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대한민국 보수] 이승만과 김구… ‘대한민국 國父’는 두 명이면 안되나
2022.12.01 10:18
이승만과 김구… ‘대한민국 國父’는 두 명이면 안되나
민주주의 국가 세운 이승만 통일 노력 멈추지 않은 김구
모두 ‘未完의 지도자’였지만 그들이 대한민국을 있게 했다
[유석재, "이승만과 김구… ‘대한민국 國父’는 두 명이면 안되나," 조선일보, 2022. 11. 22, A39쪽.]
김진현 전 과기처 장관이 최근 출간한 회고록에서 이런 에피소드를 소개했다. 1993년 김영삼 대통령이 취임한 뒤 청와대에서 국수를 먹으며 독대했는데, 이 자리에서 ‘우리나라 현대사 논쟁을 바로잡으려면 백범 김구를 확실히 한국의 정통성으로 안아야 하고, 이승만과 김구의 후손이 화합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건의했다는 것이다.
그래야 백범의 행적에 대한 해석이 반(反)대한민국 좌파 쪽으로 기울게 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YS는 곧바로 이런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에이~ 이승만 독재자래이, 독재자.” 김구에 대해선 별 관심조차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김 전 장관은 이렇게 말했다. “오늘 이 땅 이념 갈등의 뿌리엔 단순히 친북 대 반공이라는 도식을 넘어 주류 내의 자기 정체성 상실에도 큰 원류가 있다.”
이승만과 김구가 언급되는 현대사 관련 기사를 쓰면 댓글은 양분되기 일쑤다. 한쪽에선 이승만을 “미국의 앞잡이로 분단을 고착화한 자”로 몰고 다른 쪽에선 김구를 “대한민국 수립을 끝까지 반대한 친북 협력자”로 폄훼한다. 놀랍게도 이것은 1948~1949년 일어났던 두 사람에 대한 비난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런 시각은 과연 온당한가?
이승만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그를 ‘분단의 원흉’으로 보고, 그가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을 언급한 1946년 6월의 정읍 발언이 남북 분단의 계기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1946년 2월 38선 이북에 이미 세워진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가 사실상 한반도의 첫 단독 정부였으며 김일성 독재의 길을 열었다는 사실은 간과하고 있다.
한반도 전역에 걸친 총선을 통해 통일 정부를 수립한다는 것은 이미 불가능했고, 적화통일이 아니면 일단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기반으로 하는 남한만의 단독 정부를 수립한다는 두 가지 선택지밖엔 없었다. 공산주의의 실체가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던 당시로서는 의문이 남는 선택일 수도 있었으나, 지난 70여 년에 이르는 남북한의 역사는 이승만의 길이 옳았음을 말해 주고 있다. ‘미국의 앞잡이’라는 주장은 미 군정이 시종 이승만을 골칫거리로 여기고 중도파를 지원했던 역사적 사실과 맞지 않는다.
‘김구는 대한민국 수립과 관련없는 인물’이라는 다른 쪽의 주장 역시 실제 역사와는 다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이었던 그가 1945년 11월 미군 수송기 편으로 귀국한 이후 그의 존재 자체가 이승만과 함께 대한민국 정부 수립 세력의 구심점이 됐다. 반탁(反託)운동을 비롯한 숱한 정치적 행보에서 이승만과 손을 잡고 민중을 단합했다. 단정(單政) 수립을 눈앞에 두고 이승만과 의견을 달리해 가망 없던 남북협상에 뛰어들었으나 ‘통일 민주주의 국가 수립’이라는 꿈이 근본적으로 달랐던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이른바 ‘백년전쟁’류의 왜곡된 시각이 보여주는 것처럼, 김구의 임정 세력은 대한민국 수립에 참여하지 않았는가? 그렇지 않았다. 부통령 이시영, 국회의장 신익희, 총리 겸 국방장관 이범석 등 여러 임정 인사들이 갓 출범한 대한민국 정부의 요직을 맡았고, 김구가 서거한 뒤 조소앙 같은 임정 계통 인사는 1950년 5·30 선거를 통해 국회에 진출했다. 6·25가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대한민국의 초기 정치 지형은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통일 민주주의 국가 수립이라는 그들의 꿈이 완전히 실현되지 못했다는 점에서 이승만과 김구는 모두 ‘미완(未完)의 국부(國父)’라 할 수 있다. 어쩌면 그 두 사람은 각각 현실과 이상, 정부 수립과 통일, 민주주의와 민족주의, 권력과 재야를 대변하며 서로가 서로를 보완하는 존재였을 수 있다. 대한민국의 국부가 반드시 한 명이어야 한다는 법은 없다.