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김상곤 교육부 장관 시절 펴낸 교육부 백서(白書)에 ‘연구학교는 학교 현장에서도 외면을 받았다’라고 했습니다. 너무 괘씸해 그때부터 이 책을 준비했습니다.”


홍택정(73) 문명고 이사장은 직정적이었다. 그가 몇몇 필자와 공동으로 ‘문명고 역사지키기 77일 백서’를 출간했다. 세간에서는 벌써 잊힌 한 고등학교의 ‘작은 일’을 소환한 것이다.


“그 과정에서 우리 학교가 얼마나 고통받았고, 외부 세력까지 개입된 불법·폭력으로 광란의 현장이 됐던 사실에 대해 교육부 백서에는 한 줄 언급이 없었습니다. 마치 학교가 몹쓸 일을 저지른 것처럼 해놓았습니다.”


박근혜 정부가 ‘국정 역사교과서’를 만들었을 때, 경북 경산시에 있는 문명고는 전국에서 유일하게 ‘연구학교’로 선정됐다. 국정 교과서를 채택해 기존의 검인정 교과서와 함께 수업 시간에 가르치겠다는 취지였다.


하지만 일부 교사·학생·학부모는 학교의 결정에 강하게 반발했고, 심지어 그 지역 민노총·전교조·농민회까지 가세했다. 그해 입학식도 열지 못했다. 지방의 한 고교가 가장 뜨거운 뉴스 현장이 됐던 것이다. 박근혜 탄핵으로 출범한 문재인 정부는 ‘적폐 청산 대상 1호’로 찍어 국정 역사교과서를 백지화했다. 문명고의 연구학교 지정과 철회도 한때의 소동으로 끝났다.


돈키호테


―이미 지나갔고 돌이킬 수 없는데, 지금 와서 이런 책을 내는 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당시에 입만 벌리면 ‘법치’니 ‘민주적 절차’라고 떠들던 전교조 등 세력이 학교에서 이런 짓을 했구나, 그때 있었던 사실을 기록으로는 남겨둬야 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당초에 왜 국정 역사교과서를 채택하려고 했습니까?


“검정(檢定) 역사교과서의 좌편향 문제가 워낙 심각했으니까요. 박근혜 정부에서 국정 교과서를 하겠다고 했을 때, 사학의 이사장 모임인 한국사립초중고법인협의희는 2016년 11월 정기총회에서 지지 성명을 냈습니다. 그런 결정을 해놓고는 막상 국정 교과서 여론이 안 좋아지자 다들 돌아섰어요. 저 혼자만 ‘돈키호테’가 된 격이었지요.”


―당초 ‘국정화’ 추진에는 무리한 면이 많았습니다. 보수 성향 언론인·지식인들도 시대 역행이라며 돌아섰지요?


“저도 국정화 방식에는 찬성 안 했지만, 이 말고는 역사 교과서의 좌편향을 바로잡는 게 현실적으로 어려웠습니다.”


―박근혜 탄핵 촛불 집회가 열리는 시점이었는데, 정권이 바뀌면 교과서 운명이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판단은 못 했나요?


“교육부에서 교과서를 만들었고, 학교 내 합법적 절차를 거쳐 연구학교 결정이 이뤄졌습니다. 학교를 대표하는 교장·운영위원회·동창회가 찬성했습니다. 그런 결정을 어느 반대 세력이 떠들고 위협한다고 해서 포기할 수는 없는 겁니다. 저보고 ‘극우’라고 하는데, 저는 ‘불법과 폭력에 결코 항복하지 않겠다’는 원칙주의자입니다.”


―국정 역사교과서는 한 학교의 결정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었지요. 박 전 대통령이 탄핵당하자 44억 원쯤 들여 만든 교과서는 한 번도 사용 못 하고 폐기되고 말았지요.


“좌파 진영에서는 책이 나오기도 전부터 ‘친일·독재 미화 교과서’라고 공격했습니다. 실제 나오자 그런 말은 쑥 들어갔습니다. 그때까지 나온 역사 교과서 중에서 가장 우수했습니다. 게다가 우리 학교에서는 국정 교과서만으로 가르치겠다는 것이 아니라, 검정 교과서도 부교재로 함께 비교 연구를 하겠다고 한 겁니다. 이게 난리를 치면서 막아야 할 사안입니까.”


