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 사회 갈등은 치밀하게 조작된 북한의 전술
[박상봉, "이념 갈등 대한민국, 대통령 탄핵으로 폭발," 미래한국, 2017. 1. 25, 28-33쪽; 명지대 교수, 통일교육원 원장 역임.] → 박근혜 대통령 탄핵
서독, 베트남, 예멘, 한국은 분단국으로 이념전쟁을 치러야 했거나 치르는 중이다. 서독은 이념전쟁에서 승리해 자유민주통일을 완성했다. 동독 주민은 자유와 번영을 만끽하고 있다. 베트남은 패배해 적화통일 되었다. 공산 정권은 베트남의 공무원, 지식인, 교사, 학자, 군인 등을 숙청했고 보트피플은 전 세계로 흩어졌다. 예멘은 여전히 이념전쟁을 치르며 내전이 그치지 않는다. 마지막 분단국 한국은 어떤가. 6·25전쟁만큼 가혹한 이념전쟁을 치르며 2017년을 맞고 있다. 그 정점에 대통령의 탄핵이 있다.
베트남, 예멘, 서독의 통일과정
베트남, 예멘, 서독 세 나라 모두 이념전쟁을 치르고 통일을 이뤘다. 베트남은 적화통일, 예멘은 통일 후 내전이라는 실패한 통일을 이룬 반면, 서독은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통일을 이루고 강한 독일을 만들어가고 있다.
▲ 분단국의 이념전쟁에서 회색지대는 없다. 베트남, 예멘, 서독 세 나라가 모두 이념전쟁을 치르고 통일을 이뤘다. 베트남은 적화통일, 예멘은 통일 후 내전 이라는 실패한 통일을 이룬 반면 서독은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통일을 이뤘다. |
독일의 성공 요인은 무엇일까? 베트남, 예멘은 이념전쟁에서 패했고 서독은 승리했다. 승리의 비결은 이미 알려진 대로 헌법과 법치 수호였다. 베트남에는 5만여 명의 간첩이 암약했고 정권 핵심부에도 친공 노선에 동조하는 자가 널려 있었다.
정부는 무능했고 부정부패가 만연했다. 도덕성을 갖춘 호치민은 민족주의를 내세워 외세를 배격하자고 호소했으며 시민 및 종교단체는 평화를 내세워 반미·반전 시위를 이끌었다. 대통령 참모나 언론, 학자들도 북베트남과의 협상을 종용했다. 결국 1973년 휴전 협정이 체결되었고 미군은 철수해야 했다.
당시 남베트남의 군사력은 세계 4위로 60만 명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고 경제력에서도 월등했다. 휴전 후 사이공에는 100여 개의 좌파단체, 시민단체, 통일운동단체와 수십 개의 좌파 언론사가 생겨 부패한 정부를 공격, “전쟁은 민족 간 내전이다. 미국 등 외세가 내정 간섭할 문제가 아니다”라며 미국을 고립시켰다.
대남공작 지휘부는 대통령 측근 및 고위 지도급 인사들을 포섭하는 한편, 5만 명의 간첩들은 민족주의자, 평화주의자, 인도주의자로 위장해 시민사회에 파고 들었다. 시민단체는 부패척결과 함께 반미·반전 평화운동을 주도했다. 2년여 만에 사이공은 함락되고 베트남은 적화통일로 분단을 마감했다. 통일 후 지식인, 종교인, 학자, 공직자 등 수백만 명이 학살되고 숙청되었다.
서독은 베트남과 달랐다. 정부가 청렴했고 유능했다. 나치즘의 광장민주주의 폐해를 경험한 국민들은 매사에 이성과 법치를 중시했으며 조작, 선동 언론은 살아남지 못했다. 의회민주주의는 성숙했고 헌법과 법치가 살아 움직였다. 위헌 정당은 해산되고 초법적인 언행은 철퇴를 맞았다. 슈타지의 전방위 공작은 실패했다. 3만여 명에 달하는 간첩은 헌법수호청의 감시를 두려워했다.
