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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민주주의 사관 비판

2015.11.13 11:16

oldfaith 조회 수:607 추천:2

민중민주주의 사관 비판

[김용식, “민중민주주의 사관 비판,” 시대사조, 재창간호; 성신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1. 근대사는 민족해방론으로, 현대사는 민중민주주의론으로

고교교과서 한국근현대사를 읽다 보면 놀라운 점은 한국 근․현대사가 매우 왜곡된 관점에서 기술되고 있으며 도처에서 마르크스의 亡靈(망령)이 발견된다는 사실이다. 근대 시기를 민족해방투쟁사적 관점에서 기술한 근․현대 교과서의 전반부를 주의 깊게 읽은 독자들이라면, 현대 시기의 집필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의 憂慮感(우려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문제는 이런 우려감이 실제 현실로 나타났다는 점이다. 이미 어느 정도 예견된 좌파적 인식이 대한민국 건국 이후의 역사에도 강력하게 投影(투영)되어 있다. 현대사 기록에 큰 영향을 끼친 좌파 정치적 관점으로는 민중민주주의론을 빼 놓을 수 없다. 비록 그것이 명시적으로 언급되지 않았다 해도 이미 구성적으로 근․현대 교과서의 현대 부분은 그 틀이 정해져 있으며, 가장 심각한 금성출판사의 경우에는 필자들이 민중․민족운동을 언급함으로써 자신들의 급진 좌파적 색채를 隱然中(은연중)에 드러내기도 했다.

자유민주주의의 관점에서 한국 근․현대사를 인식하기 위해서는 이와 같은 민중민주주의의 사관을 극복하는 것이 시급한 과제라는 점은 자명하다. 이 글은 현재 고등학교 근․현대 교과서의 저변에 흐르는 좌파적 역사관 중 하나인 민중민주주의 관점을 파헤치고 철저히 비판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저자는 다음과 같은 質問을 던진다. 우리 사회에서 1980년대 이후에 등장한 민중민주주의론은 어떤 것이며 이것이 교과서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가?

일부 고등학교 근․현대 교과서의 가장 큰 문제점은 그것이 좌파적 民衆史觀의 관점에서 기술되었다는 것이다. 근대사 부분은 민족해방론의 관점에서 기록되었고, 현대사 부분도 이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마르크스주의적인 민중사관에서 記述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일부 문제의 교과서에서 민주화 혹은 민주주의라는 용어로 내용이 包裝(포장)되어 있지만, 그 역사관의 사상적 근거를 자세히 살펴보면 민중민주주의 혹은 민중사관에 基礎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고등학교 교과서에서 다루어져야 할 시민의 일상적이며 통상적인 활동과 이를 반영하는 정부의 역할에 역사 기술의 초점이 맞추어지지 않았다. 또한 시민의 자유와 권리의 체계로서의 입헌적 국가체제의 운영과 이를 둘러싼 문제들에 대한 체계적인 기술도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보다는 역사 기술이 민중운동사의 관점에서 기록되었기 때문에 정부권력에 대한 도전을 제기하는 민중층의 활동에만 지면이 할당되어 있다. 동학운동, 반정부운동, 노동운동, 광주민중항쟁 등에 많은 紙麵이 할당되고 있지만 정상적인 歷代行政府의 활동이나 업적은 소개되지 않고 있다.

특히 현대사 부분에서 가장 중요한 한국의 국가건설과 민주사회의 형성․발달 과정에 대해 체계적인 소개가 이루어지지 못했고 역대 행정부나 대통령의 통치행위의 역사적 의미를 제대로 구명․평가하지도 못한다. 또한 교과서가 당연히 가르쳐야 할 자유민주주의의 기본 사상과 원리의 製度的 具顯(구현)의 측면에 대한 부분도 대단히 소홀히 취급되어 있다. 역대 대통령과 행정부들이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기여한 부분, 예컨대 이승만의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과 전후 복구의 업적, 박정희의 산업화 정책의 추진과 한일국교정상화 회담과 베트남 파병에 대한 부분이 추가되거나 다시 집필되어야 한다. 한편 1987년 한국의 민주화도 그 원인과 과정 및 결과에 대한 균형 잡힌 기술이 이루어져야 할 부분이다. 민중민주주의 관점에서 이것이 과소평가되었기 때문이다.

그 외에도 실질적인 국민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등의 각종 자유와 권리를 부여하고 삶의 수준을 높인 각종 민주주의의 제도들의 도입과 시행을 둘러싼 정부와 정치권의 노력에 대해 정당한 관심과 평가가 이루어지지 못한 것도 바로잡아야 할 부분이다. 각종 정치변동을 자유민주주의의 원리를 지키기 위한 관점에서 기술하지 못하고, 남한 체제의 부정적 측면을 부각시키거나 이에 대항한 민중운동의 위력을 설명하는 데 급급하고 있는 점은 근본적으로 민중민주주의나 민중사관의 관점을 극복하지 않는 한 개선되기 힘든 것이다.

2. 민중민주주의의 사상적 기원

어디서 갑자기 민중민주주의가 나왔을까? 1970년대까지 民衆은 被抑壓者(피억압자)의 설움을 대변하는 개념이었는데, 어느 틈에 갑자기 그것이 主權의 行使者가 되었나? 민중민주주의는 놀랍게도 그것이 자유주의를 수정하는 다양한 사상적 조류에서 비롯되었다. 한국의 민중주의자들이 1980년대에 궁극적으로 마르크스주의에서 그 해답을 찾으려 했지만 그러한 급진주의 사상적 성향은 이미 서양 근대의 급진 계몽주의 정치사상의 원조인 장 자크 루소에서부터 예고되었던 것이다.

