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L․주사파 별것 아니다, 그리고 25년
2012.06.14 14:14
[류근일, “"NL․주사파 별것 아니다", 그리고 25년,” 조선일보, 2012. 6. 4, A34.]
종북(從北) 지하조직 사건 관련자들이 여론의 빗발치는 집중포화를 받으면서도 눈 하나 깜짝이지 않고 대한민국 국회에 유유히 입성할 정도가 됐다면 그것은 우리 사회의 이념적 방역(防疫)이 그동안 얼마나 허술했는지를 통렬하게 풍자한다. 1990년대에만 해도 배웠다는 사람들일수록 이렇게 말하는 것이 마치 지식인의 '인증샷'처럼 돼 있었다. "북(北)이 저렇게 거덜났는데 친북(親北)이 대체 어디 있다고 그러느냐?" 그러나 그 무렵 이미 그 사람들 발밑에는 김일성주의 지하조직인 민족민주혁명당과 중부지역당이 깊숙이 뿌리내리고 있었다. 2000년대에 들어와서는 간첩조직 일심회나 '장군님의 일꾼'이 아니더라도, 광의의 NL(민족해방) 사관(史觀)이 정치경제학, 사회운동, 교육현장, 논술, 역사교과서, 공공부문, 노동, 미디어, 문화, 대중연예, 출판, 만화, SNS 등 모든 분야를 광범위하게 침식했다. 자주․반미(反美)․반전(反戰)․평화라는 코드로, 그리고 남한은 식민지 종속국, 분단 원흉은 이승만과 미국, 북한은 민족자주라는 것을 키워드로 해서.
이건 분명히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걱정해야 할 것이었다. 그런데도 꽤 많은 사람들이 "그런 건 없다. 있어도 별것 아니다. 별것 아닌 것을 떠드는 것은 알라미스트(호들갑)"라고 굳이 영어를 써가면서까지 말로 글로 세(勢)에 영합했다. 심지어는 기득권 피라미드의 최정상에 있는 재벌들까지 다투어 그쪽에 선을 대고 돈을 갖다 찔렀다. "우파는 후원하지 말라"는 지침과 함께. 이렇게 해서 있는 것이 없는 것처럼 치부되는 가운데 25년이 흘렀다.
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통합진보당 화산이 폭발했다. 그러자 이번엔 또 이런 말이 들리기 시작했다. "그들의 실체를 국민이 알게 된 게 다행…." 물론 다행이다. 그러나 중세도 아닌 21세기에 천동설 대신 지동설이 받아들여지기까지 웬 시간이 그리도 오래 걸렸다는 것인가? '열린사회의 적(敵)'을 제때에 간파하고 응전(應戰)하려는 열린사회 나름의 날선 촉각이 무뎌졌기 때문이다. 우유배달과 택배일을 하면서 조직에 십일조를 바치고 '민족해방 민중민주주의 변혁'을 만들어가던 그들의 조직사업, 교양사업, 정치사업, 통일전선, 흑색선전의 '농축 우라늄'을 열린사회가 너무 가벼이 봤던 것이다. '태평 시리즈'는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그들이 지상으로 올라와 민얼굴을 드러낸 채 당당하게 '간부 노출 투쟁' '몸통 직영체제'로 나올 정도가 됐는데도 어떤 여당 출연자는 TV에서 한가로이 읊었다. "성숙한 시민사회가 그들을 견제할 수 있을 것, 그들은 소수…" 운운하면서.
북의 주체사상, 3대 세습, 인권문제, 핵(核)에 대해 끝내 딱 떨어지는 답변을 하지 않은 이상규를 향해 "왜 말을 돌리느냐?"고 직격한 '돌직구' 여성의 신선함처럼, 건강한 항체(抗體)가 시민사회에 있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그런 시민사회보다 훨씬 더 '센 것'이 있다. 대중사회가 그것이다. 대중은 사실과 진실보다는 무상급식이냐 그 반대냐, 반값 등록금이냐 그 반대냐, 무상의료냐 그 반대냐, 전쟁 할래 말래… 하는 선동적인 흥행몰이에 더 열광적으로 휩쓸린다. 시민적인 예지(叡智)는 그 분출하는 용암 속에 파묻히기 일쑤다.
'주사파 출신은 소수'라는 단순셈법 역시, 상대방 프로들보다 우리 쪽 아마추어들이 훨씬 더 많아서 좋다고 하는 '한나라․새누리 식(式)' 안일이다. 그 '소수'는 처음엔 남의 당(黨)에 살금살금 들어간다. 주소를 이리저리 옮기거나 대리투표를 하는 등 온갖 수단으로 그 당을 내부선거로 먹어간다. 그리곤 선거연대, 정책연대, 공동정권론으로 제1야당을 코 꿰어 간다. 이래도 그들이 '소수'로만 보이나? 그건 '소수'가 아니라, 다수를 견인하는 전위(前衛)다.
이런 그들이 세상을 한층 더 만만하게 보게 '축복'한 것은, 체제 싸움을 가장 앞줄에서 지휘해야 할 정부와 여당이 거꾸로 "체제 싸움의 시대는 갔다"고 뒷걸음질해준 것이다. 뒤늦게 "종북이 문제…"라곤 했지만, 자유민주 집권세력이라면 싸우자고 덤벼드는 상대방과는 싸우기 싫어도 싸우게 되는 불가피성을 제대로 인식해야 한다. 그리고 민주당은 자신들의 '묻지마 연대'가 오늘의 종북 약진을 불러온 데 대해 책임을 통감해야 한다. 이석기․김재연 제명론도 단순한 원내 협상카드로만 사용해선 안 된다. 민주당이 가야 할 길은 대한민국 '중도 야당'의 원위치를 회복하는 것이지, 주사파도 '동지' 대열에 품는 것이 아니다.
