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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군 전차 242대 vs 국군 0대

2013.07.09 15:26

관리자 조회 수:1008 추천:37

[김상원, “북한군 전차 242대 vs 국군 0대,” 조선일보, 2013. 6. 25, A10;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전쟁사부장.]

1950년 6월 25일 새벽 기습 공격을 감행한 북한군은 그야말로 파죽지세로 남하했다. 국군은 손도 제대로 써보지 못한 채 후퇴를 거듭해 불과 3일 만에 서울을 내주고 말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남북한 군(軍) 전력에서 북한군이 압도적이었기 때문이다.
북한 지상군은 10개 보병사단과 1개 전차여단, 3개 독립연대 등 병력(兵力)이 19만1680명이었다. 이에 비해 국군의 지상군 병력은 절반 정도인 9만6140명에 불과했다.

특히 북한군이 전면에 내세운 소련제 T-34 전차는 국군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이 전차는 소련군이 1944년 개량한 최신 모델이었다. 당시 우리 군은 탱크가 단 한 대도 없었다. 국군은 탱크를 향해 대전차 무기를 쏘고 또 쐈지만, 정면 두께가 79㎜인 전차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남한에 전차가 처음 들어온 것은 그해 7월 4일 미 24사단 예하 전차중대의 M24(체피) 전차였다. 또 전차를 파괴할 수 있는 로켓포는 7월 10일에야 처음 보급됐다. 공군 전력도 북한은 전투기 등이 211대 있었지만, 남한엔 연락기와 연습기 22대가 전부였다.

38도선 전역에서 공격을 개시한 북한의 계획은 한 달여 만에 남한을 점령하는 것이었다. 국군의 병력이 절대적으로 열세였던 데다, 북한의 남침 전날인 1950년 6월 24일 0시를 기해 비상경계령까지 해제한 상태였다. 많은 장병이 휴가와 외박을 나가는 바람에 부대에 남아 있는 병력도 크게 줄었다.

6․25전쟁이 터지자 UN안전보장이사회는 한국에 대한 군사 지원을 권고하는 결의문을 채택했다. 당시 59개 유엔 회원국 중 이 결의문을 지지한 나라가 53개국이었다. 1950년 7월 1일 미 24사단 예하 스미스 특수임무부대가 남한에 도착해 7월 5일 오산 전투에 투입됐다. 하지만 북한의 전투력은 미군도 제대로 막아내지 못할 정도로 강했다. 7월 말 북한군은 한반도의 90%를 장악했고, 마지막 남은 경상도 지역을 압박했다. 4개의 공격 축선에서 동시에 공격을 감행해 낙동강 방어선을 뚫고 최종 목표인 부산을 점령하려 했다. 하지만 국군과 유엔군이 강력한 방어전을 펼쳤고,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를 역전시키는 데 성공했다.

6․25전쟁은 발발한 후 첫 1년이 전선의 변화가 가장 심한 격동기였고, 나머지 기간은 전선의 변화가 거의 없는 교착기였다. 격동기 1년 동안 공산군이 세 차례나 38도 선을 넘나들었다. 첫 번째는 북한군이 낙동강까지, 두 번째는 중공군이 평택-삼척 선까지, 세 번째는 서울 북방 구파발-강릉 선까지 진출했으나 매번 국군과 유엔군이 격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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