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에 관한 '記憶의 전쟁'
2010.06.30 16:15
[사설: “6․25에 관한 ‘記憶의 전쟁’,” 조선일보, 2010. 6. 24, A35.]
6․25 전쟁 발발(勃發) 60년이 내일로 다가왔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소련과 중공(中共)의 지원을 업은 북(北)의 김일성․박헌영 집단은 북한군 7개 보병사단, 1개 기갑사단, 특수 독립연대 등 총 병력 11만1000여명과 소련제 T-34 탱크 등을 앞세워 대한민국을 기습 남침(南侵)했다. 3년여에 걸친 이 전쟁으로 대한민국 국민 37만여명이 목숨을 잃었고, 38만7000여명이 북에 납치됐거나 행방을 알 수 없게 됐다. 한국군 13만7000여명, 유엔군 4만여명이 전사했고, 한국군․유엔군 4만여명이 포로로 붙잡히거나 실종됐다.
또 북한 민간인 120여만명이 사망 또는 실종됐다. 김일성 집단의 6․25 모험은 일제(日帝) 식민지에서 갓 독립한 신생 대한민국을 잿더미로 만들고 민족 전체를 절멸(絶滅)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었다.
1953년 휴전 직후 대한민국의 1인당 국민총생산(GNP)은 67달러, 세계 최빈국(最貧國)이었다. 대한민국의 2008년 1인당 국민소득(GNI)은 1만9296달러로 57년 전보다 288배 가까이 올랐다. 북한의 2008년 1인당 국민소득은 대한민국의 5.5% 수준인 1065달러다. 대한민국의 2008년 무역규모는 8572억8000만달러였다. 북한은 38억2000만달러다. 대한민국이 1960-70년대에 산업화를, 1980년대엔 민주화를 달성하는 동안 북한은 김일성→김정일→김정은으로 이어지는 3대 세습 독재의 완성을 위해 온 나라를 백성의 수용소로 만들어 버렸다.
소련 붕괴 후 공개된 비밀문서들은 6․25 전쟁 발발 과정과 경위를 학술적으론 더이상 논란의 여지가 없게 명확히 정리했다. 그런데도 같은 대한민국 국민이라 해도 그들 머릿속의 기억으로 남아 있는 6․25는 여전히 ‘북한이 대한민국을 공격한 민족상잔의 전쟁’이라는 것과 ‘북한의 주도로 벌어진 통일전쟁’이라는 ‘두 개의 전쟁’으로 나뉘어 있다. 마음속으로 6․25를 통일전쟁으로 믿는 세력들이 역사적 사실(事實)조차 자신의 정치 이데올로기에 따라 왜곡하고 그것을 다음 세대에게 심어주는 작업을 계속해 왔기 때문이다.
6․25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는 실재(實在)하는 오늘의 북한을 어떻게 보고 다룰 것이며, 더 나아가선 어떤 방식으로 통일을 이룰 것인가 하는 문제에도 연결돼 있다. 그리고 이것은 북한과 관련된 정책만이 아니라 1980년 이후 한국 정치의 현재와 미래를 움직여 나가는 동력(動力)으로 작용해 왔다. 최근 국회에서 ‘6․25 결의안’과 천안함 폭침(爆沈) 규탄 결의안이 논란을 빚고 있는 것도 6․25를 둘러싼 두 개의 기억이 충돌하는 ‘기억의 정치’를 떠나서는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점령군 소련의 일방적 연출로 김일성을 무대 중심에 세운 북한 정권 수립을 자주 독립국가의 출발로 떠받들면서, 이승만이 미군정(美軍政)과 수시로 충돌하고 때로 협력하면서 주도한 대한민국 건국을 미국이 친일(親日) 세력을 내세워 만들어낸 ‘꼭두각시 정권’으로 폄하(貶下)하는 논리는 일부 세력의 ‘기억의 정치’가 빚어낸 대표적 산물이다. 나라 전체가 두 진영으로 갈려 대북(對北) 정책과 통일 문제, 한․미 동맹 문제를 놓고 정면 충돌해 온 것 역시 정책의 객관적 정당성과 효율성의 차이 때문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심층(深層)에선 여전히 6․25에 대한 두 개의 ‘기억의 정치’가 충돌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껏 6․25에 관한 두 개의 기억이 계속 존재하고 있는 데는 우파(右派) 진영의 역사적 무지(無知)와 현실적 나태(懶怠) 탓도 크다. 우파는 1950년대부터 김대중․노무현 10년을 빼곤 줄곧 현실 권력을 장악했지만 ‘6․25에 관한 두 개의 기억’을 역사의 정통성에 입각해 정리함으로써 대한민국의 사상적 갈등과 균열을 치유하고 통합적 역사상(歷史像)을 구축하는 데 실패했다. 그 결과 대한민국을 이끌 건전한 보수와 지도자의 상(像), 그리고 그들이 그리는 대한민국의 미래상(未來像)을 오늘의 국민과 내일의 국민에게 확실히 하는 데도 무능(無能)했다.
