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대한민국 수호] 강찬석, "어두운 시대 밝히던 어느 보통 判事의 용기"
2020.11.25 11:52
어두운 시대 밝히던 어느 보통 判事의 용기
대통령 말이 御命 행세 審判들은 불법 선수로 뛰는 나라 보통 사람들 작은 용기가 시대의 暴走 막을 마지막 브레이크
[강찬석, "어두운 시대 밝히던 어느 보통 判事의 ", 조선일보, 2020.11.21, A30쪽]
그해 여름은 심상치 않았다. ‘오늘 터진 사건’이 ‘어제 터진 사건’을 옛일로 만들면서 세상이 내리막길을 구르듯 굴러갔다. 보통 사람들의 상식을 뒤엎는 일의 연속이었다. 제1 야당 신민당 총재 직무 집행정지 가처분 신청도 그중 하나였다. 그해 4월 30일 치러진 야당 총재 선출 투표에 일부 무자격 대의원이 참석했으니 김영삼 총재 당선은 무효라는 것이었다. 무자격 대의원의 하나로 지목(指目)된 조윤형 전(前) 의원은 3선 개헌 반대 투쟁에 앞장서 옥(獄)살이를 하고도 유신 반대 대열에 가담해 미운털이 박혀 있었다. 사건을 꾸민 배후(背後)가 대통령 경호실장이란 이야기가 파다했다.
신민당은 변호사 자격을 가진 소속 의원 전부를 소송에 투입했으나 법원 심리 초반부터 분위기가 이상했다. 야당을 대리한 일부 변호사가 듣기 따라선 자기네에게 불리한 ‘자해(自害) 변론’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심리가 거듭될수록 법정 여기저기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커져갔다. ‘차나 마시게 한번 들르라’는 민사지방법원 어느 부장판사의 전화가 걸려온 것은 그 무렵이었다. 합의부를 맡은 부장판사는 배석판사 둘과 한방을 썼다. 그렇고 그런 이야기를 주고받다 화제는 자연스레 야당 총재 가처분 신청 사건으로 흘러갔다. 기자에게 가처분 문제는 사용하는 용어부터가 생소했다. 그래 몇 가지를 묻자 그는 목소리를 낮춰 ‘퇴근 시간 후에 보자’고 했다.
부장판사와 기자 사이의 가처분 강의는 그렇게 시작됐다. 몇 년을 만났지만 단 한 번도 ‘정치’의 ‘정 자(字)’도 꺼낸 적이 없는 그였다. 기자에게 그 강의는 분에 넘친 호강이었다. 강사는 매번 독일 헌법재판소 판례(判例)까지 준비해 눈 어두운 제자를 이끌었고, 제자는 묻고 또 묻고 강의 내용을 받아 적었다. 가처분 입문(入門) 강의 진도(進度)가 꽤 나갔을 무렵 법원 결정이 내려졌다.
1979년 9월 8일 서울민사지법은 야당 총재의 직무를 정지시켜달라는 신청을 받아들였다. 제1야당 총재 자리가 법원 결정으로 날아가 버린 것이다. ‘가처분 특별 강의록’ 노트를 들고 편집국에 뛰어 들어왔으나 또 한 고비가 남아있었다. 하나는 가처분 결정에 의해 정당 총재 직무가 정지된 까다로운 법리(法理)를 일반 독자가 이해할 만한 쉬운 용어로 해설·전달할 수 있느냐는 전문성의 문제였다. 다른 하나는 정권에 불리한 기사가 나올 듯싶으면 신문사에 쳐들어와 인쇄용 납활자 ‘본’을 빼앗아가는 정보부의 기습 탄압 사태에도 대비해야 한다는 걱정이었다.
편집국에는 ‘해설(解說)을 써야 한다’는 측과 ‘만일의 사태에도 대비해야 한다’는 측의 의견이 갈려 저녁 식사 무렵 시작된 논의는 밤 11시를 넘겨 편집국장이 ‘쓰자’로 마음을 굳히기까지 이어졌다. 기사는 아슬아슬하게 마감 시간에 임박해 완성됐고 사설란(社說欄)과 같은 페이지에 사설란 전체보다 큰 크기로 실렸다. 신문과 방송을 통틀어 야당 총재 직무 정지 사태를 법리적·정치적으로 조목조목 비판한 해설을 함께 실은 것은 조선일보뿐이었다. 예상대로 신새벽 정보부가 쳐들어와 인쇄용 납본을 압수해갔으나 서울 독자를 위한 인쇄가 끝나 독자에게 배달이 시작된 상태였다.
그날은 일요일이었고 수유리 크리스찬아카데미에서 편집국 기자 연수회가 예정돼 있었다. 강사는 공교롭게 헌법학 전공 서울법대 김철수 교수였다. 법원 가처분 결정의 당부(當否)를 묻는 질문이 잇따랐다. 김 교수는 질문마다 ‘오늘 아침 조선일보 해설 기사 이상(以上)도 이하(以下)도 아닌 바로 그대로다’라고 답변했다고 한다. 날을 꼬박 새운 기자는 연수회에 참석하지 못했다. 그 후 나라는 YH여공 신민당사 농성·김영삼 총재 국회의원직 제명·부마(釜馬) 사태를 거쳐 결국 시대의 종점(終點)으로 흘러갔다.
그날 기자의 이름으로 나간 그 기사의 진짜 필자(筆者)는 모두가 퇴근한 빈 법원 청사에서 가처분 강의를 해준 바로 그 부장판사였다. 기자가 잡은 펜대를 타고 흘러내린 것은 그의 용기였고, 독자 눈높이에 맞게 해설한 것은 오랜 시간 쌓아온 그의 전문 지식이었다. 그 강의가 정치와는 담을 쌓고 살아온 그분 일생에서 ‘처음’이자 ‘마지막 정치적 행동’이었을 것이다.
대통령 말이 어명(御命) 행세를 하고, 심판(審判)들이 불법 선수로 온갖 경기에 뛰는 나라, 모든 법적 브레이크가 터져버린 시대, 그래서 희망은 보통 사람들의 용기밖에 남지 않은 절벽에 서서 텅 빈 법원 청사의 그때 그 강의를 생각한다. 보통 사람도 인생에 한 번은 불의(不義) 앞에 떨치고 일어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그가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