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인민군 치하 서울의 석 달, 그 냉엄한 기록


[양상훈, "인민군 치하 서울의 석 달, 그 냉엄한 기록," 조선일보, 2019. 6. 27, A34쪽.]  → 6.25전쟁, 북한공산주의
                
'1950년 6월 28일. 밤새 비는 끊이었다 이었다 하였으나 대포 소리는 한시도 멈추지 아니하였다. … 날이 샐 무렵 전투는 더 치열해지는 듯 대포와 총소리가 콩 볶듯 한다. 가끔 멀지 않은 곳에서 배폭을 찢는 듯한 비명이 들려온다. 벌써 시가전이 벌어진 모양이다….' 한 분이 보내준 책을 손에 잡지 못하다 6월 들어 의무감 같은 것이 생겨 다 읽었다. 6·25 당시 서울대 사학과 김성칠 교수의 일기를 모은 책 '역사 앞에서―한 사학자의 6·25 일기'다. 서울 정릉에 살던 그는 서울 시민 대부분과 마찬가지로 피란을 못 가고 졸지에 인민군 치하에서 석 달을 살아야 했다. 그의 일기엔 '인민군 치하 서울'의 적나라한 실상이 가감 없이 적혀 있다.

'미아리 고개로 차보다 크고 육중한 것이 천천히 내려온다. 대포를 맞아도 움쩍 않는다는 이북의 탱크 아닌가 싶다. 돈암동 거리엔 이상한 군복을 입은 군인들이 떼 지어 행진하고 있다. 세상은 아주 뒤집히고 말았다. 우리는 좋든 싫든 하룻밤 사이에 대한민국 아닌 딴 나라 백성이 되고 만 것이다.'

김 교수 일기에 따르면 남침 사흘 만인 6월 28일 이미 서울 거리에 붉은 기를 흔들며 만세를 부르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김 교수는 '그들 중엔 어제까지 (우파) 대한청년단 완장을 차고 있던 청년도 있었다'고 적었다. 학교부터 인공기가 나부끼더니 7월 초엔 집마다 인공기가 걸리고 담벼락엔 '인민공화국 만세' '영명한 김일성 장군 만세' '스딸린 대원수 만세' 등의 벽보가 범람하듯 나붙었다. 남녀 학생들의 인공국 지지 시위는 매일 벌어졌다. 대한민국의 장관, 학자들이 라디오에 나와 '이승만 역도'를 비난했다.

김 교수는 '나도 붉고 푸른 잉크로 인공기를 그리기 시작했다. 아내와 마주 보고 멋적게 웃었다. 아침저녁으로 국기를 고쳐 그려야 하는 신세였다'고 했다. 그러면서 '일제 시절 사랑방 벽에 태극기를 그려 붙여놓고 어린 가슴을 파닥이던 일이 있었다. 그 태극기를 조용히 뜯어 불사르시던 어머님 뺨엔 두 줄기 눈물이 흘러내렸고 나는 그날 밤 순사에게 목덜미를 잡힌 꿈을 꾸고 울면서 잠을 깼다'고 회고했다. 많은 시민이 그 태극기를 버리고 다른 국기를 그려야 했다.

김 교수는 인민군의 첫인상을 나쁘지 않게 적었다. 훈련이 돼 있고 규율도 있는 것으로 보았다. '집 나간 형제가 고향에 찾아온 것 같다'고도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들의 그악스러움과 잔인하고 가차 없음, 허위 선전 선동에 질려 갔다. 김 교수는 명륜동 인민재판 이야기를 적었다. '따발총을 멘 인민군들이 청년 몇 사람을 끌어다 놓고 군중을 향해 반동분자냐고 물었다. 모두 기가 질렸는데 한두 사람이 악질 반동분자라고 하자 두말없이 총을 쏘아 죽였다.'

김 교수는 이즈음 서울의 가장 큰 문제는 먹을 것이 없고, 어린 학생들의 의용군 동원과 일반 시민의 갑작스러운 '전출'이었다고 했다. 교실에서 누가 '나가자'고 하면 아무도 반대 못 하고 결국 전장으로 보내지는 식이었다. 학부모들은 발만 굴렀다. 갑자기 당의 지시라면서 무작정 타 지역으로 '전출'되는 것도 거의 죽으라는 것과 같은 충격이었다. 서울대 교수들에겐 '과거 청산'이라면서 '건설대'라는 곳에 지원하라고 했다.

인민공화국은 온갖 개혁이라는 것을 했다. 8시간 노동제, 성별·국적 불문 균일 임금제, 노동 보험제, 임신부 보험제…. 실상은 그 정반대로, 그저 선전 선동일 뿐이었다. 서울의 좌파 정당, 좌익 신문들이 제 세상을 만난 줄 알았더니 제일 먼저 사라졌다. 근로인민당은 흔적이 없어졌고 교직원 노조도 해산당했다.

7월이 지나며 서울 시민의 인민군에 대한 평가는 끝난 것 같았다. 스스로를 '회색분자'라 했던 김 교수는 '미군 비행기가 서울을 폭격해 수많은 사상자가 나는데도 사람들은 비행기를 오히려 기다린다. 일종의 희망 같은 것을 품는다. 군경 가족만 그런 것이 아니다'라고 적었다. 용산에 폭탄이 떨어지는데 한 여인이 지붕 위에서 미군 비행기를 향해 흰 수건을 흔들었다고 한다. 김 교수를 찾아온 불문학 손 교수는 "백성들이 대한민국에 대한 충성심에 이토록 불탄 적은 없었을 겁니다. 인공국을 겪어보고 뼈저리게 대한민국을 그리워합니다"라고 했다.

