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수처 법안 강행 처리는 체제 변혁으로 가는 본격 관문이었다. 1948년에 세운 대한민국 자유민주 헌법 체제가 타파되기 시작할 것이다. 이후에 올 체제는 3권을 거머쥔 '민중주의적 권위주의'일 것이다. 정치권과 국민 모두가 이 사태의 본질부터 정확하게 인지하고 정의(定義)해야 할 일이다.
혁명은 폭발의 짧은 흥분기를 거쳐 새로운 권위주의로 가곤 한다. 새 권위주의는 또 다른 폭발을 불러오기도 한다. 그러나 먼동이 다시 트기까지는 "어둡고 괴로워라 밤이 깊더니…"다. 이 역사의 과정엔 배역이 세 종류 등장한다. 힘의 대세에 따르는 사람들, 그것에 거역하는 사람들, 그리고 양쪽 다 아닌 사람들이 그것이다.
힘의 대세에 따르는 사람들은 그때그때 힘센 권력에 편승하는 유형이다. 패스트트랙 법안을 밀어붙인 민주당과 '4+1'의 흥정을 한 군소 정파가 바로 그 유형이다. 역대 정권을 거치며 그런 꽃놀이패는 항상 있어 왔다. 반면에 힘의 대세에 대드는 용기 있는 소수파도 있다. 이도 저도 아닌 제3 유형도 물론 있다.
오늘의 한국 정치에선 힘의 대세에 편승하는 유형과 제3 유형이 톱니처럼 맞물려 체제 변혁을 연동시키고 있다. 유권자 41%는 이미 문재인 후보를 편들었다. 제3 유형도 반체제는 아니어도 체제 수호에 합세하진 않는다. 광의의 비(非)좌파 계열이 세(勢) 불리 처지에 있는 이유다.
이런 양상은 2차 대전 후 동유럽 체제 변혁 과정에서도 극단적으로 드러났다. 그곳에서 스탈린주의자들은 처음부터 일당 독재를 하진 않았다. 사회민주당과 군소 정파를 끌어들여 '무늬만 연립 정권'을 세웠다. '허수아비들+1'이었다. 그러다 1~2년 사이 공산 독재로 갔다. 라디오 방송을 장악해 대중을 세뇌하고 선동했다. 비밀경찰과 억지 재판으로 '혁명의 적'들을 무자비하게 숙청했다. 부정·관권 선거로 선출직도 장악했다. 공포에 질려 일부 종교인마저 스탈린을 찬양하며 거리를 행진했다. 정치인·대학인·문화인·언론인도 투항·저항·침묵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대다수는 투항하거나 침묵했다.
그러나 고독한 저항의 표상도 있었다. 폴란드의 비톨트 필레츠키(Witold Pilecki) 같은 사람이 그랬다. 그는 나치하 레지스탕스 전사이자 런던의 폴란드 망명정부 정보 요원이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일부러 잡혀가 학살 자료를 수집하고 탈출했다. 1944년엔 반(反)나치 바르샤바 시민 봉기에 앞장섰다. 그러나 1948년엔 폴란드 전 정부에 충성한 이유로 공산 정권에 처형당했다. 그는 히틀러와 스탈린 두 악마에게 굴하지 않은 자유의 화신이었다.
험한 시절에 누구나 다 필레츠키처럼 살 수는 없다. 그러나 인간 세상의 희망을 위해선 그런 모델이 있었다는 게 감격적인 것만은 사실이다. 그렇다면 한국 자유민주 국민에겐 그런 희망의 그루터기가 있을까? 있다면 그것은 다수에 포위된 소수 이견(異見)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 같다.
광주 시민 단체 '사실과 과학 네트워크'는 지난해 말 '대한민국 발전 기원 호남인 선언'이란 문건을 발표했다. "좌파 정책과 탈원전으로 경제가 벼랑에 밀렸고, 문재인 정부에 대한 호남인들의 묻지 마 지지는 그들의 오만과 독선에 일정한 영향을 끼쳤다"는 비판이었다. 이에 대해선 찬반이 있을 수 있다. 중요한 건 이게 다수에 포위된 '소수 이견'이었다는 점이다. 용기란 이런 것이다.
인헌고등학교 학생들의 '교사 사상 독재'에 대한 반발도 같은 사례다. 이에 대해서도 찬반이 있을 수 있다. 문제는 이것도 갑(甲)에 대한 을(乙)의 반발이었다는 점이다. "교사들의 일방적 의견 표출이, 민주 의식이 높은 10대들에겐 반발만 살 뿐"이라는 평이었다.
윤석열 검찰총장 신년사도 골리앗 공수처에 대한 다윗의 정당방위였다. "진행 중인 수사와 공판은 자유민주·시장경제를 지키려는 것, 권력으로 국민 선택 왜곡할 땐 엄정 대응해야"란 그의 말은 침통했다. 송경호 판사 가 전광훈 목사 구속영장을 기각한 것도 드문 소신이었다.
이런 사례를 돌아보면 희망은 있다. 공수처가 이를 노리고 벼를 것이다. 운동권 단체가 사법부 인사, 행정권을 장악할 법도 만든다고 한다. 이래서 희망의 그루터기만 있어선 안 된다. 4월 총선에서 그것이 많은 열매를 맺어야만 한다. 자유민주 진영이 이걸 해낼 수 있을까? 없으면 그땐 날개 없는 추락이다.
