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틴] 낡은 음모론에 빠진 푸틴
2022.10.13 14:19
낡은 음모론에 빠진 푸틴
[정철환, "낡은 음모론에 빠진 푸틴," 조선일보, 2022. 10. 10, A30쪽.]
지난달 30일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러시아군 점령지 4곳 간의 합병 조약 체결식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공개 연설을 했다. 러시아 국영 매체의 실황 중계를 보다 서늘한 공포감을 느꼈다. 합병 조약을 ‘민족자결’이라고 강변하는 뻔뻔함이나, ‘훼방 놓는 이에게 핵무기를 쓰겠다’는 협박 때문이 아니다. 이날 연설은 푸틴 대통령이 가진 세계에 대한 인식(세계관)이 얼마나 뒤틀리고 잘못되어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한 편의 모노드라마였다.
연설 중 일부 내용을 간추려 옮겨 본다. “서방의 목표는 세계 지배다. 그들은 항상 식민주의자였다. 전 세계에서 부와 자원을 갈취하고 지배를 영구화하는 것이 목적이다.” “서방이 말하는 ‘자유민주주의 확대’는 타(他)민족과 국가를 (서방 체제에) 예속화하는 것이다. 여러 국가의 지배 엘리트가 이들에게 동조, 자기 나라를 속국으로 만들었다.” “우리는 더 이상 외세의 억압 속에 살지 않을 것이다. ‘하나 된’ 러시아가 서방의 세계 지배 야욕을 분쇄할 것이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주장 아닌가. 어처구니없게도 지난 세기에 유행한 신(新)마르크스주의적 세계체제론, ‘종속 이론’에 바탕한 세계관이다. 구소련 시절 푸틴이 몸담았던 KGB가 타국 공작원에게 주입한 사상이자 1980년대 한국 운동권이 반미(反美)와 ‘주체적 조국 통일’의 논리로 열렬히 주장한 것이기도 하다. ‘서방’을 ‘미국’으로, ‘러시아’와 ‘러시아 민족’을 ‘한반도’와 ‘조선 민족’으로 바꾸면 똑같은 얘기가 된다. 몇몇 운동권 선배가 당시 유행하던 구조주의와 연결해 “최신 국제 관계 이론이니 꼭 공부하라”고 강권하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