서양 근대의 위대한 사상가 중의 하나인 루소는 그의 『社會契約論(사회계약론)』에서 가장 독창적이며 위대한 근대정치사상을 내놓았고 그중 인민이 一般意思(일반의사)의 擔持者(담지자)라고 보았던 일반의사론을 그 핵심 사상으로 꼽을 수 있다. 루소의 새로운 정치사회에 대한 비전에는 근대 자유주의적 제도보다는 고대 공화주의적 전통의 재현을 통해 그 해법을 찾았다. 루소는 로크와 함께 근대 국가의 國民主權을 완성하는 업적을 이룩했지만 극단적인 집단주의적 성향을 담은 一般意思 理論을 남겼다. 루소에 따르면 공동체 전체의 이익이 되는 일반의사(general will)의 담지자는 선출된 개별적 대표들이 아니라 집합적인 인격체가 되어야 한다. 따라서 루소의 사상은 자유주의 사상의 대표 제도나 개인주의적 가치를 수정하는 결과를 낳았다.

루소 사상의 가장 큰 문제점은 개인의 의사와 일반의사가 충돌할 때에 개인은 절대적으로 일반의사에 따라야 하는데 이를 위해 人間 本性을 개조하여야 한다는 급진론의 입장을 취하게 된다는 점이다. 루소에게 개인은 자유로운 상태에서 契約을 통해 自然狀態(자연상태)를 종식하고 社會狀態(사회상태)로 진입하지만 개인들은 일반의사에 자신의 사적인 욕구를 포기하는 ‘강요된 자유(forced to be free)’의 결단을 강요받는다. 인간의 利己的 本性을 뿌리뽑고 人間性을 개혁하려는 급진적 대안을 추구한 것이다. 루소는 일반의사는 개인들의 의사를 초월하여 존재하며 一切의 파벌이나 정치단체가 개입되지 않는 상태에서 그것이 인민의 滿場一緻(만장일치)의 결정에 의해 드러나야 한다고 보았다.

루소의 일반의사의 원리는 루소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실제 정치에서는 민중의 이익을 표방하는 특정한 독재자의 출현에 의해 악용될 수 있으며, 심할 경우에는 심각한 暴政(폭정)으로 발전할 수도 있다는 점이 프랑스대혁명기의 자코뱅당의 恐怖政治(공포정치)에 의해 입증되었다. 민중의 이름으로 어떠한 異見도 허용하지 않으려고 하며 절대적 선을 독점적으로 해석하려는 정치 리더십이 출현하여 독재와 폭정으로 치달을 수 있다는 것이 바로 민중민주주의 이론의 최대 문제점인 것이다.

루소와 유사하게 개인보다 집단으로서의 階級에서 정치사회의 개혁의 키를 찾으려 했던 마르크스-레닌주의자들은 개인을 자본주의 체제의 모순인 搾取(착취)와 疎外(소외)로부터 해방시키고 계급이 없는 이상사회를 건설한다는 地上樂園 理論을 제기했다. 칼 마르크스의 유물사관에서는 자유주의적 개인의 자율성을 인정하지 않고 정치의 독자성을 철저히 부인하기 때문에 정치적 민주주의 이론을 제기하는 대신에 정치를 근절시킬 공산주의혁명을 代案으로 제시했다. 마르크스의 유물사관에서의 관점에서 볼 때 정치의 문제는 정치․법률․문화 등의 상부구조의 영역이 하부구조인 경제적 토대의 전개에 의해 결정된다는 경제적 결정론의 관점에서 조망되며 궁극적으로 소멸하는 문제다. 그러나 이러한 급진 사회주의이론을 적용해 등장한 사회주의 정권들은 공산주의로의 즉각적인 移行이 어렵다고 주장하며 과도적인 단계로 사회주의적 통치기를 설정한다.

이 과도적 단계가 민주주의 혹은 민주화로 설정되지만 실제적 내용은 프롤레타리아 독재 혹은 민중민주주의다. 민주주의라고 하지만 프롤레타리아 독재이며 또한 黨의 독재이고 소수 엘리트 革命家의 독재다. 여기서 민주주의 왜곡이 생겨난다. 한국 현대사 서술에서 민중민주주의가 인민에게 권력이 있는 것처럼 주장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북한의 경우에서 보는 바와 같이 다수 민중들은 飢餓(기아)와 억압의 체제 하에 극도의 비자유와 隸從(예종)에의 삶을 사는 것이다. 또한 이들은 스탈린에서부터 폴포트에 이르기까지 세계 도처에서 부르주아 계급의 처단이라는 명목으로 수백만의 무고한 인민을 탄압하거나 집단적으로 虐殺(학살)하는 인류 역사에 길이 남을 큰 죄악을 스스럼없이 저질렀다. 개인이나 개인의 대표들이 아닌 추상적 인민이나 민중 또는 계급이라는 집단적 정체성의 관점에서 자유주의 정치에 대한 대안을 찾을 경우에 그 대안은 급진화되기 마련이다.

3. 한국의 민중민주주의 등장: 1980년대 초 마르크스주의 사관의 유입

한국의 민중민주주의 源流에는 1980년대 초 유입된 한국 현대사의 마르크스주의적 해석이 자리하고 있다. 미국의 신좌익운동의 이론가인 브루스 커밍스가 마르크스주의 사관을 빌려서 한국의 현대사를 그의 저서 『한국전쟁의 기원』에서 실패한 사회주의 혁명의 사례로 설명했다. 커밍스는 해방 이후 불평등한 토지 소유관계를 청산하고자 하는 민중의 해방적 열기가 각종 좌파 민중들의 人民委員會와 1946년 가을의 민중봉기에 의해 남한 전체에 가득했고 이를 저지하려는 미군정과 우파 세력에 대항해 사회주의자들의 사회혁명과 인민해방을 위한 전쟁이 바로 한국전쟁이었다고 주장했다.

