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여년 전 아랍을 여행할 때다. 중동 전역에서 전쟁이 일어나도 시리아만큼은 예외겠구나 싶었다. 길에서 만난 시리아 사람들의 성정은 착하고 곧았다. 말투도 대개 깨끗하고 품격 있었다. 거세고 시끌시끌한 여느 아랍과는 달랐다. 그러나 만 10년의 내전은 시리아를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40만명에 가까운 사람이 목숨을 잃었고, 전 인구의 절반 이상이 집을 떠나 방랑하는 비극의 땅이 되었다. 그 비극은 이제 북부 이들리브(Idlib)에서 절정을 맞고 있다.
올리브 나무 무성한 땅 이들리브는 전장으로 변했다. 이스라엘의 고대 도시 메기도를 연상시킨다. 사통팔달 메기도는 열방의 군왕들이 모여들어 세계 최후의 전쟁을 벌인다는 종말론적 상징 아마겟돈의 다른 말이다. 마치 메기도의 예언처럼 시리아 북부의 요지 이들리브에는 숱한 국내외 세력이 모여들어 지옥의 묵시록을 쓰고 있다. 각기 자기의 이익을 위해 난마처럼 얽혀 싸우고 있다.
정부군 전세 장악, 내전은 계속
정부군 뒤에는 러시아가 포진하고 있다. 처음부터 아사드 정부군을 지원하며 반군 격퇴를 도왔다. 정부군과의 싸움만으로도 벅찬 남부 시리아의 반군은 러시아의 개입으로 인해 무력하게 무너지기 시작했다. 여기에 이란이 합세했다. 이란은 민병대를 보냈을 뿐 아니라 레바논의 헤즈볼라까지 동원해 아사드 정부를 돕고 있다. 러시아·이란·헤즈볼라의 지원을 받은 정부군은 초반 열세를 반전시켰다. 반군을 남부 다마스쿠스, 중부 홈스 등 시리아 전역에서 격퇴하며 북부 이들리브까지 몰아쳤다. 북으로 도망쳐 터키 접경까지 내몰린 반군들은 더 갈 곳이 없다.
러시아는 시리아를 거점으로 중동에서 세계열강으로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미국이 빠져나간 중동에서 맹주 역할을 꿈꾼다. 역내 패권을 꿈꾸는 이란은 소위 '시아파 벨트'의 한 축인 시리아를 파고들었다. 이란~이라크~시리아~레바논으로 이어나가는 세력의 연결망이다. 이 연합 세력은 시리아 땅을 누비며 반군과 싸우고 있다. 이들은 시리아의 민주화에 관심이 없다.
아랍의 봄이 찾아왔을 때 순수하게 민주주의를 요구하며 거리에 나섰던 시민들과 이들이 모여 결성한 반군들은 이제 이들리브 지역으로 몰렸다. 이쯤 되면 내전이 곧 끝날 모양새여야 한다. 그러나 또 다른 변수가 있었다. 정부군과 싸우면서 동시에 독자 세력화를 모색하는 그룹들이다. 그중 하나는 내전의 혼란을 틈타 몸집을 키워왔던 알카에다 계열의 지하디스트들이다. '누스라 전선'이라는 이름으로 이라크에서 시리아로 넘어와 자리를 잡았던 알카에다 이라크의 분파다. 이들은 '하야트 타흐리르 알샴(HTS)'이라는 이름으로 이들리브 지역에 뿌리를 내렸다. 악명 높은 테러 집단 IS는 격퇴되었지만, 또 다른 극단주의 HTS는 살아남은 것이다. 나아가 아예 정상적인 국가 흉내를 내면서 시리아 내 이슬람 분리주의 집단의 토착화를 꿈꾸고 있다.
오랫동안 자치권을 희구해왔던 시리아 내 쿠르드족 역시 이들리브의 한편에서 싸우고 있다. 쿠르드 민병대는 미국과 손잡고 시리아 북서부 유프라테스 동편에서 지난 5년간 IS 격퇴전을 벌이며 혁혁한 공을 세웠다. 그러나 미군의 시리아 철군 소식과 함께 위기에 처했다. 미국의 도움을 받아 최소한의 자치권을 인정받으려 했던 시리아 쿠르드족은 토사구팽의 쓴맛을 보았다. 쿠르드를 극도로 혐오하는 터키는 시리아 내부로 진격, 잔인하게 진압했다. 터키의 반체제 세력인 쿠르드 노동당과 한통속이라는 이유였다. 터키는 시리아 북부에 계속 주둔하면서 내전의 혼란 와중에 조금씩 영향력을 키우고 있다.
코로나 사태 와중 테러 세력 더 커져
이 정도면 내전이라 하기 어렵다. 국제전에 가깝다. 존재감을 드러내려는 열강, 역내 패권을 추구하는 지역 강국, 권력을 지키려는 엄혹한 정부, 이슬람 원리를 시현하려는 테러 집단과 자치권을 획득하려는 소수민족이 각자의 이익을 위해 싸우는 복잡계 전쟁이 되어버렸다.
전선이 복잡하고 각자 속셈이 엇갈리다 보니 좀처럼 해법을 찾지 못하고 있다. 혼돈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비극의 밀도는 더 높아진다. 300만 넘는 국내 피란민이 정부군에 쫓겨 이들리브에 몰려 있다. 어린이만 100만이라고 한다. 이처럼 잠재적 난민은 폭증하고, 테러 집단은 토착화하면서 이들리브는 테러와 난민이 겹친 인간 안보 붕괴의 상징으로 변해간다. 여기에 바이러스까지 덮쳤다. 하지만 화학무기와 통폭탄의 위협에 늘 노출되는 이들리브 주민들에게는 눈에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의 위협은 먼 이야기다. 거리 두기와 방역은 포연 자욱한 전쟁터에서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약품 하나 제대로 구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 마스크 착용이나 흐르는 물에 손 씻기 같은 권고가 들릴 리 없다.
더 안타까운 것은 국제사회가 바이러스와의 싸움에 힘을 기울이느라 이들리브를 잊고 있다는 사실이다. 무관심은 극단주의 테러 세력들에 호기다. 위기에 몰렸던 극단주의자들은 혼돈의 땅 이들리브를 근거지로 다시 힘을 모으고 있다. 코로나 방역 전쟁 와중에 테러 바
이러스가 이들리브에서 스멀스멀 자라고 있는 셈이다. 방치할 수 없다. 유엔이 팔을 걷어붙이고 그간 지지부진했던 시리아 정치 협상에 다시 나서야 한다. 쉽지 않지만 해야 할 일이다. 이들리브에 깊이 개입한 러시아를 설득하고 분쟁 당사자들과 적극적으로 대화하며 평화의 여정을 한 땀 한 땀 모색하는 수밖에 없다. 이들리브가 21세기 아마겟돈이 되어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