종북(從北) 지하조직 사건 관련자들이 여론의 빗발치는 집중포화를 받으면서도 눈 하나 깜짝이지 않고 대한민국 국회에 유유히 입성할 정도가 됐다면 그것은 우리 사회의 이념적 방역(防疫)이 그동안 얼마나 허술했는지를 통렬하게 풍자한다. 1990년대에만 해도 배웠다는 사람들일수록 이렇게 말하는 것이 마치 지식인의 '인증샷'처럼 돼 있었다. "북(北)이 저렇게 거덜났는데 친북(親北)이 대체 어디 있다고 그러느냐?" 그러나 그 무렵 이미 그 사람들 발밑에는 김일성주의 지하조직인 민족민주혁명당과 중부지역당이 깊숙이 뿌리내리고 있었다. 2000년대에 들어와서는 간첩조직 일심회나 '장군님의 일꾼'이 아니더라도, 광의의 NL(민족해방) 사관(史觀)이 정치경제학, 사회운동, 교육현장, 논술, 역사교과서, 공공부문, 노동, 미디어, 문화, 대중연예, 출판, 만화, SNS 등 모든 분야를 광범위하게 침식했다. 자주․반미(反美)․반전(反戰)․평화라는 코드로, 그리고 남한은 식민지 종속국, 분단 원흉은 이승만과 미국, 북한은 민족자주라는 것을 키워드로 해서.
이건 분명히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걱정해야 할 것이었다. 그런데도 꽤 많은 사람들이 "그런 건 없다. 있어도 별것 아니다. 별것 아닌 것을 떠드는 것은 알라미스트(호들갑)"라고 굳이 영어를 써가면서까지 말로 글로 세(勢)에 영합했다. 심지어는 기득권 피라미드의 최정상에 있는 재벌들까지 다투어 그쪽에 선을 대고 돈을 갖다 찔렀다. "우파는 후원하지 말라"는 지침과 함께. 이렇게 해서 있는 것이 없는 것처럼 치부되는 가운데 25년이 흘렀다.
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통합진보당 화산이 폭발했다. 그러자 이번엔 또 이런 말이 들리기 시작했다. "그들의 실체를 국민이 알게 된 게 다행…." 물론 다행이다. 그러나 중세도 아닌 21세기에 천동설 대신 지동설이 받아들여지기까지 웬 시간이 그리도 오래 걸렸다는 것인가? '열린사회의 적(敵)'을 제때에 간파하고 응전(應戰)하려는 열린사회 나름의 날선 촉각이 무뎌졌기 때문이다. 우유배달과 택배일을 하면서 조직에 십일조를 바치고 '민족해방 민중민주주의 변혁'을 만들어가던 그들의 조직사업, 교양사업, 정치사업, 통일전선, 흑색선전의 '농축 우라늄'을 열린사회가 너무 가벼이 봤던 것이다. '태평 시리즈'는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그들이 지상으로 올라와 민얼굴을 드러낸 채 당당하게 '간부 노출 투쟁' '몸통 직영체제'로 나올 정도가 됐는데도 어떤 여당 출연자는 TV에서 한가로이 읊었다. "성숙한 시민사회가 그들을 견제할 수 있을 것, 그들은 소수…" 운운하면서.
북의 주체사상, 3대 세습, 인권문제, 핵(核)에 대해 끝내 딱 떨어지는 답변을 하지 않은 이상규를 향해 "왜 말을 돌리느냐?"고 직격한 '돌직구' 여성의 신선함처럼, 건강한 항체(抗體)가 시민사회에 있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그런 시민사회보다 훨씬 더 '센 것'이 있다. 대중사회가 그것이다. 대중은 사실과 진실보다는 무상급식이냐 그 반대냐, 반값 등록금이냐 그 반대냐, 무상의료냐 그 반대냐, 전쟁 할래 말래… 하는 선동적인 흥행몰이에 더 열광적으로 휩쓸린다. 시민적인 예지(叡智)는 그 분출하는 용암 속에 파묻히기 일쑤다.
'주사파 출신은 소수'라는 단순셈법 역시, 상대방 프로들보다 우리 쪽 아마추어들이 훨씬 더 많아서 좋다고 하는 '한나라․새누리 식(式)' 안일이다. 그 '소수'는 처음엔 남의 당(黨)에 살금살금 들어간다. 주소를 이리저리 옮기거나 대리투표를 하는 등 온갖 수단으로 그 당을 내부선거로 먹어간다. 그리곤 선거연대, 정책연대, 공동정권론으로 제1야당을 코 꿰어 간다. 이래도 그들이 '소수'로만 보이나? 그건 '소수'가 아니라, 다수를 견인하는 전위(前衛)다.
이런 그들이 세상을 한층 더 만만하게 보게 '축복'한 것은, 체제 싸움을 가장 앞줄에서 지휘해야 할 정부와 여당이 거꾸로 "체제 싸움의 시대는 갔다"고 뒷걸음질해준 것이다. 뒤늦게 "종북이 문제…"라곤 했지만, 자유민주 집권세력이라면 싸우자고 덤벼드는 상대방과는 싸우기 싫어도 싸우게 되는 불가피성을 제대로 인식해야 한다. 그리고 민주당은 자신들의 '묻지마 연대'가 오늘의 종북 약진을 불러온 데 대해 책임을 통감해야 한다. 이석기․김재연 제명론도 단순한 원내 협상카드로만 사용해선 안 된다. 민주당이 가야 할 길은 대한민국 '중도 야당'의 원위치를 회복하는 것이지, 주사파도 '동지' 대열에 품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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