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는 9일 "현 진보 세력의 직접민주주의가 전체주의와 비슷하다"고 말했다. 최 교수는 이날 서울 동교동 김대중도서관에서 열린 '김대중 전 대통령 노벨평화상 수상 19주년 학술회의' 기조 강연에서 "한국 민주주의가 위기다. 위기의 본질은 한국 진보의 도덕적, 정신적 파탄"이라며 이같이 말했다. 최 교수는 진보 성향의 정치학계 원로다.
최 교수는 문재인 정부가 과거 정부에 대한 적폐 청산 작업에 몰두한 것을 강하게 비판했다. 그는 "민주화 이전으로 돌아가 역사와 대결하는 것이 근본 원인"이라며 "적폐 청산 열풍은 민주화 이전의 민주주의관으로 회귀했음을 말해준다"고 했다. 특히 '조국 사태' 당시 서초동과 광화문으로 쪼개진 찬반 집회를 '민주주의 위기의 상징적 장면'으로 꼽았다. 그는 "이런 격렬한 정치 갈등의 조건에서 그것을 넘어서는 공정한 사법적 결정이 가능할 수 있을지 실로 의문"이라고 했다. 최 교수는 "위기는 이명박 정부 때부터 시작됐다"며 "앞선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기본 정책을 뒤엎을 뿐 아니라 노 전 대통령을 죽음으로 몰아간 검찰 수사가 패자의 존립 자체를 위협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진보파들은 제도권 밖 시민사회를 조직으로 동원하는 데 사활을 걸었고 좌파 포퓰리즘 운동이 분출됐다"고도 했다.
최 교수는 1980년대 민주화를 주도했던 운동권 세력들이 주축이 돼 있는 현 여권에 대해 우려의 목소리를 냈다. 그는 "(과거) 운동권 학생들이 (현재) 한국 정치를 지배하는 '정치 계급'이 됐다"며 "군부 독재를 '절대악'으로 규정했던 과거 경험에 따라 '민주주의 대 권위주의' '선과 악' 등 이념의 형태로 민주주의를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결국 다원적 통치 체제로서의 민주주의가 누락되고 직접민주주의를 진정한 민주주의로 이해하고, 모든 인민을 다수 인민의 '총의'에 복종하도록 강제하는 틀은 전체주의와 동일한 정치 체제가 되고 있다"고 했다. 386운동권 정치인들에게 "더 이상 진보라고 할 수 있는지 의문"이라고도 했다.
그는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의 대담집 '진보 집권플랜'에 대해 "권력 쟁취를 지향하는 경향"이라며 "독일 정치철학자 카를 슈미트의 정치 이론과 깊숙이 접맥된다"고 했다. 카를 슈미트의 이론은 전체주의 국가관으로 독일 나치의 기초가 됐다.
최 교수는 작년 헌법개정 등을 주도했던 청 와대도 비판했다. 그는 "의회 민주주의 등 민주적 기본질서를 초월한 청와대가 한국의 정치를 권위주의 쪽으로 이끈다"며 "과거처럼 개혁을 주장하지만, 그 결과는 '정부가 정당하다'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최 교수는 "민주주의의 가장 위험한 적대자들은 스스로를 민주주의자라고 생각하면서, (민주주의를 위해 본인이) 투쟁하고 있다고 확신하는 행위자들"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