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법 개정, 모두가 패자(敗者)였다
2009.08.16 10:39
[윤석민, “미디어법 개정, 모두가 패자(敗者)였다,” 조선일보, 2009. 7. 24, A26쪽; 서울대 언론정보학 교수.]
그것은 한편의 참담한 코미디였다. 법안은 이미 누더기가 되어 있었다. 그것을 통과시키자고 본회의장을 사전에 점거하고 스크럼을 짜 의장석을 에워싼 이들이며, 그들을 대상으로 고함을 지르고 몸을 날리는 이들이며. 도대체 이런 악다구니의 이유가 무엇인가? 우리는 도대체 언제까지 이처럼 참담한 자기 모멸을 겪어야만 하는가?
미디어법 개정이 과연 죽기 살기로 싸울 일인가? 어느 나라 어느 입법기관을 눈 씻고 찾아보라. 컴퓨터 세대.네티즌.휴대폰 세대가 주류를 이루는 21세기 미디어 융합시대에, 미디어 간 칸막이를 허물고 미디어 발전의 동력이 되는 자본 수혈을 용이하게 하려는 법 개정안을 둘러싸고 이처럼 극단적으로 갈등하는 집단이 어디 있는가? 설사 이념의 차이로 정책대결 국면에서 한 치의 양보 없이 팽팽히 맞섰다 해도 막판 표결 진행까지 이토록 난장판을 만드는 집단이 어디 있는가?
미디어법 개정의 당위성은 다시 언급하고 싶지 않다. 법 개정을 통해 말도 안 되는 우스꽝스러운 규제를 걷어낼 필요성은 오히려 이 법 개정을 맨 앞에서 반대한 지상파 방송사업자들의 입장에서 가장 절박했다. 단적인 예를 들어보자. 종래 방송법에 따르면 대기업.신문사.외국자본은 지상파 주식을 말 그대로 단 한 주도 소유할 수 없다. 이처럼 극도로 경직된 소유제한으로 인해 발생하는 시시비비는 실로 어처구니가 없다.
얼마 전 논란이 된 대구MBC의 경우가 그중 하나다. ㈜쌍용이 동사의 지분 8% 정도를 소유하고 있다. 동사는 2006년 초순경, 주식의 70%를 모건스탠리 계열의 사모펀드에 넘겼다. 외국자본 소유 회사가 된 것이다. 그 결과 대구MBC는 이 거래행위에 대해 책임이 없음에도 외국자본의 지상파 소유를 금지하는 방송법을 정면으로 위반한 꼴이 되어 거액의 벌금을 물고 최악의 경우 사업권을 상실할 수도 있게 되었다. ㈜쌍용은 문제가 된 지분을 매각하려 했으나 현재까지 응찰자가 나서고 있지 않은 상황이다. 이러한 사례는 부지기수다.
한편에선 이 같은 코미디가 빚어지는 반면, 정작 방송행위 자체는 거의 자유방임상태로 방치해 온 것이 종래의 방송법이다. 온 국민이 소수의 독과점 지상파 방송이 전하는 내용에 따라 울고, 웃고, 기뻐하고 분노한다. 이처럼 영향력이 막대할수록 그에 따른 공정성과 책임성을 갖추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방송 현장은 사실보다 의도를 앞세우고, 이성보다 감성에 소구하며, 공정성보다 이념을 따르는 집단에 장악된 지 오래다. 선동적 포퓰리즘과 저질 상업주의의 천국이 된 방송의 횡포를 막을 장치는 거의 전무한 실정이다.