―당초 이사장께서 국정 역사교과서를 채택하자고 한 겁니까?


“김태동 전 교장 선생님이 먼저 의견을 냈습니다. 이는 학교장의 고유 권한입니다. 전체 교사 79%가 동의했고, 운영위원회에서도 5:4로, 동창회에서도 긴급회의를 열어 찬성했습니다. 하지만 전교조 교사 3명이 주도해 반대가 시작됐습니다. 학교 경영의 책임자인 저는 분노를 참으면서 ‘광란의 77일’을 지켜봤습니다.”


―그 과정에서 가장 마음에 맺히는 장면은요?


"민노총과 전교조, 농민회 등 외부 세력이 교장실까지 쳐들어와 협박했습니다. 제가 학교에서 나가달라고 요구하자 “××놈아! 니가 뭐고?”라는 등 욕을 했습니다. 왜 이들이 학사(學事)에 개입합니까. 학교가 정치적 선동의 제물이 되고 만 겁니다. 저에 관한 신상 털기, 인신공격도 행해졌어요."


―저는 국정 교과서가 가져올 ‘획일성’ 문제를 비판했지만, 학교가 자율적으로 국정 교과서를 선택한 것이라면 존중해야 한다고 봤습니다. 그게 오히려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이지요. 단지 한 학교에 불과한데, 왜 그렇게 기를 쓰면서 반대했을까요?


“저도 이해가 안 됐습니다. 반대하는 이들은 교과서 내용은 보지도 않았습니다. 일부 학생도 휩쓸렸습니다. 당시 학생회장에게 반대 이유를 물으니 ‘왜 우리 학교만 국정 교과서를 선택합니까? 인터넷 강사 선생님이 국정은 나쁘다고 했습니다. 최순실 교과서입니다’라고 답변했어요.”


―당시 ‘연구학교 운영 계획’을 맡았던 역사 과목 교사도 나중에 반대했다고 들었는데요?


“그 뒤 분위기가 바뀌자 돌아섰습니다. 한마디로 황당했습니다.”


대문짝만한 문재인·김정은 사진


―반대 교사들은 학생과 학교를 위해 그렇게 한다고 했지요?


“그렇지만 학교 차원의 결정이 났으면 따라줘야 합니다. 교장과 이사장은 학교를 말아먹기 위해 연구학교를 선택했을까요. 이들은 외부 세력과 비상대책위를 만들어 계속 반대 서명을 받았고 언론에 왜곡된 내용을 흘렀습니다. 정말 문제의식이 있는 교사라면, 이번 기회에 국정 교과서의 왜곡된 부분을 반드시 파헤쳐보겠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요.”


―학부모대책위가 경북교육청을 상대로 낸 ‘연구학교 지정 효력정지 신청’을 법원이 받아들였지요?


여기서도 민변이 나서 법적 소송을 대행했습니다. 재판부는 ‘이 교과서로 대입을 준비해야 하는 학생과 학부모들은 회복할 수 없는 손해를 본다’고 했어요. 국정으로만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국정과 검정 교과서 두 권을 비교 연구하겠다는데 오히려 도움이 되지 무슨 불이익입니까. 박근혜 탄핵 직후라 그런 눈치 판결이 나왔을 겁니다.”


―그 뒤 문 대통령이 국정 역사 교과서를 ‘적폐 1호’로 찍어 행정명령으로 폐기 지시를 했지요. 올해 들어와 검정 역사 교과서가 개편됐지요. 지금 문명고는 어떤 교과서를 채택하고 있습니까?


“검정 교과서 8종이 다 그 수준입니다. 한 교과서는 우리 현대사 기술에서 ‘독재’라는 표현을 27회, 북한에 대해서는 한 번만 언급했습니다. 북한이 내놓은 주장 그대로 ‘유일(唯一) 체제’라고만 쓰고 있습니다. 천안함 사건이나 연평도 폭격 등 북한의 무력 도발은 빠져있고, 북한 정권을 평화주의자로 비치게 해놓았습니다. 국정 교과서가 나쁘다고 폐기했으면 더 좋은 교과서가 나와야 하지 않습니까. 이번 검정 교과서가 제대로 만들어졌으면 ‘우리가 괜히 그때 고집부렸다’며 얼마나 미안했겠습니까.”


