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日은 왜 한국을 초청하고 선택했을까
[선우정, "美日은 왜 한국을 초청하고 선택했을까," 조선일보, 2019. 8. 7, A30쪽.] → 대일(對日) 관계
문재인 대통령이 2일 일본을 비판하면서 '글로벌 공급망'을 언급했다. 일본이 국제 분업을 무너뜨려 세계에 큰 손해를 끼친다는 것이다. "이기적 민폐 행위"라고 했다. 관련해 묻고 싶다. 대통령은 그렇게 중요한 '글로벌 공급망'에 한국이 어떻게 진입해 지금 위치에 올라섰는지 숙고한 적 있는가. 숙고하지 않을수록 한국의 오늘을 당연하게 여기고, 당연하게 여기니 그 지위에 대한 외부의 도전에 불같이 화를 낸다.
밑천 없던 한국이 글로벌 공급망에 들어간 배경을 설명한 용어가 있다. 사회학자 월러스틴이 '세계 체제론'에서 제시한 '초청에 의한 발전'이다. 한국이 스스로 진입한 것이 아니라 미국의 지역 통합 안보 전략에 따라 국제 자본주의 분업 시스템에 '초청'됐다는 것이다. 초청됐다고 모두 자리를 차지한 것은 아니다. 초청받은 동남아·중남미 국가들은 상당수 탈락했다. 임혁백 교수는 성경 구절로 그 과정을 설명한다. "초청받은 사람은 많았으나 선택된 자는 드물었다."(마태복음)
긍정적으로 보든 부정적으로 보든, 한국이 국제 분업 체계의 일원이 된 시점에 대해선 학문적 공감대가 있다. 미국의 뜻에 따라 한·일 국교 정상화가 이루어진 1965년이다. 역사학자 커밍스는 이 과정을 '이중(二重) 헤게모니'란 용어로 설명한다. 안보에서 미국과 손잡은 한국이, 1960년대 이미 경제 대국으로 성장한 일본과 손을 잡음으로써 유리한 입장에서 혜택을 누렸다는 것이다.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은 현실과 미래의 이익을 위해 과거사의 명분을 양보한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 있다. 전후 선진국과 후발국의 수직적 국제 분업 과정에서 한·일 두 나라를 능가하는 협력 사례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신일본제철 등 일본 철강업계는 박태준의 포항제철 건설을 지원했다(박태준 평전). 샤프 등 일본 전자업계가 자국의 반도체 기술을 해외에 제공한 첫 사례는 이병철의 삼성이었다(호암자전). 이런 협력 사례는 라면까지 이어진다. 1965년 이후 30년 동안 일본은 한국에 대한 기술 이전 순위에서 줄곧 1위를 유지했다. 전체 기술 이전 건수의 절반을 일본이 제공했다. 직접투자는 1990년대까지 미국과 1·2위를 다퉜다. 한국의 산업화 초기 일본의 역할을 평가할 수 있는 자료는 적지 않다.
일본은 왜 한국을 도왔을까. 청와대 인사가 낡은 서랍에서 끄집어낸 '가마우지' 이야기는 이 질문에 대한 문 정권의 답을 대신하는 듯하다. 목이 줄에 묶인 새(한국)는 먹이를 물어도 삼키지 못하고 주인(일본)에게 빼앗긴다. 1960~70년대 대유행하던 종속이론의 우화(寓話)적 설명이다. 종속이론은 이미 1970년대 말 중남미에서나 통용되는 변방 이론으로 전락했다. 주류 자리는 후발국의 약진을 현실로 인정하고 이론적으로 설명하는 신(新)국제분업론이 차지했다. 누가 학문의 판도를 바꿨을까. 글로벌 공급망에 뒤늦게 들어가 기적적으로 지금의 위치를 차지한 한국이다.
'가마우지' 이야기는 20년 전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 삼성전자의 순이익이 일본 전자 기업 10곳 전체 순이익을 능가하고 포항제철의 규모가 신일본제철을 앞서기 시작한 시점이다. 대체 누가 누구를 보고 가마우지 타령인가. 세계 학문의 판도가 바뀐 1980년대, 그래도 대학생들이 종속이론에 매달리던 나라가 있다. 한국이다. 자유 진영에서 유일했을 것이다. 그때 그 학생들이 지금 권력을 잡은 386 세대다. 세상을 정주행한 한국의 경제력, 세상을 역주행한 권력의 지력(知力). 두 힘의 충돌이 한·일을 포함해 문 정권에서 일어나는 모든 갈등의 배경이 아닐까 한다.
미·일은 왜 한국을 초청하고 선택했을까. 일본 정·재계의 거물로 한국을 도운 세지마 류조의 회상록 문구를 인용하면 '자유와 민주주의를 기둥으로 하는 한국을 위해서'다. 북·중·러에 대항하는 미·일의 이중 헤게모니를 삼중으로 떠받치는 한국의 탄생을 기대했을 것이다. 지금 한국이 보여주는 과거에 대한 집착, 1965년 체제에 대한 부정적 움직임, 북한과 중국을 향한 중심 이동을 미·일은 어떤 눈으로 보고 있을까. 미·일이 제공한 글로벌 공급망에서 유례없는 번영을 누린 한국의 현대사를 숙고하면 그들의 심사를 짐작할 수 있다.
미 연방법원이 과거사와 관련해 판결한 문구가 지난주 한국에서 화제를
모았다. 일본 기업에 배상을 청구한 자국 태평양전쟁 피해자의 소송을 기각하면서 한 말이다. "후손들이 자유롭고 평화로운 세계에서 살아가는 무한한 포상은 원고가 받아야 할 빚을 충분히 갚을 만한 것이다." '선대(先代)의 고난은 후대(後代)의 번영으로 충분히 보상됐다'는 말로 요약할 수 있을 듯하다. 한·일 현대사에도 잘 들어맞는 명구(名句)라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