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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규형, “현대史 전문가 강규형 교수가 들려주는 6․25의 진실,” 조선일보, 2013. 6. 25, A10; 명지대 기록대학원 현대사 교수.]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패망으로 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우리 민족은 당연히 단일국가를 건설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북위 38도 선을 경계로 남과 북에 미․소 양군이 각각 진주하면서 국토 분단이라는 비극이 시작됐다. 이어 1948년 남쪽에는 UN이 '한반도에 존재하는 유일한 합법정부'로 결의한 대한민국 정부가, 북쪽에는 소련 등 공산국가들의 승인을 얻은 북한 정권이 생겼다.

6․25전쟁은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군의 대한민국에 대한 전격적인 남침(南侵)으로 시작됐다. 그런데 이런 6․25전쟁 발발을 두고 여러 논란이 있었다. 북한은 아직도 남쪽의 공격에 대한 북한의 반격으로 전쟁이 시작됐다고 주장한다. 1980년대 이래 한국학계와 사회에서도 이른바 '수정주의' 학자들을 중심으로 자연발생적 내전설(內戰說)이 광범위하게 퍼졌다. 그러나 미국과 소련 간의 냉전(冷戰)이 종식된 이후 구(舊)소련의 기밀문서와 중국의 문서 등을 통해 이런 주장이 대부분 허구임이 드러났다. 특히 1993년 1월 러시아 문서보관소에서 남침임을 증명하는 결정적 증거가 담긴 문서가 발견되면서 6․25전쟁의 전모가 실증적으로 드러났다.

6․25전쟁은 북한의 김일성․박헌영이 소련 스탈린의 허락을 받고 소련과 중공(中共)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며 면밀히 계획하고 전격적으로 집행한 침략 행위였다. 즉 소련․중공․북한이라는 공산 세계가 자유세계 전체에 던진 심각한 도전이었다.
일부 학자들은 대한민국에서도 북진통일(北進統一) 논의가 있었다며 북한의 남침 사실을 희석시키려 한다. 그러나 당시 대한민국은 전쟁을 일으킬 능력이 없었기에 북진통일 논의는 그야말로 정치적인 선전 구호에 불과했다.

전쟁 발발 후 대한민국은 백척간두 위기에 놓였으나 미국을 위시한 UN군의 즉각적인 참전으로 가까스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낙동강 방어선까지 밀린 국군과 UN군은 필사적으로 이 저지선을 방어해냈다. 그러는 와중에 1950년 9월 15일 맥아더 UN군 사령관이 지휘하는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전세는 역전됐다. 국군과 UN군은 당시 압록강까지 진격했고, 통일이 눈앞에 온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중공이 대규모 참전을 결정하면서 6․25는 다른 성격의 전쟁으로 변질했다. 중공군이 합동명령권을 장악하고 북한군을 지휘하면서 전쟁은 UN군과 중공군의 대결장이 된 것이다.

중공군의 거센 공세에 밀려 서울이 다시 점령되는 등 위기를 맞았으나, 양측이 일진일퇴를 거듭한 끝에 1951년 가을쯤 전선(戰線)은 교착상태에 빠졌다. 어느 한쪽의 일방적인 승리가 불가능한 상황이 온 것이다. 1952년 초부터는 중공과 북한 정권도 지쳐 휴전을 원하기 시작했다. 1952년 8월 20일 김일성은 중공의 총리 저우언라이(周恩來)를 통해 스탈린에게 빨리 휴전을 승인하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스탈린은 미국이 한반도에 묶여 있는 상태에서 정치․경제․군사적으로 고생하게 하는 것이 소련에 유리하다고 보고 휴전에 완강하게 반대했다.

결국 1953년 3월 5일 스탈린이 갑작스럽게 사망한 뒤에야 6․25전쟁의 휴전 협상이 가능해졌다. 결국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맺어져 현재의 휴전선이 군사분계선이 됐다.
전쟁은 전 국토를 폐허로 만들었으며, 막대한 인명 피해를 냈다. 국군을 포함한 유엔군 전사자는 18만명이었고, 북한군 52만명, 중공군 90만명의 사망자가 나왔다. 또한 대한민국 국민 중에는 구체적인 추산이 불가능한(100만명이 넘는 것으로 추정) 민간인 사상자가 나왔다.

올해는 정전(停戰) 60주년이 되는 해이다. 6․25전쟁을 끝낸 정전 체제가 60년 지속한 것이다. 세계적인 냉전 체제가 막을 내렸지만, 한반도에는 아직도 냉전 체제가 유지되고 있다. 시대착오적이고 폭압적인 북한 정권도 남아있다. 대한민국은 한반도를 포함한 동북아시아에 평화 체제를 구축하면서 현재의 정전 체제를 넘어서야 하는 거대한 과업을 눈앞에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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