1950년 설립된 슈타지는 당의 ‘창과 방패’로 분단 40년 사회주의의 분신이었다. 서독의 정치, 사회 각 분야에 개입해 체제를 교란하고 사회적 혼란을 유도하는 등 다양한 공작을 지휘했다. 특히 17만 명에 달하는 비정규 요원으로 구성된 ‘그림자부대’(Schattenarmee)는 대서독 공작의 핵심 조직이었다. 이들은 서독의 각 분야에 침입해 다양한 공작 활동을 벌였다.
무엇보다 정치공작이 가관이다. 정치공작은 서독 내 좌파 정당이나 정치인을 타깃으로 했다. 대표적인 인물이 빌리 브란트였다. 아데나워가 성공적인 서방정책을 추진했다면 브란트는 동방정책을 성공적으로 추진했다. 1970년 소련과의 국교 정상화를 시작으로 폴란드, 체코 및 동독과 평화협정과 기본합의서를 체결했다. 이 과정에서 기민련(CDU) 등 보수층의 입장은 배제되었다. 폴란드와의 정상화를 위해 패전으로 강점당한 슐레지안 영토를 양도해 오더-나이스 국경을 확정한 것을 두고 많은 국민들이 분노했다.
기민련과 보수 인사들은 동독과 국교 정상화는 여러 부작용을 초래할 것으로 반대했다. 우선 동독은 정치범 등 인권 침해를 거론하면 내정간섭이라며 반박할 것이고 민족의 자율적인 통일논의도 불가능할 것을 우려했다. 당시 사민당(SPD)과 연정으로 정권을 창출했던 자민당(FDP)도 술렁였다. 에리히 멘데(Mende), 게어하르트 킨바움(Kienbaum) 등 자민당 의원 4명이 탈당하거나 기민련으로 이적했다.
심지어 사민당의 허베르트 케(Hupke) 의원도 기민련으로 이적했다. 야당인 기민·기사련은 1972년 4월 24일 라이너 바젤을 총리 대안으로 내세우고 브란트 총리에 대한 불신임안을 하원에 제출했다. 불신임 투표는 절대과반수인 249표에서 2표가 부족한 247표를 얻어 부결되었다.
부결되자 자민당이 연정을 파기했고 하이네만 대통령은 의회를 해산했다. 1972년 11월 19일 조기 선거가 실시되었지만 사민당이 승리해 브란트는 총리직에 복귀했다. 총리에 복귀한 브란트는 더 자신 있게 동방정책을 이어갔다. 1972년 12월에는 동독과의 기본합의서를 체결했다.
사민당은 본격적인 동서독 교류 협력의 토대를 마련했다고 환영했던 반면 기민련.기사련은 동독을 국가로 인정하는 행위라며 연방헌법재판소에 위헌소송을 제기했다. 국민들도 동독 정치범들을 내정간섭을 이유로 더 이상 돌보지 못하게 된 것 아니냐며 반발했다. 하지만 헌재도 1973년 7월 31일 합헌 판결을 내렸다. 합의서가 동독을 국가로 승인한 것이 아니며 통일의지도 포기한 것이 아니라는 취지의 판결이었다.
이후 브란트의 총리 2기가 순조롭게 흘러가는 듯했다. 하지만 1973년 여름, 브란트의 불신임투표가 조작된 것은 물론 동독 슈타지도 개입한 사실이 드러났다. 당시 기민련의 율리우스 슈타이너(Steiner) 의원이 양심선언을 한 것이다.
슈타이너는 사민당 원내대표 칼 비인란트(Wienand)로부터 5만 마르크(DM)을 받고 불신임 투표에 반대했다고 밝혔다. 설상가상으로 투표과정에서 동독의 슈타지가 개입한 사실도 밝혀졌다. 동독이 ‘브란트보호공작’(Unternehmen Brandtschutz)을 하달하고 야당의 에리히 멘데, 레오 바그너 의원 등을 매수했던 것이다.