커밍스는 한국 근대사와 해방에서 한국전쟁 직전까지의 상황을 교묘하게 왜곡하여 미국의 한반도정책과 한국의 우파 정치세력을 비판하고 한국전쟁의 책임을 북한이나 소련이 아닌 미국과 한국 우파 이승만에게 轉嫁(전가)했다. 이러한 新마르크스주의 한국 현대사의 해석은 이들의 주장을 원용하여 한국의 1980년대 상황을 해석하려는 한국 현대사 연구자들의 욕구와 맞아떨어졌다. 자생적 사회주의혁명이 결코 잘못된 것이 아니며 민중적 욕구의 자연적 표출이고 이를 반영하는 인민민주주의의 도입도 충분히 역사적 정당성을 가질 수 있다는 미국의 수정주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의 한국 현대사 해석은 한국의 급진적 성향의 젊은 역사 연구자들과 운동권에 큰 反響(반향)과 波及效果(파급효과)를 가져왔다.

1980년대 중반 이후 한국 근․현대사의 좌파들은 커밍스의 주장과 동일하게 東學蜂起(동학봉기)를 계급적 혁명의 전형으로 인용하여 혁명적 소작농민들의 지주들에 대한 변혁운동으로 해석했다. 커밍스는 해방정국의 좌파들의 집단봉기와 폭동도 동일한 논리, 즉 자생적 사회혁명의 모범적 사례로 해석한다. 1946년의 대대적인 대구의 폭동․봉기 사건과 1948년 제주의 4․3사건 등은 결코 민중들의 자생적․자동적 봉기가 사회혁명의 단계로 비화한 것이 아니고 당시 소련계 직업 공산주의 혁명가들의 치밀한 활동이 배후의 소련 대사관의 工作과 치밀하게 連繫(연계)되었다는 점에 대해 이들은 인정하지 않고 일체 침묵을 지킨다.

그러나 1980년대 한국의 근․현대사 연구자들의 일단은 점점 급진화되는 민중론과 민중사학에 심취하여 역사를 급진적․편향적 시각에서 바라보게 되었다. 1970년대까지 주로 소외되고 억압과 착취의 희생자라는 동정과 구제의 관점에서 역사의 객체로 간주되던 민중층이 1980년대에 와서 재야운동권에서부터 변혁운동의 관점에서 실천적으로 歷史의 主體로서 규정되기 시작했다.

잘 알려진 것처럼 한국의 민중민주주의론은 1980년대 초에는 레닌의 제국주의 이론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중남미의 종속이론(Dependency Theory)의 세례를 받아 한국 학계에 등장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80년대 중․후반에 민중민주주의론이 다시 고개를 든 것은 학술적 주장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급진적 운동권 내의 사회주의 혁명에 대한 이론 투쟁 과정에서 불거져 나온 것이다. 이것은 이론적 논쟁과 학문적 연구에 기반을 둔 결실로 등장한 것이 아니라 민주화 과정에서 민중적 열기가 집단적으로 표출되면서 급진 민중운동론자들의 현실적 입지가 넓어짐에 따라 이들 사이에서 혁명의 노선 투쟁을 둘러싸고 제기된 개념이다. 自民鬪(자민투), 民民鬪(민민투), 愛學鬪(애학투) 등의 학생운동권과 민통련 등 일부 재야 단체들은 민주화와 反美自主化 운동을 통해 민중민주주의 체제 도입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그러나 이들이 주장하는 민주주의는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반대하는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로 사실상 그 내용은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렇게 민중주의론이 現實的 動學에 근거해 불거져 나왔기 때문에 그것의 退陣(퇴진)도 역시 이론적 논리가 아니라 현실적 요인에 의하여 갑자기 이루어졌다. 즉, 세계적 사회주의 진영의 沒落(몰락)으로 말미암아 동아시아의 급진주의 좌파나 사회주의 운동에도 대대적인 타격이 가해졌고 한국의 좌파들의 민중민주주의론도 급격하게 그 설득력을 상실하게 된 것이다. 1987년 6․29선언 이후 한국 사회가 달성한 민주화는 결코 한국 사회가 독점자본이나 파쇼 軍閥(군벌)이 지배하는 변혁되어야 할 체제가 아니라, 미국의 저명한 정치학자 헌팅턴 교수가 주장했듯이 ‘제3의 민주화 파도’라는 세계적인 민주주의의 확산 조류의 하나라는 점이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이다. 1990년대 초반부터 민중민주주의론은 사회주의권의 몰락과 더불어 갑자기 현실과의 隔差(격차)가 너무도 큰 주장임이 白日下에 드러나면서 급격하게 재고되기 시작했고 이보다 온건한 입장인 시민운동론이나 시민사회운동론으로 置換(치환)되기 시작한 것이다.

4. 민중민주주의의 관점과 주장

1) 보편을 가장한 특수의 관점: 계급사관

민중민주주의론은 자유민주주의를 정면으로 부인하는 급진적인 이데올로기다. 이들은 부르주아 민주주의와 민중민주주의를 구분하고 전자를 買辦的(매판적)이라고 규정하고 민중이 주인이 되는 사회를 건설하자고 선언한다. 민중민주주의론자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正當化하기 위해 자신들의 주장과 맞지 않는 사실을 곧잘 왜곡하거나 隱蔽(은폐)한다. 한국 사회가 1960년대부터 꾸준히 그리고 급격하게 근대화되고 산업화됨에 따라 민중의 삶의 조건이 같은 비례로 나아지고 있다는 근본적인 사실에 대해 이들은 緘口한다. 한국의 민중들의 삶이 민중민주주의 방식이 아니라 자유민주주의 방식에 의해 구조적으로 嚮上하게 되어 있다는 사실을 이들은 이해하거나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세계가 주목하는 1980년대의 후반 대한민국 경제성장의 ‘成功의 神話’에 대해서도 이들은 외면한다. 이들에게는 세계적 주목을 끈 경제성장도, 또 1987년 민주화에 이어서 등장한 민주적 정부의 수립도, 目前에 임박했다고 간주된 혁명적 기회에 가려서 보이지 않았다.