미디어법 개정은 이처럼 터무니없는 미디어의 소유 규제를 완화하되 그 책임을 강화하여 이런 문제들을 바로잡고자 함이었다. 하지만 하도 이리저리 주물러진 탓에 여당이 제출한 최종 법 개정안에서 원래의 취지는 거의 퇴색하고 말았다. 소수 지상파의 독과점체제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기존 지상파 사업자의 1인 지분 상한선은 새로 도입되는 종합편성과 보도전문 채널보다도 오히려 높게 조정되었다. 신문사.대기업.외국자본의 방송참여는 실질적으로 종합편성 및 보도전문 채널에 국한되었다. 독자 구독률 20% 이상을 차지하는 신문의 경우 아예 방송시장에 들어올 수 없는 사전규제가 설정되었고, 매체합산 시청점유율이 30%를 넘으면 소유규제가 가해지고 광고 수주도 제한하는 정책이 도입되었다. 독자 구독률이나 매체합산 시청점유율을 도대체 어떻게 정의하고 계산하겠다는 것인지, 심각한 충돌이 일 것은 불문가지다.
이처럼 누더기에 가깝게 만들 바에는 애초에 미디어법을 개정하려 한 이유가 무엇이었나? 기가 막혔다. 하지만 갈등과 대립으로 터지기 일보 직전의 우리 사회에서 어떻게든 합의에 도달하는 것이 법안 자체의 완결성보다 중요한 함의를 지니기에 어쩔 수 없으려니 했다. 이 정도까지 인내하고 양보하면 결국 합의에 도달할 수 있으리란 최소한의 합리성에 대한 기대였다. 아무리 중간과정의 갈등이 심했어도 마지막 표결만큼은 2004년 신문법 통과 때처럼 물리적 충돌 없이 진행되리라는 최소한의 양식에 대한 믿음이었다.
누더기 법률이 최악의 몸싸움을 거쳐 날치기로 통과되는 과정 속에서 이러한 기대와 믿음은 여지없이 무너져 내렸다. 모두가 패자였다. 아기를 두 동강 내도 좋으니 나눠 갖자는 여인과 차라리 아기를 포기할 터이니 아기 목숨을 살려 달라는 여인 사이에서 진짜 엄마는 누구인지 지혜롭게 분별했던 솔로몬의 우화는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참담한 형태로 다시 쓰여야 할 것이다. 솔로몬의 법정은 아수라장이 되어 버린 가운데, 진짜 엄마가 누군지 가리지도 못했고, 아기는 결국 끔찍하게 두 동강 나고 말았다고.
그것은 한편의 참담한 코미디였다. 법안은 이미 누더기가 되어 있었다. 그것을 통과시키자고 본회의장을 사전에 점거하고 스크럼을 짜 의장석을 에워싼 이들이며, 그들을 대상으로 고함을 지르고 몸을 날리는 이들이며. 도대체 이런 악다구니의 이유가 무엇인가? 우리는 도대체 언제까지 이처럼 참담한 자기 모멸을 겪어야만 하는가?
미디어법 개정이 과연 죽기 살기로 싸울 일인가? 어느 나라 어느 입법기관을 눈 씻고 찾아보라. 컴퓨터 세대.네티즌.휴대폰 세대가 주류를 이루는 21세기 미디어 융합시대에, 미디어 간 칸막이를 허물고 미디어 발전의 동력이 되는 자본 수혈을 용이하게 하려는 법 개정안을 둘러싸고 이처럼 극단적으로 갈등하는 집단이 어디 있는가? 설사 이념의 차이로 정책대결 국면에서 한 치의 양보 없이 팽팽히 맞섰다 해도 막판 표결 진행까지 이토록 난장판을 만드는 집단이 어디 있는가?
미디어법 개정의 당위성은 다시 언급하고 싶지 않다. 법 개정을 통해 말도 안 되는 우스꽝스러운 규제를 걷어낼 필요성은 오히려 이 법 개정을 맨 앞에서 반대한 지상파 방송사업자들의 입장에서 가장 절박했다. 단적인 예를 들어보자. 종래 방송법에 따르면 대기업.신문사.외국자본은 지상파 주식을 말 그대로 단 한 주도 소유할 수 없다. 이처럼 극도로 경직된 소유제한으로 인해 발생하는 시시비비는 실로 어처구니가 없다.