브란트를 지켜낸 슈타지의 다음 공작 대상은 역설적이게도 브란트의 총리실이었다. 고정간첩 기욤을 총리실에 심고 국정을 농단하는 권력 핵심에 마수를 뻗쳤다. 기욤은 1956년 동독을 위장 탈출해 서독에 잠입했다. 1957년에는 지령에 따라 사민당에 입당, 1968년 프랑크푸르트 시의원에 선출되었다. 1970년에는 총리실에 발탁된 후 2년 후에는 빌리 브란트 총리의 보좌관에 올랐다. 기욤은 총리의 두터운 신임을 받으며 휴가까지 동행했던 측근이었다.
서독 연방정보국(BND)은 동독 슈타지 정찰총국(HVA)이 단파를 이용해 비밀요원에게 지령을 보내는 것을 확인해 왔다. 1956년 2월 1일에는 ‘게오르그’(Georg), 10월 6일에는 ‘크리’(Chr.), 1957년 4월 중순에는 “2세에 행운을 빕니다”라는 메시지가 단파를 통해 전달되었다. 헌법수호청은 1973년 ‘게오르그’는 기욤, ‘크리’는 부인 크리스텔, 2세는 아들 피에레를 지칭한다는 것을 밝혀냈다. 헌법수호청은 그 후 1년 이상 기욤의 행각을 추적해 1974년 4월 24일 전격 체포했다.
브란트는 책임을 지고 총리직을 사퇴했다. 기욤은 13년, 아내는 8년의 징역형을 선고 받았다. 하지만 동독 공산 정권은 애국자 기욤을 방치하지 않았다. 복역 중인 1981년 동서독 간 스파이 교환으로 석방해 불러들였다. 동독에 도착한 기욤은 ‘평화의 사절’이라는 칭호를 받으며 영웅 대접을 받았다. 기욤 사건은 동서독 기본합의서가 체결된 직후 터져 나왔다. 브란트의 총리직 사퇴는 동독에 서독 상주대표부가 설치된 지 5일 만에 이뤄졌다.
좌익테러조직 적군파
분단 시절 서독 체제를 위협하던 단체는 좌파테러단체인 적군파였다. 적군파(Rote Armee Fraktion)는 70년 5월 14일 베를린 테겔 감옥에 수감돼 있던 안드레아스 바아더(Andreas Baader)를 무력으로 구출해내면서 국가 권위에 대항하는 본격적인 테러조직으로 그 활동을 시작했다. 당시 바아더는 68년 프랑크푸르트 시내 백화점 2곳을 테러 방화한 혐의로 체포, 수감 중이었다.
▲ 실패한 통일을 이룬 예멘은 지금도 여전히 이념전쟁을 치르며 내전이 그치지 않는다. |
탈옥 작전은 저널리스트 마인호프와 좌파 변호사 말러가 주도했다. 마인호프는 함부르크에서 발행되는 좌파저널 ‘콘크레트’(Konkret) 기자였으며 말러는 수감 중이던 바아더의 변호인이었다. 초기 적군파의 핵심 멤버였던 이들은 탈옥 후 함께 요르단으로 도주, 팔레스타인 테러조직을 통해 무력투쟁에 대한 군사훈련을 받았다.
투쟁 방식은 라틴 아메리카의 도시 게릴라 전법을 모형으로 서독의 사회질서를 교란하고 제국주의와 독점자본에 대한 무력투쟁을 전개코자 했다. 이를 통해 적군파는 대중을 혁명세력으로 규합코자 했으며 혁명 완수를 위해 제3세계 해방운동 세력들과 연계해 활동키도 했다.
바아더와 마인호프는 70년대 말 루프트한자 여객기 납치가 무산되며 체포, 무기징역을 선고 받고 슈트트가르트 슈탐하임 감옥에 수감되었다. 수감 후 이들이 자결하는 사건이 벌어지며 슈탐하임은 서독 지식인 사회를 대변하는 상징이 되기도 했다. 이후 슈탐하임은 서독 좌파세력의 성지가 되었다.