1980년대 한국의 민중민주주의론자들은 普遍 문제보다는 ‘特殊利益’에 집착하여 특수의 관점과 보편의 관점을 역전시켜 사물을 바라보았다. 이들은 공공연히 자신이 사회주의자라는 점을 부인하지 않고 마르크스주의적 세계관에서 한국의 현실을 규정하려 들었다. 먼저 이들은 민주주의를 민중민주주의로 규정하고 ‘勞動階級 힘의 팽창의 결과’로 인해 실현 가능한 단계가 되었다고 간주했다. 당연히 이들에게는 ‘왜 민주주의를 특수한 계급의 문제로 환원하여 인식하려 하는가’라는 문제제기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들은 자유주의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信念體系에서 사물을 바라보기 때문이었다. 이들에게 민주주의란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위한 政治的․暫定的 道具에 불과한 것이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는 자유주의는 민주주의와 相衝하는 원리로 간주되며 노동계급의 권리와 복지 문제는 변혁을 통한 민중민주주의 실현에 의해서만 해결될 수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이 같은 주장은 이들이 신봉하는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顚覆的(전복적) 階級史觀에 의해 이미 精緻(정치)하게 이론적으로 규정되어 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민중의 착취’와 파쇼 군부 타도만을 외치는 동안 다수 국민들은 성공한 대한민국의 현실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면서 이들의 민중민주주의론은 점점 더 폐쇄적인 지식인 서클의 비현실적 급진담론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1970년대의 민중신학적인 민중론의 시각 및 논의와는 달리 1980년대의 한국의 젊은 좌파 이론가들은 민중을 多衆으로서의 대중이 아니라 마르크스적인 노동계층이나 기층민으로 좁게 규정했다. 이들은 현실정치가 ‘抑壓과 搾取의 體系’를 강요하는 파쇼적인 것이며 구조적으로 모순이 가득 차고 폭력에 의해서 유지되는 정의롭지 못한 사회를 구현했다고 현실을 극한적으로 부정했다.

이들 민중론자들은 체제의 일부의 부조리사례를 전체의 문제로 과대포장하여 구조적 모순으로 인식하고 이를 확대해석했다. 파쇼 정권은 자본주의 체제의 필연적 붕괴를 전제로 하는 것이며 이런 관점을 잘 입증하는 것이 군부 독재의 폭력성이 극적으로 표출된 1980년의 광주사태라는 주장을 폈다. 이들은 부르주아의 헤게모니를 민중으로 대체하고, 자본주의 체제를 근본적으로 변혁하여 사회주의 체제를 수립하여야 한다고 주장하며 사회주의를 代案으로 간주했다. 이들은 어떠한 점진적 개혁도 기회주의적이거나 개량주의적 해석이라고 거부하는 급진성을 그들의 트레이드마크로 삼았다.

민중민주주의론이 실패하는 이유는 그것이 막연한 계급적 다중을 대상화한 이론이라는 점 때문이다. 이것은 사회학적 분석에는 유용할 수 있지만 그 경우에는 민중이 민주주의의 주체라서가 아니라 기존의 민주주의론이 脆弱性(취약성)을 노정하기 때문에 설득력이 있어 보이는 것이다. 즉, 시민-부르주아층의 민주주의 이론이 다수 노동계층의 소외나 빈곤 등으로 인해 흔들릴 때에 프롤레타리아가 역사의 보편계급으로 등장할 것을 마르크스는 예언했다. 이를 위한 이론적 전제는 부르주아 계급의 무산자에 대한 착취와 貧益貧(빈익빈) 富益富(부익부) 등의 자본주의체제의 사회경제적 모순의 악화이다. 그러나 서구 자본주의는 역사적으로 진화하고 케인스의 수정자본주의의 사례에서 보듯이 자체적인 위기를 극복해 나갔고, 無産者階級의 의식을 ‘행복한 의식’으로 바꾸는 위력을 보여 주었다. 이런 이유로 제2차 세계대전후 서구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대부분 수정주의로 전환하여 서구 사회에서 더 이상 급진적 혁명의 가능성이 없음을 인정하고 혁명의 抛棄(포기)를 선언했다.

2) 자유민주주의의 실패론

자유민주주의의 실패를 주장하는 이들은 外勢와 독점자본이 지배하는 신식민지 파시즘을 주장하며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실패한 이념이라고 주장했다. 과연 한국의 자유민주주의가 실패한 이념인가?

한국이 해방 이후 미국의 영향권 아래 미국식 자유민주주의 정치체제를 택한 것은 한반도에서 미소 대결이라는 국제정치적 계기에 의해서 구조적으로 결정된 것이라는 측면도 있다. 그렇지만 자유주의나 민주주의 이념은 開化期부터 舊韓末 개화파와 온건 민족주의자들이 선호했던 이념이었다. 또한 한국에서 자유민주주의는 비록 서구의 先發産業國家와 같은 부르주아층의 정치경제적 주도적 역할을 통한 정치 이념으로의 지위를 획득한 것은 아니었지만, 製憲憲法의 주요 이념으로 채택된 이후 공교육의 과정을 통해 국민들의 기본 가치체계로 받아 들여지고 지속적으로 확산된 것이다. 다만 한국에서 중산층이 아직 취약했기 때문에 강력한 국가의 계도적 역할이 강조되었고 이에 1970년대에 수출산업화의 과정에서 자본가와 財閥(재벌)을 육성하여 경제발전을 한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박 대통령이 유신 권위주의로 일시적으로 자유민주주의를 유보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은 한편으로는 1․21북한특수부대의 청와대 공격사태나 북한에 의한 미 정보군함 푸에블로호 피납사태라는 도발적인 북한의 위협에 대응해야 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닉슨 독트린 이후 미국의 동북아 철수의 추세로 인한 안보위기 상황을 타결하기 위한 불가피한 면이 있었다.