얼마 전 논란이 된 대구MBC의 경우가 그중 하나다. ㈜쌍용이 동사의 지분 8% 정도를 소유하고 있다. 동사는 2006년 초순경, 주식의 70%를 모건스탠리 계열의 사모펀드에 넘겼다. 외국자본 소유 회사가 된 것이다. 그 결과 대구MBC는 이 거래행위에 대해 책임이 없음에도 외국자본의 지상파 소유를 금지하는 방송법을 정면으로 위반한 꼴이 되어 거액의 벌금을 물고 최악의 경우 사업권을 상실할 수도 있게 되었다. ㈜쌍용은 문제가 된 지분을 매각하려 했으나 현재까지 응찰자가 나서고 있지 않은 상황이다. 이러한 사례는 부지기수다.
한편에선 이 같은 코미디가 빚어지는 반면, 정작 방송행위 자체는 거의 자유방임상태로 방치해 온 것이 종래의 방송법이다. 온 국민이 소수의 독과점 지상파 방송이 전하는 내용에 따라 울고, 웃고, 기뻐하고 분노한다. 이처럼 영향력이 막대할수록 그에 따른 공정성과 책임성을 갖추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방송 현장은 사실보다 의도를 앞세우고, 이성보다 감성에 소구하며, 공정성보다 이념을 따르는 집단에 장악된 지 오래다. 선동적 포퓰리즘과 저질 상업주의의 천국이 된 방송의 횡포를 막을 장치는 거의 전무한 실정이다.
미디어법 개정은 이처럼 터무니없는 미디어의 소유 규제를 완화하되 그 책임을 강화하여 이런 문제들을 바로잡고자 함이었다. 하지만 하도 이리저리 주물러진 탓에 여당이 제출한 최종 법 개정안에서 원래의 취지는 거의 퇴색하고 말았다. 소수 지상파의 독과점체제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기존 지상파 사업자의 1인 지분 상한선은 새로 도입되는 종합편성과 보도전문 채널보다도 오히려 높게 조정되었다. 신문사.대기업.외국자본의 방송참여는 실질적으로 종합편성 및 보도전문 채널에 국한되었다. 독자 구독률 20% 이상을 차지하는 신문의 경우 아예 방송시장에 들어올 수 없는 사전규제가 설정되었고, 매체합산 시청점유율이 30%를 넘으면 소유규제가 가해지고 광고 수주도 제한하는 정책이 도입되었다. 독자 구독률이나 매체합산 시청점유율을 도대체 어떻게 정의하고 계산하겠다는 것인지, 심각한 충돌이 일 것은 불문가지다.
이처럼 누더기에 가깝게 만들 바에는 애초에 미디어법을 개정하려 한 이유가 무엇이었나? 기가 막혔다. 하지만 갈등과 대립으로 터지기 일보 직전의 우리 사회에서 어떻게든 합의에 도달하는 것이 법안 자체의 완결성보다 중요한 함의를 지니기에 어쩔 수 없으려니 했다. 이 정도까지 인내하고 양보하면 결국 합의에 도달할 수 있으리란 최소한의 합리성에 대한 기대였다. 아무리 중간과정의 갈등이 심했어도 마지막 표결만큼은 2004년 신문법 통과 때처럼 물리적 충돌 없이 진행되리라는 최소한의 양식에 대한 믿음이었다.
누더기 법률이 최악의 몸싸움을 거쳐 날치기로 통과되는 과정 속에서 이러한 기대와 믿음은 여지없이 무너져 내렸다. 모두가 패자였다. 아기를 두 동강 내도 좋으니 나눠 갖자는 여인과 차라리 아기를 포기할 터이니 아기 목숨을 살려 달라는 여인 사이에서 진짜 엄마는 누구인지 지혜롭게 분별했던 솔로몬의 우화는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참담한 형태로 다시 쓰여야 할 것이다. 솔로몬의 법정은 아수라장이 되어 버린 가운데, 진짜 엄마가 누군지 가리지도 못했고, 아기는 결국 끔찍하게 두 동강 나고 말았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