혁명은 폭발의 짧은 흥분기를 거쳐 새로운 권위주의로 가곤 한다. 새 권위주의는 또 다른 폭발을 불러오기도 한다. 그러나 먼동이 다시 트기까지는 "어둡고 괴로워라 밤이 깊더니…"다. 이 역사의 과정엔 배역이 세 종류 등장한다. 힘의 대세에 따르는 사람들, 그것에 거역하는 사람들, 그리고 양쪽 다 아닌 사람들이 그것이다.
힘의 대세에 따르는 사람들은 그때그때 힘센 권력에 편승하는 유형이다. 패스트트랙 법안을 밀어붙인 민주당과 '4+1'의 흥정을 한 군소 정파가 바로 그 유형이다. 역대 정권을 거치며 그런 꽃놀이패는 항상 있어 왔다. 반면에 힘의 대세에 대드는 용기 있는 소수파도 있다. 이도 저도 아닌 제3 유형도 물론 있다.
오늘의 한국 정치에선 힘의 대세에 편승하는 유형과 제3 유형이 톱니처럼 맞물려 체제 변혁을 연동시키고 있다. 유권자 41%는 이미 문재인 후보를 편들었다. 제3 유형도 반체제는 아니어도 체제 수호에 합세하진 않는다. 광의의 비(非)좌파 계열이 세(勢) 불리 처지에 있는 이유다.
이런 양상은 2차 대전 후 동유럽 체제 변혁 과정에서도 극단적으로 드러났다. 그곳에서 스탈린주의자들은 처음부터 일당 독재를 하진 않았다. 사회민주당과 군소 정파를 끌어들여 '무늬만 연립 정권'을 세웠다. '허수아비들+1'이었다. 그러다 1~2년 사이 공산 독재로 갔다. 라디오 방송을 장악해 대중을 세뇌하고 선동했다. 비밀경찰과 억지 재판으로 '혁명의 적'들을 무자비하게 숙청했다. 부정·관권 선거로 선출직도 장악했다. 공포에 질려 일부 종교인마저 스탈린을 찬양하며 거리를 행진했다. 정치인·대학인·문화인·언론인도 투항·저항·침묵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대다수는 투항하거나 침묵했다.
그러나 고독한 저항의 표상도 있었다. 폴란드의 비톨트 필레츠키(Witold Pilecki) 같은 사람이 그랬다. 그는 나치하 레지스탕스 전사이자 런던의 폴란드 망명정부 정보 요원이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일부러 잡혀가 학살 자료를 수집하고 탈출했다. 1944년엔 반(反)나치 바르샤바 시민 봉기에 앞장섰다. 그러나 1948년엔 폴란드 전 정부에 충성한 이유로 공산 정권에 처형당했다. 그는 히틀러와 스탈린 두 악마에게 굴하지 않은 자유의 화신이었다.
험한 시절에 누구나 다 필레츠키처럼 살 수는 없다. 그러나 인간 세상의 희망을 위해선 그런 모델이 있었다는 게 감격적인 것만은 사실이다. 그렇다면 한국 자유민주 국민에겐 그런 희망의 그루터기가 있을까? 있다면 그것은 다수에 포위된 소수 이견(異見)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 같다.
광주 시민 단체 '사실과 과학 네트워크'는 지난해 말 '대한민국 발전 기원 호남인 선언'이란 문건을 발표했다. "좌파 정책과 탈원전으로 경제가 벼랑에 밀렸고, 문재인 정부에 대한 호남인들의 묻지 마 지지는 그들의 오만과 독선에 일정한 영향을 끼쳤다"는 비판이었다. 이에 대해선 찬반이 있을 수 있다. 중요한 건 이게 다수에 포위된 '소수 이견'이었다는 점이다. 용기란 이런 것이다.
인헌고등학교 학생들의 '교사 사상 독재'에 대한 반발도 같은 사례다. 이에 대해서도 찬반이 있을 수 있다. 문제는 이것도 갑(甲)에 대한 을(乙)의 반발이었다는 점이다. "교사들의 일방적 의견 표출이, 민주 의식이 높은 10대들에겐 반발만 살 뿐"이라는 평이었다.
윤석열 검찰총장 신년사도 골리앗 공수처에 대한 다윗의 정당방위였다. "진행 중인 수사와 공판은 자유민주·시장경제를 지키려는 것, 권력으로 국민 선택 왜곡할 땐 엄정 대응해야"란 그의 말은 침통했다. 송경호 판사 가 전광훈 목사 구속영장을 기각한 것도 드문 소신이었다.
이런 사례를 돌아보면 희망은 있다. 공수처가 이를 노리고 벼를 것이다. 운동권 단체가 사법부 인사, 행정권을 장악할 법도 만든다고 한다. 이래서 희망의 그루터기만 있어선 안 된다. 4월 총선에서 그것이 많은 열매를 맺어야만 한다. 자유민주 진영이 이걸 해낼 수 있을까? 없으면 그땐 날개 없는 추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