1970년대 초 북한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도입된 군부 통치 요인은 1980년대 초반 광주사태를 무력으로 진압하고 집권한 제5공화국에서 더욱 강화된 것으로 일시적으로 보였지만 사실 5공화국은 고도로 경직되었던 유신체제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이완된 權威主義였다. 우선 1980년대에 개정된 헌법체제는 대통령 間選製를 택했지만 4공화국 이전의 자유민주적 원리와 기본권 조항들을 대부분 회복했다. 물론 군부 권위주의를 종식하기 위해 민주화 투쟁이 요구되었지만 이것은 야당이나 급진적 사회운동권이 자신들만의 힘으로 이룩한 것이 아니라 박정희 정권의 경제발전에 의해 형성된 한국의 중산층이 대거 가담한 6․10민주항쟁에 의하여 연합적으로 달성된 것이다. 즉, 한국의 民主化는 자유민주주의의 실패를 말해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경제성장을 위한 독재’라는 군부 통치의 원래의 명분이 민주화의 요구와 맞물려 형성된 政治的 協約 6․29선언에 의해 달성된 것이다. 5공 군부 정권은 한편으로는 경제성장의 달성에 의한 약속 이행의 압박과 다른 한편으로는 민주화를 요구하는 국민적 요구에 직면하여 自期製限的(자기제한적)으로 부가되었던 대통령 임기 7년 담임제를 지키면서 스스로 퇴진을 결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점에서 1987년 한국 민주화의 역사적 의의는 자유민주주의의 쇠퇴가 아니라 경제성장을 기반으로 한 ‘협약에 의한 민주화’와 이후의 자유민주주의의 재활성화라고 할 수 있다.

3) 반외세 민족민중혁명론

1980년대 한국의 민중민주주의론은 레닌의 제국주의론의 嫡子(적자)다. 즉, 한국의 민중은 역사적으로 철저한 착취 과정에 의해 형성․유지되며 계승되어야 하는 개념이다. 만일 레닌의 제국주의론이 역사 해석의 가장 보편타당한 주장이라면 한국의 민중민주주의론은 당연히 타당성을 가질 수 있을 것이라고 이들은 믿었다. 被壓迫民族(피압박민족)의 혁명은 레닌의 민족해방투쟁론의 법칙에 따라서 전개되어야 하며 그 전형이 한국이라는 주장이다. 따라서 커밍스는 사회주의 농민혁명의 전형적 경로가 세계사에서 필연적인 추세이며 한국도 지주제의 잔혹함, 부르주아의 비정통성, 제국주의 외세의 억압성의 역사에서 볼 때에 미국의 개입이 없었다면 이런 사회주의 혁명의 當爲 모델이 가장 잘 맞았을 나라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조금만 깊이 관찰해 보아도 이것은 짜맞추기 식 해석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우선 38도선 이북에 進駐(진주)한 소련이라는 외세에 비해 남한에 진주한 미국이라는 외세가 특별히 더 抑壓的이었거나 더 介入的이었다고 볼 뚜렷한 근거가 없다. 또한 한국전쟁의 결정이 미국이나 이승만이 내린 것이 아니다. 오히려 김일성이 스탈린에게 제안했지만, 그의 독자적 권한으로 결정되지 않았고, 스탈린의 최종적 재가와 지원 아래서 이루어졌다. 또 커밍스는 미국의 남한 정국에의 개입은 문제시하면서도 소련의 북한에 대한 개입을 문제삼지 않는 좌파적 편향성을 보인다. 반외세 민족해방론은 기본적으로 사회주의 체제를 지향해야 하고 그것은 소련의 지원이 필수적이라는 점을 이들이 모를 리 없다.

문제의 금성출판사의 고등학교 근․현대 교과서에서는 통일민족국가의 수립이 해방정국의 지상 목표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더 정확히 말하면 그 목표는 근대국민국가(modern nation-state)의 건설로 보아야 한다. 즉, 구한말 갑신정변이나 독립협회 운동기부터 시작되고 3․1운동과 임시정부에 의해 대내외적으로 천명된 근대 共和製的 정부 수립이라는 목표다. 그러나 금성출판사의 경우에는 목표를 통일국가로 설정함으로써 대한민국의 건국이 성공이 아니라 실패한 것이라는 억지 주장을 내놓고 있다. 즉, “남한만의 정부가 세워진 것은 통일민족국가의 수립이 실패에 돌아갔음을 뜻했다”고 대한민국의 건국에 대해 부정적 평가를 내렸다. 또한 수립된 체제가 대내적으로 자유민주주의 체제였다는 점조차도 언급하지 않는 교묘한 편향성을 보인다. 반면 북한은 親日派를 숙청했고, 土地改革을 실시했다는 점을 소개하여 사회주의 체제를 더 肯定的으로 평가하고 있다.

커밍스의 해석이 사실과 동떨어진 것이라는 점은 탈냉전기에 들어서면서 구 공산권의 문서들이 공개되면서 속속 밝혀졌다. 1946년 가을 봉기의 사례가 기실은 소련 대사관이 배후에서 개입하고 직업 공산주의 혁명가들이 동원된 철저한 공작에 의한 것임이 여러 가지 자료로 확인되었다. 그뿐 아니라 한국전쟁의 발발 과정도 자생적인 내전적 과정에 의한 것이 아니라 스탈린의 재가를 통해 그 시기와 방법이 결정된 철저히 공산 3국 지도자들 사이에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되고 준비되어 치러진 사건임이 밝혀졌다. 탈냉전과 더불어 레베데프, 슈티코프 등의 소련측의 군정 장교들의 비망록이 공개된 것이나 스트로브 탈보트가 입수한 「흐루시초프 備忘錄(비망록)」에서의 한국전쟁 직전 스탈린-김일성 회의와 스탈린의 지시 사항의 공개는 이런 점을 明若觀灬하게 입증하는 결정적 증거들이다.