1950년대부터 현실 권력을 놓치고 잠복(潛伏)해 온 좌파 진영은 1980년대 들어 가장 효과적인 기억 재생산 수단인 문화와 예술과 교육 영역을 장악한 채 자신들의 머릿속에 있는 ‘기억의 정치’를 다음 세대 머리에 이식(移植)해 왔다. 전교조 교사가 중학생들을 데리고 ‘빨치산 추모제’에 다녀오는 게 지금의 대한민국 현실이다. 현 집권 세력이 이 같은 사태의 심각성과, 그것이 앞으로 대한민국에 미칠 영향을 정확히 인식하지 못한 채 6․25에 관한 기억의 혼돈조차 실용과 절충의 이름 아래 방치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대한민국이 6․25를 넘어서서 분단을 극복하고 통일로 나아가려면 먼저 6․25 전쟁 각(各) 국면의 가해자와 피해자들을 모두 보듬어 안을 수 있는 통합된 역사상이 제대로 세워지지 않으면 안 된다. 대한민국 주류 세력이 선택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노선이 오늘의 선진 민주 공화국을 가능하게 했다는 대전제(大前提) 아래서 포용과 화해도 가능하고 그 위에서만 통일로 접근할 올바른 길을 닦아갈 수 있는 것이다.
6․25 전쟁 발발(勃發) 60년이 내일로 다가왔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소련과 중공(中共)의 지원을 업은 북(北)의 김일성․박헌영 집단은 북한군 7개 보병사단, 1개 기갑사단, 특수 독립연대 등 총 병력 11만1000여명과 소련제 T-34 탱크 등을 앞세워 대한민국을 기습 남침(南侵)했다. 3년여에 걸친 이 전쟁으로 대한민국 국민 37만여명이 목숨을 잃었고, 38만7000여명이 북에 납치됐거나 행방을 알 수 없게 됐다. 한국군 13만7000여명, 유엔군 4만여명이 전사했고, 한국군․유엔군 4만여명이 포로로 붙잡히거나 실종됐다.
또 북한 민간인 120여만명이 사망 또는 실종됐다. 김일성 집단의 6․25 모험은 일제(日帝) 식민지에서 갓 독립한 신생 대한민국을 잿더미로 만들고 민족 전체를 절멸(絶滅)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었다.
1953년 휴전 직후 대한민국의 1인당 국민총생산(GNP)은 67달러, 세계 최빈국(最貧國)이었다. 대한민국의 2008년 1인당 국민소득(GNI)은 1만9296달러로 57년 전보다 288배 가까이 올랐다. 북한의 2008년 1인당 국민소득은 대한민국의 5.5% 수준인 1065달러다. 대한민국의 2008년 무역규모는 8572억8000만달러였다. 북한은 38억2000만달러다. 대한민국이 1960-70년대에 산업화를, 1980년대엔 민주화를 달성하는 동안 북한은 김일성→김정일→김정은으로 이어지는 3대 세습 독재의 완성을 위해 온 나라를 백성의 수용소로 만들어 버렸다.