―그전의 검정 교과서보다 더 못하다는 뜻인가요?


불과 3년밖에 안 지난 촛불 집회가 교과서마다 모두 나옵니다. 촛불 집회 컬러 사진을 두 면에 걸쳐 게재하거나, 이를 ’21세기형 민주혁명'이라고도 했습니다. 문 대통령이 판문점에서 김정은과 마주 서서 웃고있는 전면 사진도 나옵니다. 대신 보수 쪽 전직 대통령들은 수의 입은 모습도 실려있습니다. 이런 교과서를 만들려고 그렇게 난리를 쳤나 싶습니다.”


―과거에는 언론이 역사 교과서의 좌편향성 문제를 떠들었는데, 현 정권에서 워낙 놀랄 만한 뉴스가 많아서인지 교과서 문제는 뉴스가 안 되고 지나갔군요.


국정 교과서는 내용 면에서 크게 나무랄 데 없지만 ‘박근혜 교과서’ ‘최순실 교과서’라는 식으로 집요하게 공격받았습니다. 하지만 이번 검정 교과서는 명실상부 ‘문재인 교과서’가 됐습니다. 역사 교과서인 것 같지만, 실제로는 정권 홍보 책자이고 학생 대상의 이념 교재인 겁니다.”


―'학생 대상 이념 교재'라는 표현은 너무 센 것 같군요.


“검정 교과서 집필진 중에는 ‘학생들은 민중의 기간 부대가 될 자원’이라는 글을 썼던 이도 있습니다. 올해부터 18세인 고3 학생은 투표권을 갖게 됩니다. 지금 역사 교과서대로 정치 편향성을 주입하면 50만 표는 어디로 가겠습니까.”


―요즘 같은 세상에 학생들이 어떤 교과서로 배운다고 그쪽으로 가겠습니까?


“작년 말 고1 학생이 교지(校誌)에 ‘그동안 이승만을 나쁜 인물로 배웠는데, 도서관에서 이승만 관련 책을 읽으니 그렇지 않았다. 왜 우리는 이승만을 이렇게 홀대해왔느냐’는 글을 실었습니다. 학생들은 교과서나 교사, 추천 도서에 크게 영향을 받습니다.”


사학 이사장은 ‘식물인간’


―몇 달 전 연구학교 사태와 관련해 집단행동을 했던 교사 다섯 명을 징계했다고 들었습니다. 세월이 지났는데 지금 와서 이러는 것은 뒤끝 있는 보복처럼 비치는데요?


“교장 선생님이 지난 6월 명예퇴직 전에 해교(害校) 행위자 징계를 요청했습니다. 그냥 넘어갈 수 없고 최소한 절차는 밟아야 한다는 것이었지요. 감봉 3개월, 견책 같은 경징계 수준으로 했습니다.”


―전교조가 부당 징계를 취소하라는 성명을 냈고, 해당 교사들은 소청심사위원회에 이의 제기를 했지요?


“이들은 서로에게 책임을 떠넘겼고, 다른 교사들의 책임은 왜 묻지 않느냐는 식으로 나왔습니다. 이런 모습까지 보니 정말 실망이 컸습니다. 해당 교사들이 ‘내 책임이니 다른 교사들은 용서해달라’고 했으면 아마 징계를 거뒀을 겁니다.”


―연구학교 무산으로 끝이 아니라 여전히 후유증이 남아있군요.


“제가 안 피우던 담배도 그때 피웠습니다. 학교 기강이 무너졌고요. 교장과 이사장의 말이 안 통하면 어떻게 학교를 운영하겠습니까. 사학(私學)의 이사장은 건학 이념을 실천하며 학교를 지키는 자리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숱한 규제와 억압으로 손발이 잘려나가 식물인간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학교에서 월급 한 푼 받는 것도 없습니다. 이 업을 물려주신 선친께 원망의 마음도 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