5. 민중민주주의론 비판과 대안

1) 잘못된 철학적 전제: 마르크스주의 階級史觀

민중민주주의는 역사상 대개 실패로 끝난 공산주의 사회의 필연적 도래를 전제하거나 사회주의 체제의 현실적 작동을 전제로 하는 급진적 이론이다. 1990년대 초의 소련-동구권의 붕괴로 인해 이 같은 주장을 더 이상 하기 어렵다는 점이 인정된 때문인지 이런 주장이 최근에는 학계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사회주의 체제의 몰락으로 급진정치이념의 실패가 입증되었기에 민중민주주의도 주장하기 거의 불가능한 개념이라는 점을 좌파들도 이해한다.

급진주의 사상의 관점에서 민중민주주의를 주장하는 이들은 민주주의를 혁명을 위한 정치적 도구로서만 그 가치를 인정하며 궁극적으로 無階級, 無政治의 사회, 즉 共産社會의 도래를 염원한다. 이들은 현실적 정치지배의 제도로서의 민주주의를 결코 안정적이며 만족할 만한 해결책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그들은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프롤레타리아 독재로 대체되어야 하며 이것은 필연적으로 革命에 의해 달성되어야 한다고 굳게 믿는다. 이 때문에 정치적 지배형태로서의 민주주의에 대해서는 마르크스 이래로 이들은 길게 그 내용을 밝히려 들지 않는다.

마르크스는 그의 思想的 스승 격인 프리드리히 헤겔의 시민-부르주아층의 역사적 역할을 전면 부정하고 무산자계급으로 이를 대체하려는 顚覆的 구상에서 자신의 해방이론을 구성했다. 이런 서구 마르크시즘의 역사적 배경과 맥락을 검토하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도입해 한국에 적용하려 한 無謀한 시도가 1980년대 후반의 한국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의 경우에 발견된다. 세계사적으로 부르주아층의 발달이 지연된 後發 産業化 사회에서 프롤레타리아 계급혁명론을 주장하려는 시도는 역사적 상황에 맞지 않은 것이다. 한국에서 국가가 부르주아의 미발달이라는 조건을 보완하여 경제발전과 산업화에 나선 것은 계급착취의 현상이나 정치경제 체제의 모순이 사례가 아니라 硬性國家(경성국가)의 출현을 통한 후발 산업화과정이며 세계경제에서 개발도상국의 가장 성공적인 사례로 이해하여야 한다.

2) 역대 대통령의 폄하와 민중운동의 절대화

가장 문제가 되는 고등학교 근․현대 교과서인 금성출판사의 경우에서 보듯이 먼저 제1공화국에 대한 業績 기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는 1950년대 이승만 정부에 대한 객관적인 업적의 평가가 거의 없다는 점과 초대 대통령 이승만에 대한 肯定的 攷察을 전혀 하지 않았다는 점을 말해 준다. 오직 이승만이 독재를 했다는 부분만 열을 올려 기술하고 4․19의 원인론에서만 이를 부정적으로 조망한다.

현대 민주주의는 權力分立과 議會政治에 입각한 代議民主主義 제도로 실현된다는 점에서 해방 이후 한국의 정치는 기본적으로 자유민주주의 틀에서 전개되었다. 비록 헌법의 개정 사례나 정치적 파동들의 사건 등에서 한국의 자유민주주의적 정치과정이 불안정하고 격변을 겪었지만 기본적으로 한국의 자유민주주의는 국제적 기준에서 볼 때에 비서구 新生 국가들 사이에서 별 손색이 없는 것이었다. 이승만 정부가 한국사상 처음으로 서구 대의민주주의제를 채택하여 실시한 공로는 가장 중요하게 평가되어야 한다. 물론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 북한과의 대치 상황과 이어 발생한 6․25전쟁으로 극도의 국가안보의 불안한 상태에서 권력유지를 위해 헌정의 왜곡을 가져온 점은 비판되어야 한다. ‘부산 정치파동’이나 ‘四捨五入’ 개헌은 신생국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跛行的(파행적) 운용을 통해 취약성을 드러낸 사례다. 부산 정치파동은 법의 자의적 해석과 행정권력의 남용에 의해 입법부를 탄압하고 헌정 체제에 대한 원죄적 타격을 가한 사태였다. 이승만의 종신집권의 기반을 만든 1954년의 사사오입 개헌은 절차적 민주주의를 심각하게 훼손한 집권세력에 의한 헌정 질서의 攪亂(교란) 행위라는 점이 지적되어야 한다.

금성출판사의 근․현대 교과서는 박정희 정부에 대해서도 매우 편향적인 역사 기술을 하고 있다. 먼저, 박정희의 통치 전반기인 1960년대 3공화국 시기에 눈부신 경제적 치적과 국가발전의 기틀을 짰던 경제개발계획의 성립 과정에 대해 다루고 있지 않다. 5․16이라는 사건이 4․19 이후 장면 정부의 無能에 대한 비판과 함께 정국 불안과 민심의 불만 요인을 수렴하며 조국근대화를 위한 혁명을 시도했다는 점에 대해서도 침묵하고 있다. 4․19의 동기를 높이 평가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5․16의 동기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동 교과서는 박정희 정부의 치적을 독자가 인식하지 못하게 만들기 위해 3공화국의 정치․외교의 업적을 생략하고 바로 유신체제의 도입으로 껑충 뛰어 군사혁명이 아무런 업적 없이 바로 권위주의화된 것 같은 그릇된 인상을 강하게 준다. 1960년대의 경제발전도 1967년 선거에서의 국민들의 압도적 지지도 언급되지 않았다. 마지막 장에서도 경제성장이 이루어진 ‘漢江의 奇蹟’을 기술하면서도 박정희 정부나 3공화국이라는 표현을 인위적으로 배제하여 마치 경제성장이 주체적 노력 없이 저절로 이루어진 것 같은 착각을 하게 한다.

