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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나라'

2019.08.01 20:55

oldfaith 조회 수:103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나라'


[최보식,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나라'," 조선일보, 2019. 7. 26, A34쪽.]            → 대일(對日) 관계

우스키 게이코(臼杵敬子)씨를 만난 것은 4년 전 이맘때다. 대학 시절 좌파 운동권이었던 그녀는 젊은 날 프리랜서와 방송 작가를 했다. 1970년대 중반 일본인의 '기생(妓生) 관광' 취재를 위해 한국에 와서 역사적으로 위안부 문제가 있었다는 걸 알게 됐다. 그녀는 일본 TV 방송에 위안부의 존재를 처음 보도했다.

그 뒤 강제징용 사망자 유족들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재판하러 도쿄에 왔을 때 그녀는 일본의 책임을 확실히 하자는 취지로 '핫키리(ハッキリ)회'를 만들어 변호사 선임료와 체류 경비를 도왔다. 일본 의사당 앞에서 이들을 위해 보름간 노숙 시위도 벌였다. 이런 활동으로 징용·징병 희생자 명단을 공개하겠다는 일본 정부의 약속을 받아냈고, 위안부 할머니를 위한 '아시아여성기금'이 만들어졌다.

"당초 일본 정부는 직접 배상금은 1엔도 줄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그런 정부가 의료·복지 지원 사업비 명목으로 5억엔을 기금에 내놓았다. 일본 국민 모금액 5억7000만엔과 비슷한 액수였다. 사실상 일본 정부 돈이 할머니 배상금에 들어간 것이다. 당시 하시모토 총리는 배상금을 받은 할머니들에게 사과 편지도 전달했다."

필리핀·대만·네덜란드 국적의 위안부 할머니들이 그 돈을 받았다. 한국에서는 61명에 그쳤다. 정신대대책협의회라는 단체가 "그 돈은 일본 정부가 법적·국제적 책임을 피해가려는 수단"으로 규정했기 때문이다. 이 단체는 그동안 보조를 맞춰온 그녀를 향해 '일본 정부를 위해 할머니들을 회유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법무부에 '무(無)비자로 들어와 관광 목적 외의 활동을 한다'며 그녀를 신고해 2년간 입국 금지시켰다.

그 뒤 2011년 헌법재판소는 위안부 배상 분쟁과 관련해 "일본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은 우리 정부의 부작위(不作爲)는 헌법 위배"라고 판결했다. 박근혜 정부 시절 일본과 다시 협상을 해야 했다. 미국이 중재했다. 일본 정부는 '위안부 문제의 최종 타결'이라는 조건으로 '화해·치유 재단'에 10억엔을 출연했다. 이번에도 정대협 등이 반대했고,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자 재단을 해산시켰다.

올해 '만해평화대상' 수상자로 결정된 와다 하루키 도쿄대 명예교수는 한국 입장에 쭉 서 왔던 일본 지식인이다. 소위 '우리 편'인 하루키 교수조차 "위안부 합의에 대한 문 대통령의 태도는 문제가 있다. 전임 대통령이 한 약속은 좀 부족해도 계승하겠다고 했어야 했다. 이게 파기되자 일본에서 한국을 불신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그런 분위기에서 작년 대법원의 징용 배상 판결은 관계 파탄의 마지막 방아쇠를 당긴 격이었다.

우리는 우리 위주로 보고 싶은 대로 보고 말하고 싶은 대로 말하지만, 일본도 자신의 위치에서 우리를 쳐다보고 있다는 점을 놓쳐선 안 된다. 문 대통령이 "일본 정부는 더 겸허해야" "칼 찬 순사"라고 꾸짖어도 일본이 크게 반박하지 않으니 우리가 이긴 줄 알았을 것이다. 우리의 급소를 누르는 경제 보복 카드를 꺼낼 줄은 현 정권의 머리로는 상상도 안 됐을 것이다.

일본 재계의 한 인사는 "G20 회의에서 충분히 메시지를 보냈다. 한국 대통령은 그걸 이해 못 한 것 같다"라고 말했다. 주빈국인 일본 아베 총리의 문 대통령 접대는 말없이 악수하는 걸로 끝났다. 딱 8초였다. 더 이상 상대해봐야 바뀔 게 없다고 판단되면 일본은 무시하는 태도를 취한다. 이게 최악의 관계다.

하지만 대통령을 필두로 청와대와 여권에서는 "이순신 12척 배" "죽창가" "쫄지 말자" 등으로 대일 항쟁의 북을 치고 있다. 자신의 무능과 무대책으로 자초해놓고 너무 당당하게 국민에게 희생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우리 안보를 위한 사드 배치에 무차별 경제 보복을 감행했던 중국에 대해 끽소리 못했던 풍경과 너무 대조적이다. 어쨌든 TV 방송에는 '불매운동' 소식이 넘쳐난다. 이런 기세에 놀라 일본 정부가 겁먹을까. 불매운동은 시간이 갈수록 유통업과 여행업, 자영업에 종사하는 우리 서민에게 더 심한 고통을 줄 것이다. 국내 경기 불황은 더 악화될 게 틀림없다. 일본이 똑같이 불매운동으로 나올 때 어떤 상황이 될까.

물론 과거 식민지 지배에 관한 일본 정부의 인식과 태도에는 문제가 많다. 이는 우리가 고칠 수 없고 일본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 그렇다 해도 한국의 전후(戰後) 발전 과정에서 일본은 좋은 조력자였다.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핵심 가치도 공유하고 있다. 과거 시절의 '유물'이 결코 이런 가치를 포기할 만큼 중요할 순 없다.

이 시점에 중국·러시아 군용기가 우리 영공을 침범하자 경고사격까지 했다. 문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나라를 만들겠다"고 말했다. 나라가 이렇게 짧은 시간에 허물어질 수 있다는 것을 난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했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7/25/2019072503047.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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