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와 집권 여당이 자기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검찰의 공무집행을 압박하고, 지지자들의 시위를 독려해 실력행사에 나서는 모습은 중국의 문화혁명을 떠올리게 한다. 정적을 찍어 이념적인 여론몰이로 타격을 주고, 홍위병 같은 극렬 지지자들의 위세를 부추기고 이용하는 행태도 비슷하다. 반면교사로 삼기 위해 50여년 전 중국에서 일어났던 문화혁명의 비극을 다시 돌아본다.
중국인들이 '10년의 대재난(十年大浩劫)'이라고 부르는 기간이 있다. 1966년부터 10년에 걸쳐 드넓은 중국 땅을 휩쓸었던 문화대혁명(文化大革命) 시기다. 이때의 중국은 아주 깊고 불길한 '이념의 늪'에 빠진다.
강력한 권력 집중으로 이미 개인숭배의 틀을 만들어 최고의 권력을 쥐었던 건국 주역 마오쩌둥(毛澤東)의 집착과 그에 따른 착오 때문이었다. 1950년대 말 마오쩌둥은 이미 중국 전역에 대재앙을 불러왔던 전력이 있다. 1959년 이후 3년 동안 벌인 극좌(極左)의 실험 '대약진운동(大躍進運動)'이다.
중국에서는 금서(禁書)인 '묘비(墓碑·楊繼繩 저)'라는 실증적 저서의 추계에 따르면 당시 굶주림, 또는 그로 인한 각종 요인 때문에 비정상적으로 사망한 중국인은 4000만명에 육박한다. 그런 실정(失政)에 몰려 일시적으로 권좌(權座)에서 물러난 마오쩌둥은 1966년 문화대혁명을 벌여 잠시 놓쳤던 현실 권력을 되찾는다.
계급투쟁을 내세운 극단의 이념적 쏠림이 벌어졌고, 개방적이며 합리적인 모든 지식과 논의는 이로써 중국 땅에서 사라지고 만다. 중국은 이념의 지독한 광기(狂氣)를 얻은 대신, 국가와 민족을 발전적으로 이끄는 실용(實用)의 힘을 잃고 말았다.
◇대재앙의 서막=마오쩌둥의 공세는 글로써 시비를 거는 '문공(文攻)'의 형태로 먼저 불거졌다. 명(明)대 청렴한 관리의 상징이었던 해서(海瑞)라는 인물의 부침(浮沈)을 다룬 '해서파관(海瑞罷官)'이라는 연극을 공격하면서였다. 계급주의적 관점에서 "해서의 청렴성은 봉건왕조의 질서 유지를 위한 것"이었다고 비판하는 내용이었다. 이 문장은 문화대혁명을 실제 이끈 '사인방(四人幇)'의 리더이자 마오쩌둥의 아내였던 장칭(江靑)이 막후에서 활동을 벌인 결과였다. 당시 마오쩌둥의 생각은 '변색(變色)'에 맞춰져 있었다. 이른바 '자산계급(資産階級)의 수정주의(修正主義)'가 중국의 사회주의 이념적 색조를 송두리째 바꿀 수 있다는 우려였다. 그 뿌리와 토대를 아예 바꾸자는 취지에서 택한 명칭이 '문화(文化)'대혁명이다. 그러나 마오쩌둥의 직접적인 의도 중 하나는 자신의 권좌를 물려받은 실용주의 성향의 국가주석 류사오치(劉少奇)와 국무원 부총리 덩샤오핑(鄧小平) 등을 몰아내려는 데 맞춰져 있었다.
◇과격한 홍위병=우선 급진적 성향인 마오쩌둥의 아내 장칭이 핵심을 이룬 '중앙문화혁명소조(中央文化革命小組)'가 1966년 출범하며 동력을 크게 강화했다. 중국공산당 최고 기구인 중앙정치국의 지휘나 간섭을 다 초월하는 무소불위(無所不爲)의 조직이었다. 현장의 선봉에 선 존재는 무수한 청년으로 이뤄진 공산주의 붉은 이념의 첨병, 즉 홍위병(紅衛兵)이었다.
학생이 선생을 비판하고 구타하는 일, 자식이 아버지를 때리는 일, 지식인과 전문직 관료가 비판투쟁에 견디다 못해 목숨을 끊는 일이 수도 없이 벌어졌다. 이념적 틀을 넘어 사람 사이의 관계를 부정하고 깨는 난륜(亂倫)과 광란(狂亂)이었다.
◇ '과거 청산'을 앞세웠다='네 가지 옛것을 깨부수자(破四舊)'가 문화대혁명의 직접적인 구호였다. 1966년 6월 당 기관지 인민일보(人民日報)가 내건 지향이다. 옛 사상, 문화, 풍속, 습관을 모두 파괴하자는 내용이었다. 8월에는 마오쩌둥이 '사령부를 포격하라'는 대자보(大字報) 형식의 문장을 발표했다. 이념을 기초로 한 선악(善惡)의 잣대로 과거의 모든 것, 정부의 최고위 지도층을 공격해 무너뜨리며 제도적 틀까지 흔들었다. 이로써 중국 전역은 심각한 혼란에 빠져들었다.