민중민주주의론자들은 민중운동을 절대화하는 성향이 있다. 이들은 먼저 해방정국에서 建國準備委員會나 朝鮮人民共和國 그리고 이들의 외곽단체인 인민위원회를 매우 중시하며 이들이 민중의 열망을 대변하는 조직이라고 주장한다. 금성출판사의 교과서 경우에 이들 좌파들의 활동을 급진 공산주의자 박헌영과 중도좌파 사회주의자 여운형의 구분도 없이 단일한 것처럼 소개하고 있다. 반면에 우파 민족지도자들의 활동은 거론하지 않았다. 특히 해방정국 초기의 이승만과 韓民黨의 활동이나 1946년의 김구의 주장과 활동을 거의 완전히 배제한 채 좌파 일색의 주장으로 일관하고 있다. 참으로 편향적인 관점에서 일방적으로 기술된 것이며 미국의 신좌익 사학자 커밍스의 주장의 축소판이다.

1980년대 민중운동과 변혁운동을 중시하는 상당수의 사람들은 1990년대 이후 노동운동이 가장 보편적인 대안적 지위를 가지는 변혁운동이라고 간주한다. 이들은 어떤 경우에도 노동운동은 정의로운 것이라고 간주한다. 이들이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노동자계급은 프롤레타리아, 즉 무산자계급이며 이들은 마르크스에 의해 전체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인 착취의 고리를 차단할 수 있는 보편적 계급으로 규정되기 때문이다. 중산층과 부르주아층의 역할을 과소평가하고 기층민중의 역할에 과도한 기대를 갖는 좌파적 역사 인식은 한국적 정치경제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려는 자세가 부족하며 이를 마르크스의 이론 틀에 꿰맞추려는 비현실적인 것이다. 서구 마르크시즘이 서구 사회에서 혁명의 불가능을 이미 선언하고 議會主義를 받아들여 馴緻(순치)된 사례와는 반대로 일부 한국의 비타협적 좌파들의 논리는 엉뚱한 비현실적인 대안인 민중민주주의를 만들어 낸 것이다.

3) 민주화와 절차적 민주주의 불신론

많은 이들이 문제를 지적한 금성출판사의 고교 교과서는 민주화운동을 더 큰 한국 현대사의 조류인 민족민주운동의 한 부분이라는 관점에서 기술했다. 즉, 민중민주주의 관점이나 민족민주운동론의 관점을 전제로 민주화운동을 평가하고 있다. 고교 역사 교과서 집필자들은 정상적인 행정부의 治績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운동사의 관점에서 광주민중운동이나 기타 민주화운동만을 언급한다. 따라서 1980년부터 김대중 정부까지를 민주화운동의 사건을 중심으로 단순 기술하고 있다. 자유민주주의 체제나 각 행정부의 실질적 치적이나 활동 내용에 대한 어떠한 객관적인 언급도 하지 않았다.

1980년대의 한국의 민중론은 1970년대의 민중신학이나 민주화운동의 浪漫性과는 사뭇 다른 양상을 보였다. 그것은 극도로 자신을 과신하는 정치적 경험에 기반한 것이다. 사회운동권과 중산층의 연합에 의한 1987년의 민주화의 경험에 대해 급진좌파는 이를 자신들의 한계로 해석하지 않았다. 오히려 과도한 자신감에 취하여 급진좌파끼리 분파주의적 논쟁을 통해 대중과 점점 더 격리된 그들만의 思攷의 極端으로 치달았다. 그 결과는 세계적 사회주의권의 붕괴라는 역사 현실의 진전과는 정 반대의 길인 사회주의 승리의 확신에 찬 급진적 혁명논쟁으로 치닫는 엄청난 誤謬를 범하게 되었다. 그들이 자신들만의 논쟁에 빠져 있었을 때에 그들의 세계를 지탱해 주던 현실에 큰 변화가 이미 시작되고 있었으니 사회주의권의 붕괴가 그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민주화를 사회주의를 위한 好機會로 잘못 해석한 이들은 이미 독선과 편견에 빠져 버려 현실을 자각할 능력을 상실했다. 그들은 점점 약해지는 자신감을 무마하기 위해 궁극적으로 다가올 제국주의-자본주의 세계의 필연적 붕괴와 사회주의 조국의 건설을 더욱 소리쳐 외쳤지만 그것은 되돌아오지 않는 메아리에 불과했다.

민중민주주의의 가장 심각한 오류는 이들이 간주하는 지주, 자본가, 제국주의자들의 역사적 착취의 존재가 발전의 사회인 1980년대 한국 사회에서 더 이상 타당성을 상실한 개념이라는 점이다. 또한 이들은 이런 제국주의론의 전제인 수탈적 상황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오히려 행복 의식을 갖는 다수의 민중들이 등장하는 변화된 신흥 산업국가의 민주화와 민주주의의 구현이라는 역사적 현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 이들이 외치는 新植民主義 국가독점 자본주의 사회의 혁명은 민주화와 올림픽의 개최를 통해 세계에 입증된 성공한 신흥 산업국 대한민국의 실정과는 전혀 들어맞지 않는 비현실적 口號였다.

6. 결론

한국 근․현대사의 해석은 마르크스 모델의 경직된 유물사관이나 레닌의 민족해방론의 낡고 좁은 세계관에서 벗어나서 열린 역사 인식틀 아래서 새롭게 시도되어야 한다. 한국의 근․현대사는 자유민주주의의 정신에 입각한 헌법 제도의 발전과 외향적 산업화를 통한 자본주의 시장경제 체제의 보편적 時代精神과 適應力에 주목하여야 한다. 또한 해방 후 한국 사회의 성장과 발전이라는 점에서 볼 때 유물사관에 따른 혁명론이 아니라 자유민주주의 사관의 관점에서 한국 근․현대사가 조망되어야 하고 역대 정부와 주요 제도의 운용이 다루어지며 중요한 사건에 대한 공정하며 객관적인 평가가 이루어져야 한다.