적군파는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 능력을 갖추고 지식인들의 동정을 구했으며, 한때 적지 않은 서독 지식인들의 동정을 받기도 했다. 이 사실은 1980년대 중반 이들의 활동을 주제로 한 ‘슈탐하임’(Stammheim)이 베를린 영화제에 출품돼 대상에 해당하는 ‘골든베어’ 상을 수상했다는 데서도 확인할 수 있다. 당시 이 영화는 베를린 중심가에 위치한 한 영화관에서 경찰의 삼엄한 경비 하에 상영된 바 있다.
핵심 요원을 잃은 적군파들은 서독으로 집결해 보다 강력한 테러를 자행하며 서독 사회를 흔들어댔다. 1970년대 검찰총장 부박, 기민련 베를린시 총재 로렌츠, 독일 사용자협회 슐라이어 회장을 납치 살해해 서독 사회를 충격으로 몰아넣었다. 적군파의 테러 행각은 1980년대에도 이어졌다. 세계적인 기업 지멘스 사의 벡쿠르츠 이사, 르노자동차 회사의 베세 사장 뿐 아니라 전설적인 금융인 헤어하우젠이 테러 공격을 받아 사망했다. 또한 나토 사령부와 미군기지도 이들의 테러 목표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초기 적군파는 동독과의 연계를 거부해왔다. 독점 자본주의를 배격하지만 동독의 지원을 받지 않았다. 하지만 테러에 대한 서독 사회의 반감과 강력한 공권력으로 적군파의 입지는 좁아져 갔다. 이런 가운데 1980년대 후반 소련이 개혁 개방에 나서고 동유럽 국가들이 체제 전환을 추진했다.
적군파와 손잡은 동독
동독에는 무혈혁명이 진행되며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해체되었다. 이념적 지지 기반이 허물어지고 있었지만 적군파는 1989년 11월 30일 도이치 은행의 전설적인 인물 헤어하우젠에 폭탄테러를 자행해 살해했다. 분노한 시민들이 프랑크푸르트 은행가를 침묵시위하며 적군파를 규탄했다. 많은 금융인들도 동참해 침묵시위는 점심시간 내내 이어졌다.
동독 슈타지가 적군파에게 손을 내밀었다. 서독 내 지지 기반을 잃었던 적군파에게 동독이 변호자임을 자청하고 은신처를 제공할 것과 신분 세탁까지 해 준다며 회유했다. 그리고 1990년 4월 부활절 휴가 중 로베더 트로이한트(신탁관리청장)을 암살했다. 로베더는 공적재산이라는 명목 하에 동독 공산당이 독점하고 있던 재산을 일반 대중에게 환원해 시장경제의 발판을 마련하는 역사적 과업을 주도했던 인물이었다. 허물어져 가는 동독 공산당의 뿌리를 마지막까지 지켜보려 했던 슈타지의 발악의 산물이었다.
트로이한트는 동독 공산세력들의 불만과 반발의 상징이 되기도 했다. 인민재산의 사회 환원이라고 하지만 이는 공산당의 기반을 실질적으로 해체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로베더는 1991년 4월 1일 그가 본격적으로 사유화 임무를 추진한 지 채 1년이 못되어 서독의 극좌단체이자 동독 슈타지의 은밀한 지원을 받아왔던 적군파(RAF)에 의해 암살되고 말았다.
적군파는 트로이한트 대표 로베더를 암살한 직후인 1991년 4월 4일 성명서를 발표했다. 성명서에는 로베더의 암살은 적군파의 소행임을 밝혔다. 암살 동기에 대해 로베더 청장은 과거 20년 동안 서독의 정치와 경제의 주요 위치에서 일해 왔고 이제 동독을 뿌리째 뽑아내는 일을 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로베더 청장은 암살될 때까지 동독의 당 재산을 단호하게 민간에게 이양하는 사유화 작업을 강력히 추진했다.
