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중구 명동의 중화인민공화국 대사관은 1992년 8월 24일까지는 중화민국 대사관이었다. 쑨원을 임시 대총통으로 삼아 1912년에 탄생한 중화민국은, 제국주의 일본과 치열하게 싸우던 탓에 그 후방에서 자라나던 공산당을 제어하는 데 실패하고 1949년 타이완 섬으로 옮겨갔다. 1919년 상하이에서 성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32년 4월 윤봉길 의사가 일본군 수뇌부에 폭탄을 던진 상하이 의거 사건 이후 국민당 및 장제스 총통의 후원을 받게 되었다. 그로부터 1992년 공산당의 중화인민공화국과 수교할 때까지 60년가량 중화민국과 국교를 유지했다.
중화인민공화국과 수교하게 되자 한국 외교부는 타이완 측에 대해 사흘 안에 명동 대사관에서 철수할 것을 요구했다. 한국 이전에도 타이완 중화민국과 단교하는 국가가 많았기 때문에, 타이완 측은 한국도 언젠가 단교할 것이라는 각오는 하고 있었다. 그래서 최소한 한국이 중화인민공화국과의 외교 수립 교섭 상황을 미리 알려주어서, 자신들이 명동의 대사관을 처분할 시간을 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중화인민공화국에 명동 대사관을 선물로 주고 싶었던 한국 측은 이 부탁을 거절하고, 단교 직전에야 일방적으로 타이완 측에 통보했다. 대한민국은 이때 중화인민공화국 측의 요구에 따라 중화인민공화국을 중국의 유일 정부로 인정하여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국민당의 장제스 총통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조선광복군을 후원해주었고, 1943년의 카이로 회담에서도 대한민국의 독립에 대한 문구를 넣어 주었다. 조선광복군은 광복 후 한국군의 원형이 되었다. 한편 1938년 김원봉을 대표로 하여 설립된 조선의용대 가운데 대부분은 공산당의 팔로군 측으로 옮겨갔고, 이들은 광복 후에 북한 인민군에 편입되었다. 이들이 북한에 들어오면서, 김일성은 이들과 함께 한국을 침공해서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조선일보 2019년 6월 14일자 ‘조선의용대원 80%가 결성한 조선의용군, 北인민군의 뿌리가 됐다’).
최근 미국의 경제 제재를 받고 있던 화웨이의 런정페이 회장은, 자기 회사가 6·25전쟁 당시 중공군이 대승을 거뒀다고 하는 상감령(上甘嶺) 전투의 정신을 이어받았다고 열변을 토한 바 있다(조선일보 2019년 5월 28일자 ‘장교 출신 런정페이 화웨이 회장, ‘상감령’ 언급하며 무역전쟁 결의’). 즉 북한의 불법적 침략에 맞서 싸우고, 나아가 한반도 통일을 눈앞에 둔 한국군을 막아 선 것을 자기 회사의 정신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말한다. 중국인들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받아주었으니 혐중(嫌中)하면 안 된다고. 이 사람의 말은 사실을 말하는 것 같으면서 교묘하게 사실을 회피하고 있다. 어려웠던 시기 기댈 곳 없는 대한민국 망명객들을 받아준 것은 마오쩌둥의 공산당이 아니라 장제스의 국민당이었다.
물론 정부가 곧 국민은 아니고, 중일전쟁 당시의 중화민국 시민 상당수의 후손은 현재의 중화인민공화국에 거주하고 있다. 그러나 이 중화인민공화국 시민들은 ‘항미원조’ 군대의 장병으로서 1951년 대한민국을 침공했고, 상감령 전투를 자랑스러워하는 화웨이 같은 기업을 만들어냈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한국 시민과 정부가 중화인민공화국에 대해 비논리적으로 우호적이고, 중화민국 타이완에 대해 지나치게 몰염치하다고 생각한다. 중화민국‧중화인민공화국 문제에서 한국인은 의리보다 이익을 중시했다. 이러고도 부끄러워할 줄 모르고 오히려 사실을 왜곡하고 있으니, 국제사회에 대해 낯부끄러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