階級史觀의 민중민주주의론은 결국 끊임없이 혁명의 망령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러한 민중민주주의론은 경험적인 관찰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先驗的인 서구 좌파의 이론에서 기계적으로 도출된 것이다. 현실적으로 혁명이 어려웠던 우리의 근․현대사에서 혁명 찾기에 血眼이 되어 이들은 각종 급진적 운동이나 민중봉기를 혁명이나 이상적 운동, 즉 민중운동이나 민주화운동으로 과대포장하여 역사 왜곡을 일삼는다. 그리하여 이들은 ‘동학혁명’, ‘4․19혁명’, ‘1946년 대구민중항쟁’, ‘1948년 제주 4․3민중항쟁’, “5․18광주민중항쟁‘ 등의 사건들에 혁명과 민중운동의 명칭을 붙여 근․현대사를 왜곡하고 좌편향적으로 기술했다. 그러나 기실 이들은 혁명이나 민중항쟁이 아니고 이것에 못 미치는 수준의 단순한 봉기거나 폭동 등의 集閤行動的 사건들이었다.

세계사를 革命 萬能主義로 해석하려는 성향은 서구의 좌파, 특히 서구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서 유래한 것이다. 전후 미국의 좌파 사학자들이 사회혁명이론의 관점에서 마르크스의 혁명이론을 서양의 근대적 이행에 적용하여 설명하려 했다. 미국의 신마르크스주의자인 부르스 커밍스도 이러한 좌파 마르크시즘의 이론적 흐름을 한국적 상황에 적용하여 한국의 근대적 이행이 전형적인 중국 모델과 같은 길, 즉 사회주의 혁명의 길로 갔어야 한다는 주장을 내놓았다. 커밍스의 한국 근․현대사 연구는 철저한 마르크스주의 모델의 적용에 다름 아니었다. 커밍스가 뉴레프트 학자로서 좌파 이론의 모든 지식과 주장을 미국의 베트남 전쟁에 대한 개입에 반기를 들고 베트남 전쟁 反戰運動을 통해 얻은 靈感(영감)과 혼합하여 한반도에 쏟아 부어 그 실천적 관심을 溶解(용해)해 집필한 것이 『한국전쟁의 기원』이다. 그러나 脫冷戰期에 들어와서 커밍스의 수정주의적 한국 현대사 해석은 소련의 祕密文書의 해제로 인해 더 이상 사실이 아님이 밝혀지고 그의 내전론의 핵심 주장인 자생적 사회혁명론 가설 역시 오류였음이 밝혀졌다.

민중민주주의론은 한국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도 실패한 이론이다. 대표적인 것이 중국의 사례다. 마오쩌뚱의 新民主主義論은 그의 인민민주주의론에 의거해 전개되었지만 결국 이론의 귀결은 대대적인 현실 적용의 실패였다. 大躍進運動(대약진운동)과 文化革命의 실패에서 보듯이 마오쩌뚱의 맹목적인 대중에 대한 신념이 근대화의 시대적 요구에 직면한 중국 사회에 맞지 않는 것이었다. 북한의 천리마운동이나, 집단농장화 운동 등도 중국의 영향을 받아 도입한 것이었는데 이러한 노력들도 결국 1990년대 중반 대대적인 饑饉(기근)과 食量危機에서 극적으로 보듯이 스탈린식 독재권력 체제를 막지도 못하고 낙후된 사회주의 경제체제의 모순을 해결하지도 못했다.

마르크스의 이상적 공산주의 이론과는 동떨어진 개인숭배와 세습독재체제에 의한 가장 전체주의적인 收容所 群島가 북한의 현실이다. 오히려 세계가 산업화와 자본주의화하는 것이 역사의 대세라는 점을 바로 인식한 마오쩌뚱 이후의 중국의 지도부는 덩샤오핑을 중심으로 하여 경제선진화 로선을 추구했다. 그 결과 20년 넘게 연속 10%에 근접하는 경제성장률을 보여 21세기 초 세계경제에서 ‘중국의 急浮上’이라는 대대적 성공 사례를 계속적으로 유지하고 있다.

탈냉전과 더불어 소련과 동구 사회주의권의 붕괴로 말미암아 1990년대 중반 이후 한국 사회에서도 민중민주주의론이 공개적으로 주장되기는 어려워졌다. 그렇지만 급진 민주주의 주장들이 여러 가지 다른 변형으로 남아 있다. 그중의 하나가 앞에서 본 노동운동의 절대화 아니면 자유민주주의 실패론이다. 후기 산업화 단계에 접어든 우리 사회의 모든 문제가 단일 계급인 노동계급의 해방적 역할에 의해서만 해결될 수 있다는 19세기 마르크스의 명제를 굳게 신봉하는 이들이 우리 사회에 남아 있다면 이것은 정말 不可思議한 일이다. 이미 대기업 노조 간부들의 노동귀족화 현상은 어제 오늘일이 아니다. 21세기 한국의 노동운동이 특수이익의 관철을 위한 이익집단정치(interest group politics)의 성격을 강하게 띠는 ‘그들만의 잔치’가 되어 버렸다.

1990년대 이후 한국 사회에 민주화가 정착되면서 변혁론이 사라지고 개혁적 시민운동이 등장했고, 정치권 내의 제도적 개혁을 통한 민주주의의 실현을 추구하는 관점이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른바 시민운동론의 관점이 국민들의 지지를 얻고 이를 위한 시민운동단체의 활동이 정치권과 일반 언론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러나 어떤 영문인지, 갑자기 2000년대에 발간된 고등학교 근․현대 교과서에서 1980년대 후반에 극소수 좌파운동권에서 유행하던 민중민주주의 관점이 발견되었다. 민중이 우리 사회를 급진 변혁적 방법을 통해 해방시켜야 한다는 이러한 민중민주주의 그릇된 주장은 더 이상 용납될 수 없는 역사 왜곡이다. 이것이 폐기되어야만 고등학교 근․현대 교과서의 역사 기술이 균형 잡힌 건전한 역사관을 되찾을 수 있다.<시대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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