하지만 이 모든 반체제적 활동은 1980년대 후반, 소련이 개혁개방을 선언하고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이 앞 다퉈 체제 전환을 추진하던 시대적 요구와 함께 서서히 약화돼 갔다. 무엇보다 자유와 풍요로움을 찾아 대규모 탈출을 시도한 동독인들의 의지는 적군파의 존립을 뒤흔드는 사건이었으며, 테러를 통한 체제 전복이 얼마나 무의미한지 스스로 깨닫게 했다.
바아더의 변호인이었고 적군파의 핵심요원이었던 말러가 1997년 ‘디 짜이트’ 지에 요르단에서의 무장훈련 경험이 자신을 적군파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계기가 됐음을 밝힌 것도 이에 대한 결과다. 그는 현재 ‘국가를 위하여’(Fur unser Land)라는 시민운동 단체를 발족해 소외받는 이들을 위해 헌신하며 새로운 삶을 살고 있다.
2016년 12월 9일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탄핵안이 국회에서 가결되었다. 이후 탄핵을 둘러싸고 사회가 양분되어 극심하게 대립하고 있다. ‘촛불’로 조작된 탄핵을 ‘태극기’로 회복시키겠다는 기싸움이 팽팽하다.
한국의 이념전쟁: 촛불 對 태극기
탄핵 인용이냐, 기각이냐에 따라 나라의 운명이 갈릴 상황이다. 대통령의 탄핵은 이미 오래 전에 프로그래밍 되어 있었다. 부엉이 바위가 노무현을 집어 삼킨 후, 노사모를 비롯한 종북 좌익 세력들은 복수를 꿈꿔왔다. 이명박 집권 직후 복수가 시작됐다. 언론이 광우병이라는 신호탄을 쏘아 올리자 야당은 물론 모든 좌파 세력이 들고 일어났다. 광우병 괴담에 흥분한 시민들이 100일 이상 광화문에 촛불을 들고 모여들었다. 쇠고기 수입 반대, 한미 FTA 무효 등 구호가 곧바로 정권 퇴진으로 이어졌다. 우리 사회는 이 사태로 3조 이상의 비용을 치렀다.
민심에 놀란 청와대는 쑥대밭이 되고 비서실장을 비롯한 수석들이 물러났다. 청와대 뒷산에 올라 아침이슬을 부르며 눈물을 흘렸다는 대통령은 모든 실권을 잃어버린 ‘바지사장’ 같았다. 보수 정권의 탄생으로 주춤하던 북한이 ‘바지사장’을 보고 용기를 냈다. 금강산 관광객 박왕자 씨를 저격하며 이 대통령의 대응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하지만 “모든 책임은 남조선 당국에 있다”는 북한의 생떼에 속수무책이었다.
‘바지사장’의 간을 본 김정일이 제대로 한 방을 날렸다. 2009년 5월 핵실험을 강행했다. 역시 남한의 대응은 무력했다. 유엔 등 국제사회가 대북제재에 나섰으나 피해 당사국이 침묵하고 있으니 효과가 있을 리 만무하다. 광우병을 조작한 언론도 무죄선고를 받았다.
