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영우, "종전 선언은 藥과 毒 다 될 수 있다," 조선일보, 2020. 11. 3, A30쪽; 한반도미래포럼 이사장, 전 외교안보 수석.]


문재인 정부의 종전 선언에 대한 집착은 가히 병적 수준이다. 문 대통령은 지난 9월 23일 유엔 총회 영상 기조연설에서 종전 선언이 “한반도에서 비핵화와 함께 항구적 평화 체제의 길을 여는 문이 될 것”이라고 한 데 이어 10월 8일 코리아 소사이어티 연례 만찬 화상 기조연설에서도 “종전 선언이 한반도 평화의 시작”이라고 했다. 10월 28일 국회 시정연설에서는 북한군의 우리 국민 살해를 ‘사망’으로 표현하면서 “평화 체제의 절실함을 다시금 확인하는 계기가 됐다”고 했다. 종전 선언이 비핵화와 평화의 문을 여는 신통력을 가진 요술 방망이라도 되는 줄 착각하는 것 같다.


종전 선언과 평화협정의 관계를 제대로 알지 못하면 그럴듯한 종전 담론에 현혹되기 쉽다. 정전협정이 67년간 전쟁 재발 없이 유지되어 왔으면 이것이 사실상 종전이고, 법적 종전은 평화협정이 체결되어야 이루어진다. 평화협정을 체결하는 가장 중요한 목적은 종전이다. 모든 평화협정 전문이나 제1조가 “이 협정(또는 조약)이 발효되는 날 전쟁 상태가 종료된다”는 종전 선언으로 시작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평화협정이 체결되기 전에는 종전 선언을 골백번 해도 종전이 될 수 없고, 평화협정을 체결하자는 정치적 선언에 불과하다.


평화협정 체결 이전에 종전을 선언한 예외적 사례로 1956년 10월 19일 모스크바 일·소 공동선언이 있지만 이는 정식 조약 체결 절차를 거쳐 법적 구속력을 갖춘 사실상 평화협정이다. 태평양전쟁을 종식한 1951년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에 소련이 영토 문제를 이유로 서명을 거부함에 따라 영토 문제를 미결로 남겨둔 채 전쟁 상태를 종료하기 위한 협정만을 공동선언이란 이름으로 별도로 체결한 것이었다.


평화 체제란 평화협정과 이의 이행을 보장할 장치를 포괄하는 개념이다. 그간 한반도 정전 체제를 대체할 평화 체제가 수립되지 못한 것은 정치적 의지가 없어서가 아니라 조건이 충족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남북한과 미국, 중국이 참가하는 한반도 평화 체제 수립을 위한 4자 회담이 1997년 12월부터 1998년 8월까지 6차례나 열렸지만 주한 미군 철수 문제부터 논의하자는 북한 주장에 막혀 아무 성과 없이 끝나고 말았다. 2005년 6자회담 9·19 공동성명 4항도 “직접 관련 당사국들은 적절한 별도 포럼에서 한반도의 항구적 평화 체제에 관한 협상을 가질 것이다”라고 선언했고, 2018년 6월 12일 싱가포르 미·북 정상 공동성명 2항도 “한반도에 항구적이고 안정적인 평화 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공동으로 노력할 것”을 공약했다. 지난 15년간 사실상 종전 선언을 두 번이나 한 셈인데 종전이 아직도 요원한 건 평화 체제 수립과 연계된 비핵화를 북한이 계속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평화협정 체결 과정은 대략 문안 협상, 가서명, 정식 서명, 비준서 교환과 발효의 4단계로 나눌 수 있다. 북한이 비핵화를 결심하는 기적 같은 시나리오를 가정하더라도 핵 동결, 핵 시설 폐기, 핵무기와 핵 물질의 폐기·반출, 핵 폐기 검증 등 여러 단계를 거친다. 평화협정이 미·북 수교 의정서와 대북 안전 보장과 함께 비핵화 완료 시점에 맞추어 발효하려면 서명까지 절차는 그 이전에 완료되어야 할 것이다. 북한 비핵화에 대한 보상으로 평화협정을 어차피 체결해야 한다면 그 과정에 종전 선언을 하나 추가하는 것은 대수가 아닐 수도 있다. 어느 단계에서 종전 선언을 하는 게 비핵화에 가장 도움이 되고 제값을 받을 수 있느냐가 문제다. 북한이 핵 무력 증강을 계속하고 있는 현 상황에서 종전 선언으로 또 한번 ‘평화 쇼’를 벌이거나 일회용 대북 선심용으로 허비해 버리는 건 어리석기 짝이 없는 하책(下策)이다. 이는 친북 세력의 활동 공간을 넓혀주고 유엔군 사령부 해체와 주한 미군 철수 캠페인에 악용될 뿐이다. 그러나 북한이 전면 핵 동결 이후 본격적 핵 폐기에 들어가는 단계에서 종전 선언으로 북한의 제재 해제 요구의 일부라도 때울 수 있다면 달리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미국의 대북 협상 자산 가운데 제재 해제 카드는 핵무기와 핵 물질을 폐기·반출하는 데 사용할 핵심 수단이므로 비핵화의 최종 단계까지 함부로 내줄 수 없고 가급적 아껴두어야 한다. 종전 선언을 안 하려고 제재를 완화해 주기보다는 제재 해제를 늦추는 데 종전 선언을 활용하는 게 비핵화 동력을 유지하는 데 더 유리할 수 있다.


종전 선언은 언제 어떤 조건에서 하느냐에 따라 약이 되기도 하고 독이 될 수도 있다. 한반도의 모든 고질적 문제를 해결할 만병통치약도 아니고 일부에서 우려하는 대로 대한민국의 안보가 종전 선언 하나로 무너지는 것도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