전국의 1000만 호에 달하는 주택이 홍위병의 가택수색을 당했다. 그로부터 나온 진귀한 도자기와 서화(書畵), 유명 사찰 및 역사 유적지의 불상(佛像)과 건물, 패루(牌樓) 및 고문서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문화재가 이 시기에 불태워지거나 찢기고 부서졌다. 류사오치 등 실용주의적 성향을 지닌 최고위 지도자들이 홍위병의 잔혹한 비판과 폭력에 목숨을 잃거나 다쳤다. 전체 공직자 1200만명의 17%에 달하는 230만명의 당정(黨政) 관료 역시 정치투쟁에 휩쓸려 들어가 처벌을 받았다. 아울러 건국 뒤 추진했던 경제발전 '제3차 5개년 계획'도 크게 차질을 빚었다. 전체 손실액은 중국 건국 뒤 30년 동안 사용한 사회간접시설 투자액의 80%에 달하는 5000억위안이라는 추계도 있다.
◇혼란의 수습=집중적으로 투쟁과 파괴가 벌어진 시기는 1966년부터 2년 동안이었다. 이 시기의 중국은 공산당 표현대로 '내란(內亂)'에 가까웠다. 1968년 마오쩌둥은 홍위병에 참가했던 약 1600만명의 청년을 지방의 오지로 내려보내는 '상산하향(上山下鄕)'을 지시한다. 그로써 홍위병의 광기는 일단 잦아든다. 감당할 수 없는 혼란을 잠재우기 위한 조치였다. 아울러 국무원 총리 저우언라이(周恩來) 등이 혼란 국면을 수습하는 데 나섰다. 1975년 1월 저우언라이가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농업, 공업, 국방, 과학 분야의 '4개 현대화(現代化)' 방침을 발표하면서 흐름을 '실용'으로 겨우 돌렸다. 이듬해 10월 6일 밤에는 문화대혁명 소조(小組)를 구성해 혼란을 이끌었던 장칭 등 4인방이 전격 체포됨으로써 문화대혁명은 마침내 막을 내린다. 마오쩌둥의 권력을 이어받은 화궈펑(華國鋒) 당시 국무원 총리, 인민해방군의 실력자로서 국방장관을 맡고 있던 예젠잉(葉劍英)이 이를 주도했다. 실제 문화대혁명을 기획하고 실천으로 밀어붙여 중국에 대재앙을 몰고 왔던 마오쩌둥은 사인방이 붙잡히기 직전인 9월 9일 숨졌다.
[류사오치·라오서 등 숱한 명망가 숨져… 문화혁명 기간 200만명 사망說]
류사오치 당시 국가주석, 6·25전쟁 때 중공군을 총지휘했던 전 국방부장 펑더화이(彭德懷), 소설 '낙타상자(駱駝祥子)'로 유명한 최고 문인 라오서(老舍) 등 숱한 명망가가 이때 사망했다. 전체 사망자는 200만명에 가깝다는 통계도 있다. 사라진 숱한 문화재와 함께 모두 이 시기에 생겨난 중국의 큰 손실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더 깊은 손실에 주목하는 사람도 많다. 우선 이 기간에 중국의 차세대 교육은 '멈춤' 상태에 가까웠다. 대학입시는 1966년 이후 10년 동안 중단됐다. 정상적인 교육 시스템도 망가졌다. 교육 체계의 정상 가동이 어려워지면서 인성(人性)을 비롯한 교양 전반이 자라나는 세대에 이어지지 않았다. 지식과 지식인은 홍위병의 가장 큰 투쟁 대상이었다. 따라서 문화대혁명 기간 동안 지식과 지식인은 거의 '유린'에 가까운 대접을 받았다. 이로써 이후의 중국 사회에서 합리적인 지식과 관점, 그 능력을 발휘하는 지식인을 경멸하고 경시하는 풍조가 자리 잡고 말았다.
'옛것'을 모두 부수고 쪼개는 홍위병의 난동은 '전통'의 가치를 부정하는 흐름으로 곧장 이어졌다. 과거의 전통을 극단적으로 부정하면서 우수한 전통적 가치들은 현대 중국의 발전과 이어지지
못한 채 구석으로 밀려났다.
중국인들은 이 시기에 행해진 사람과 사람 사이의 아주 험악하고 잔인했던 '투쟁'으로 생긴 아픔을 '상흔(傷痕) 문학'으로 되새긴다. 그러나 10년 동안 벌어졌던 참혹한 기억이 없어지지 않았다. 그로써 생겨난 사람 사이의 '반목'과 '불신'은 아직 현재 진행 중이며, 문화대혁명이 남긴 가장 깊은 병증(病症)이라고 보는 이가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