소련 붕괴 후 공개된 비밀문서들은 6․25 전쟁 발발 과정과 경위를 학술적으론 더이상 논란의 여지가 없게 명확히 정리했다. 그런데도 같은 대한민국 국민이라 해도 그들 머릿속의 기억으로 남아 있는 6․25는 여전히 ‘북한이 대한민국을 공격한 민족상잔의 전쟁’이라는 것과 ‘북한의 주도로 벌어진 통일전쟁’이라는 ‘두 개의 전쟁’으로 나뉘어 있다. 마음속으로 6․25를 통일전쟁으로 믿는 세력들이 역사적 사실(事實)조차 자신의 정치 이데올로기에 따라 왜곡하고 그것을 다음 세대에게 심어주는 작업을 계속해 왔기 때문이다.
6․25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는 실재(實在)하는 오늘의 북한을 어떻게 보고 다룰 것이며, 더 나아가선 어떤 방식으로 통일을 이룰 것인가 하는 문제에도 연결돼 있다. 그리고 이것은 북한과 관련된 정책만이 아니라 1980년 이후 한국 정치의 현재와 미래를 움직여 나가는 동력(動力)으로 작용해 왔다. 최근 국회에서 ‘6․25 결의안’과 천안함 폭침(爆沈) 규탄 결의안이 논란을 빚고 있는 것도 6․25를 둘러싼 두 개의 기억이 충돌하는 ‘기억의 정치’를 떠나서는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점령군 소련의 일방적 연출로 김일성을 무대 중심에 세운 북한 정권 수립을 자주 독립국가의 출발로 떠받들면서, 이승만이 미군정(美軍政)과 수시로 충돌하고 때로 협력하면서 주도한 대한민국 건국을 미국이 친일(親日) 세력을 내세워 만들어낸 ‘꼭두각시 정권’으로 폄하(貶下)하는 논리는 일부 세력의 ‘기억의 정치’가 빚어낸 대표적 산물이다. 나라 전체가 두 진영으로 갈려 대북(對北) 정책과 통일 문제, 한․미 동맹 문제를 놓고 정면 충돌해 온 것 역시 정책의 객관적 정당성과 효율성의 차이 때문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심층(深層)에선 여전히 6․25에 대한 두 개의 ‘기억의 정치’가 충돌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껏 6․25에 관한 두 개의 기억이 계속 존재하고 있는 데는 우파(右派) 진영의 역사적 무지(無知)와 현실적 나태(懶怠) 탓도 크다. 우파는 1950년대부터 김대중․노무현 10년을 빼곤 줄곧 현실 권력을 장악했지만 ‘6․25에 관한 두 개의 기억’을 역사의 정통성에 입각해 정리함으로써 대한민국의 사상적 갈등과 균열을 치유하고 통합적 역사상(歷史像)을 구축하는 데 실패했다. 그 결과 대한민국을 이끌 건전한 보수와 지도자의 상(像), 그리고 그들이 그리는 대한민국의 미래상(未來像)을 오늘의 국민과 내일의 국민에게 확실히 하는 데도 무능(無能)했다.
1950년대부터 현실 권력을 놓치고 잠복(潛伏)해 온 좌파 진영은 1980년대 들어 가장 효과적인 기억 재생산 수단인 문화와 예술과 교육 영역을 장악한 채 자신들의 머릿속에 있는 ‘기억의 정치’를 다음 세대 머리에 이식(移植)해 왔다. 전교조 교사가 중학생들을 데리고 ‘빨치산 추모제’에 다녀오는 게 지금의 대한민국 현실이다. 현 집권 세력이 이 같은 사태의 심각성과, 그것이 앞으로 대한민국에 미칠 영향을 정확히 인식하지 못한 채 6․25에 관한 기억의 혼돈조차 실용과 절충의 이름 아래 방치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대한민국이 6․25를 넘어서서 분단을 극복하고 통일로 나아가려면 먼저 6․25 전쟁 각(各) 국면의 가해자와 피해자들을 모두 보듬어 안을 수 있는 통합된 역사상이 제대로 세워지지 않으면 안 된다. 대한민국 주류 세력이 선택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노선이 오늘의 선진 민주 공화국을 가능하게 했다는 대전제(大前提) 아래서 포용과 화해도 가능하고 그 위에서만 통일로 접근할 올바른 길을 닦아갈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