집권 3년차인 2010년, 북한의 도발이 더 노골적으로 바뀌었다. 천안함을 폭침해 해군 46명을 수장시키고 백주대낮에 연평도를 포격해 서정우 하사, 문광욱 일병이 순직했다. 민간인도 2명 사망했으며 군인·민간인 10여 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이 사건은 6·25 이후 대한민국 영토를 직접 타격한 사건으로 선전포고와 같았다. 역시 이명박은 ‘바지사장’에 불과했다. “단호히 대응하되 확전되지 않도록 하라”가 고작이었다. 만약 북한이 공격을 받거나 중국이나 일본이 영토에 공격을 받았다고 가정해 보자,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2013년 2월 이명박 정권 말기, 북한이 3차 핵실험을 강행했다. 숱한 도발을 해도 아무 일도 없으니 북한이 치명타를 날린 것이다. 이런 이명박 정권에 대해 야당과 종북 좌파 세력이 합세해 대북강경책을 써서 이런 결과가 일어났다고 몰아붙였다. 박왕자 씨 사건에서 3차 핵실험에 이르기까지 이명박 정권이 보여준 ‘바지사장’의 대응을 강경했다고 몰아세우니 좌파 언론이 합세했다. 아직도 대한민국 국민들은 이명박 정권이 대북강경책을 썼다고 믿고 있을 것이다. 광우병 사태를 날조했던 야당이나 언론이 아무런 책임을 묻지 않았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19대 대선, 침묵으로 일관했던 국민이 박근혜를 선택했다. 북한은 물론 국내 야당 및 좌파 세력이 당황했다. 박근혜는 북한이 온갖 꼼수로 대북정책을 흔들어도 전임 ‘바지사장’과 달랐다. 법과 원칙에 따라 대북정책을 추진하고 통진당 해산, 전교조 불법화, 전시작전권 연장, 교과서 국정화, 사드 배치 등을 강력히 추진했다. 북한이 2016년 1월 4차 핵실험을 자행하자 개성공단을 폐쇄, 미사일 도발이 이어지자 ‘레짐 체인지’를 선언했다. 그리고 5차 핵실험 후에는 북한 주민들을 향해 “남한으로 오라, 대한민국은 열려 있다”며 물러서지 않았다. 과거 20년 동안 어느 정권도 감히 할 수 없는 일을 했다.
좌파 세력은 세월호 카드를 택했다. 박원순 시장은 광화문 광장에 태극기 게양대를 거부하고 세월호 천막을 허가했다. 온갖 괴담이 만들어졌다. “세월호가 미군 잠수함에 받혔다”, “최태민 부활을 위한 인신공양이다”, “육해공의 구호작전을 박근혜가 거부했다” 등과 같은 괴담이 멈추지 않았다. 특히 판단력을 갖추지 못한 어린 학생들을 대상으로 괴담은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었다. “아이돌 오빠가 광우병에 걸릴까봐” 촛불을 들었다는 식이다.
이 와중에 JTBC가 청와대 기밀문서 200여개가 저장되어 있는 최순실 태블릿 PC를 보도하기 시작했다. 국민들은 분노했고 너도 나도 촛불을 들고 광화문으로 모였다. 야당과 좌파 세력이 이 기회를 놓칠 리 없다. ‘박근혜 정권퇴진 비상국민행동’이 소집되며 언론은 온갖 루머와 조작을 보도했다. 조중동에 이어 종편채널이 촛불집회를 생중계하며 촛불을 부추겼다. “박근혜의 딸 정유라”, “박근혜-정윤회 밀회”, “팔선녀”, “미 대사관 촛불 동참”, “미 대사관의 라스푸틴설” 등은 모두 이런 주요 언론의 오보들이었다.
촛불집회의 주최 세력은 민노총 등 53개 단체로 대부분이 좌파단체이며 이 중에는 대법원에서 불법단체 판결을 받은 단체도 속해 있다. 시위 현장에는 어김없이 ‘이석기 석방’ 구호가 난무하며 어린 학생들이 ‘혁명정부를 세우자’는 현수막을 휘날린다.
이런 촛불난동을 빌미로 야당은 일부 여당 의원들을 회유해 대통령을 탄핵시켰다. 하지만 모든 국민을 속이지는 못했다. 맨몸으로 대한민국 현대사를 일궈 왔던 세력들이 태극기를 들기 시작했다. 태극기 물결이 촛불을 넘어서자 언론은 이제 촛불과 태극기 모두 자제하고 헌재의 판결을 기다리자며 ‘식자’인 척한다. 경찰은 앞으로 촛불이나 태극기 집회 참여자 수를 발표하지 않는다고 한다. 촛불집회가 성숙한 민주주의라며 칭찬을 일삼던 사람들이 의회민주주의를 주장한다.
