 벌어들인 돈을 가계에 배분하는 데 인색해 양극화가 심화하고 있다는 인상을 심어주려 애썼다. 그러나 평균 가계 소득이 확연하게 준 것은 우리나라 가구의 분화에 기인한다. 2000년 1431만이던 우리나라 가구 수는 지난해 1967만으로 37% 증가했고, 평균 가구원은 3.1명에서 2.5명으로 줄었다. 이로 인해 나타나는 통계적 착시 현상일 뿐 기업의 임금 배분과 무관한 것이다.
우리나라의 소비 부진과 투자 부진을 양극화에서 찾고 있는 것도 사실에 맞지 않는다. 우리나라 가계는 2010년부터 가처분 소득 대비 소비 비중이 계속 줄고 있는데, 이는 소득 배분과 무관하게 국민이 미래가 불안해 지갑을 닫고 있기 때문이다. 기업의 투자 부진 역시 경제 인구의 약 80%가 종사하는 서비스 업종에서 경 제 민주화를 빌미로 한 각종 규제와 골목 시장 보호 남발로 투자가 원천 봉쇄된 게 핵심 원인이다.
통계는 현실을 보는 창(窓)이다. 그것을 왜곡하거나 오해하면 편견을 실현하는 위험한 도구가 될 뿐이다. 개인 학자의 편견은 연민의 대상이지만, 대통령의 귀를 잡고 있는 고위 공직자의 편견은 국민을 다치게 할 수 있다. 그런 일이 지금 대한민국에서 일어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