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플리 증후군'에 감염된 것인가
[신동욱, "'리플리 증후군'에 감염된 것인가," 조선일보, 2019. 2. 2, A27쪽; TV조선 뉴스9 앵커.]
지난해 4월 13일 TV조선 '뉴스9'은 '드루킹' 일당의 댓글 조작 사건 배후에 여권의 유력 정치인이 있다는 사실을 특종 보도했다. 그리고 다음 날 그 유력 정치인이 민주당 김경수 의원이라는 사실도 이어서 보도했다. 김경수가 누구인가? 노무현 전 대통령의 곁을 마지막까지 지킨 노(盧)의 남자이자 지난 대선에서 문재인 대통령을 그림자 수행한 여권 핵심 중의 핵심, 여권이 당장 발칵 뒤집혔다. 박범계 민주당 수석대변인은 "댓글 조작의 배후에 여당 의원이 있다는 보도가 있지만 내가 알아본 바로는 전혀 사실무근"이라고 주장했다. 김경수 의원 역시 "드루킹 일당이 일방적으로 자료를 보내온 것일 뿐"이라며 의혹을 일축했다.
하지만 경찰이 수집한 자료는 너무나 명백하게 김 의원을 가리키고 있었다. '드루킹' 김동원씨와 비밀 메신저를 이용해 8만건에 달하는 엄청난 양의 댓글 조작 목록을 주고받은 사실이 확인됐다. 김씨가 이끄는 단체가 대선을 전후해 집중적으로 인터넷 댓글을 조작했고 김 의원이 그들의 사무실을 방문한 사실도 드러났다. 그러나 김 의원은 자신의 직접 관련성을 부인하는 선에서 최소한의 인정을 했을 뿐 단 한 번의 사과나 유감 표명도 하지 않았다. 쏟아지는 의혹에도 "나는 알지 못했다" "그들은 단순한 지지자였을 뿐"이라고 피해 나갔다. 드루킹 일당이 만든 댓글 조작 프로그램 '킹크랩' 시연회에 참석했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어처구니없는 소설"이라고 했다. 특검은 '정치 특검'이라고 몰아붙였고 이 사건을 집중 보도한 TV조선은 소송으로 압박했다.
그러나 1심 재판부는 김경수 지사가 한 말 대부분을 사실상 거짓말이라고 판단했다. 판단의 근거로 김 지사가 부인하기 어려운 여러 객관적인 물증과 진술을 제시했다. 그런데도 김 지사의 대응은 법정 밖과 다르지 않았다고 한다. '킹크랩' 시연회가 열리던 날 주변 식당에서 식사를 했다는 운전기사의 영수증, 그리고 여러 개의 아이디를 이용해 댓글 조작 시연을 한 것으로 보이는 기록이 확인됐는데도 "나는 모른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랬던 김 지사가 자신에게 불리한 판결이 나자마자 재판장의 양승태 전 대법원장 비서실 근무 경력을 문제 삼으며 판결을 정면 부인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자신의 잘못을 곧바로 인정하는 정치인을 찾기는 쉽지 않다. 음습한 뒷골목이 아니라 사방이 유리 벽으로 둘러싸인 '초연결 정보화 사회'를 살아가는 정치인도 예외는 아니다. 모든 증거가 그를 가리키고 있어도 일단 부인부터 하고 보는 것이 정치의 생리(生理)이자 정치인들의 생존법이기 때문일 것이다. 나의 잘못은 '정치의 잘못'일 뿐이고 그래서 내가 사과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아니면 허구의 세계를 진실이라고 믿고 거짓말을 반복하는 '리플리 증후군(Repley Syndrome)'에 집단 감염되기라도 한 것일까?
드루킹 댓글 조작 사건은 김 지사 연루 여부를 떠나 그 자체로 민주주의를 위협한 중대한 범죄로 기록될 것이다. 재판부가 판결문에 적시한 것처럼 댓글 조작은 유권자의 판단 과정에 개입해 정치적 결정을 왜곡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아직 1심 판결일 뿐이고 앞으로 법률적 판단이
달라질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도 김 지사가 사과하고 자숙해야 할 이유는 차고 넘친다. 지난해 타계한 김종필 전 총리는 "정치는 허업(虛業)"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앞으로 어쩌면 김 지사의 죄(罪)보다 말이 더 오래 국민의 뇌리에 남을지도 모를 일이다. 죄는 대가를 치르면 끝나는 것이지만 정치인의 거짓말에는 공소시효가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