특검조차 이념을 앞세우나
정치적 중립의 의무를 저버린 특검은 ‘정의’가 경제에 우선한다며 재벌 총수를 출금조치하고 이재용 삼성 부회장에 대해 영장을 청구했다. 트럼프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하려 했던 일정까지 막으며 한 말이다. 아마도 이 정의는 히틀러나 김정은의 정의임이 분명하다.
이재용 부회장 영장은 법원에서 기각되기는 했지만, 특검의 무리한 수사는 여전하다. 태블릿 PC가 조작된 것을 알면서도 증거로 채택조차 하지 않은 자들이 ‘정의’를 운운한다. 이렇듯 탄핵 사태는 이념전쟁의 막장이다.
문제는 우리 사회의 이념전쟁은 북한과의 심리전이라는 데 있다. 황장엽전 전 북한 노동당 비서는 “남한 내에 고정간첩 5만 명이 암약하고 있으며 특히 권력 핵심부에도 침투해 있다…. 그쪽(한국) 권력 깊숙한 곳에 이쪽(북한) 사람이 있다…. 우연히 김정일의 집무실 책상 위에 놓인 서류를 보았더니 그날 아침 여권 핵심기관의 회의 내용과 참석자들의 발언 내용 등이 상세히 기록돼 있었다”(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 망명 당시 서신) 밝히기도 했다.
이들 간첩들이 탄핵 사태를 빌미로 전면에 나선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촛불집회에 참석한 고등학생들이 혁명 정부를 내세우고 이석기 석방을 주장하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거의 3년 전에 발생한 세월호 사고를 탄핵에 끼워 맞추려는 의도도 순수하지 않다. 더욱이 세월호 7시간 동안 대통령의 행적을 분 단위로 제출하라는 요구는 촛불에 굴복한 인민재판을 연상케 한다.
태극기를 들고 거리로 나선 사람들은 “전교조에 의해 기획된 제주도 4.3기념관으로 수학여행을 가려다 사고를 당한 학생들은 십 수 억의 보상금을 받고 나라를 지키다 순직한 천안함이나 연평도 해병은 보상금으로 고작 수 천만 원을 받았다니 누가 군대를 존중하겠는가.” “불법시위를 하다 부상당하거나 사망한 시위군은 엄청난 보상을 하고 이를 진압하다 사망하거나 다친 경찰에 대한 보상은 쥐꼬리만 하다.” “더 한심한 것은 언론에 이에 대한 보도도 없다. 이러니 군대나 경찰에 가기보다 차라리 열심히 시위 현장에 나가 죽을 각오로 싸우려 한다”는 불만을 늘어놓는다.
이렇듯 우리가 겪고 있는 남남갈등은 이념전쟁으로 남북의 대리전이다. 서독과 베트남 사례에서도 보듯이 북한의 비밀공작은 남남갈등을 목표로 할 수밖에 없다. 무장공비 침투, 각종 도발, 천안함 폭침, 연평도 도발, 외세 배격, 연방제 통일 및 난수표 방송에 이르기까지 그 형태도 다양하다. 특히 언론을 장악하고 노조를 접수하는 일은 기본이다.
분단국 이념전쟁에서 회색지대는 없다. 삼성이 좌파단체에 지원한 8000억 원의 돈이 비상 상황에 무슨 의미 있는가. 김대중 노무현 정권이 수 조 원을 걷어 들인 것은 무죄, 박근혜가 700억 원을 모금한 것은 유죄다. 결국 특검은 이재용 부회장에 대해 영장을 청구했다. 이런 결과는 통일 후도 동일하다. 김정은이 한국을 접수하면 종북세력들은 안전할까? 숙청 대상 제1호일 뿐이다. 박헌영을 보고 베트남을 보라.
베트남, 예멘, 서독의 사례는 “건전한 사회는 좌우 양 날개로 날아야 한다”는 구호는 분단국에게는 ‘독’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있다.
http://www.futurekorea.co.kr/news/articleView.html?idxno=369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