9월 16일 정릉에서도 은은하게 미군과 국군의 포성이 들리기 시작했다. 김 교수는 '너무 강렬한 기대에 흥분으로 잠이 오지 않았다'고 썼다. 21일 붉은 완장들이 짐을 싸기 시작했다. 23일 미아리 고개를 넘는 북행 행렬이 쉴 새 없었다. 28일 굶주린 서울 시민들이 인민군 군수 물자를 약탈했다. 10월 6일 김 교수 아내는 간직했던 태극기를 다시 걸었다.

그러나 돌아온 국군에 대한 김 교수의 평가는 반반이었다. '술에 취해 있다'는 표현이 많다. 우리 정부와 사회의 부패에 대한 실망도 컸 다. 중공군 개입으로 서울을 버리고 후퇴하면서 목격한 참상으로 김 교수는 '우리 민족은 지금 벌레'라고 절망했다. 그러나 '국군에 입대하기 위해 우리 마을을 지나는 수만 명 청년들이 비록 몹시 지쳤으나 눈에는 새로운 정기가 돈다. 민족의 희망을 본다'고 적었다. 일기는 대략 여기까지였다. 그는 얼마 못 가 고향 경북 영천에서 괴한의 총격으로 숨지고 말았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6/26/2019062604096.html



번호 제목 조회 수
52 [6.25] 6·25, 기억의 고지 사수해야 12
51 [백선엽 장군] 사설: 나라 살린 다부동 승전, 73년 만에 세워진 백선엽 장군 동상 27
50 [6.25] 어느 노병의 마지막 소원 32
49 [6.25전쟁] 6·25전쟁이 남긴 ‘자유의 의무’ 27
48 [6.25] 사후 2년 만에 제대로 모신 ‘6·25 영웅’ 백선엽 장군 30
47 [6.25전쟁, 인천상륙작전] '0.02%' 확률 뚫고 성공…전쟁 흐름 바꾼 세기의 전투였죠 258
46 [6.25전쟁, 중공] 김은중, "중국 대사를 당장 초치하라" 87
45 [6.25전쟁, 중공] “6·25 남침은 역사적 사실… 시진핑도 바꿀 수 없는 것” 65
44 [6.25전쟁, 중공] 노석조, "'6·25는 마오쩌둥 지원 받은 남침' 美국무부, 시진핑 발언 공개 반박" 57
43 [6.25전쟁, 중공] 中 “시진핑 연설, 美에 엄중한 경고… 항미원조 영원히 계승” 54
42 6·25 북한인민군은 사실상 중공팔로군이었다 101
41 스탈린 감독, 김일성 주연, 마오쩌둥이 조연한 남침(南侵) 전쟁 92
40 다부동 전투 승리·야전군 창설 韓美동맹까지 일군 위대한 장수 83
39 "김일성이라는 작자는 정치와 전쟁 구별이 안 되는가" 60
38 오늘의 대한민국은 70년 전 비극을 기억하고 있는가 86
37 대통령 비판 대자보에 '건조물 침입' 유죄, 민주국가 아니다 69
36 6.25는 내전(內戰)? 71
» 인민군 치하 서울의 석 달, 그 냉엄한 기록 [1] 237
34 '백선엽 죽이기' 161
33 6.25를 '위대한 항미원조(抗美援朝) 전쟁'이라 했던 시진핑 490
32 대통령들은 6.25를 이렇게 말했다 764
31 북한군 전차 242대 vs 국군 0대 1008
30 현대史 전문가 강규형 교수가 들려주는 6․25의 진실 747
29 우리 사회에 만연한 親北․反대한민국 바이러스 863
28 스탈린과 6.25 864
27 흐루시초프의 회고록 1256
26 6․25 전쟁의 '불편한 진실 966
25 6.25는 '자유수호전쟁'이었다 931
24 ‘6․25, 美 도발 때문에 北이 침입’이라 가르치는 선생들 814
23 스탈린․김일성이 한국전쟁 일으켜 1241
22 ‘김일성에 전쟁 책임’--60代 이상 70%, 20代는 42% 1131
21 내 어릴 적 공산 치하 석 달 1376
20 6․25에 관한 '記憶의 전쟁' 1198
19 6.25전쟁의 역사 바로 전해야 1060
18 아는 것과 다른 맥아더의 한국전쟁 1386
17 초등생 1/3이 '6·25는 한국도발'로 알게 한 역사교육 1008
16 6.25 전쟁사진 화형식 1008
15 6.25를 생각한다 1004
14 청소년 51.3%, 6.25가 북한에 의한 남침인 것 몰라 1107
13 김형좌 목사의 6·25 증언 993
12 6·25당시 좌익, 양민 앞세워 관공서 습격 995
11 김일성 6·25작전계획, 소련에서 작성· 보천보전투 조작 사실 재확인 1164
10 美軍 6·25전쟁 때 人命손실 총 6만여 명 1125
9 6.25가 내전(內戰)이라니 1106
8 빨치산, 6.25사변 때 13만 주민 학살 1252
7 강정구교수의 ‘한국전’ 왜곡 941
6 주한 영국 대사의 공개서한 934
5 맥아더 양민학살 주장, 北선전戰 따라가는 꼴 925
4 의리도 모르는 국민이 되지 말자 962
3 ‘맥아더가 양민학살 명령’ 노래 근거있나? 1008
2 운동권, 왜 갑자기 ‘맥아더 동상’을? 884
1 미국의 6·25 참전의 의미 959

주소 : 04072 서울특별시 마포구 독막로 26 (합정동)ㅣ전화 : 02-334-8291 ㅣ팩스 : 02-337-4869ㅣ이메일 : oldfaith@hjdc.net

© k2s0o1d4e0s2i1g5n.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